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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기쁘오.”
아무도 없는 길 위를 말을 타고 달리는 중에 에투알이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약간 들뜬 것처럼 몸을 흔들거리며 무어라 또 재잘거렸다. 엔디미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맞장구를 대신했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 사이로 말을 타고 달려가는 성배기사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재빠르게 달음박질치는 말은 다리는 마치 바람처럼 가벼웠다.
달리는 말 위에서 보는 세상은 무난한 안녕을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보면 아니었다. 세상 곳곳은 사악한 것들의 침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제 농부들은 괭이로 밭이 아니라 악귀들의 머리를 갈아야 했다. 아낙들은 어린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돌멩이를 들고 싸웠다.
집과 밭이 불타고 시체들이 산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마을과 함께 죽거나 마을을 버리고 도망쳤다. 악마는 악귀들과 함께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녔고 그들은 곡식을 훔쳐 먹는 메뚜기 떼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쓸어버렸다.
전에 없는 대대적인 침략에 사람들은 절망했다. 아무리 저항해도 악귀 하나 제대로 상대하기 힘드니까. 그들은 정든 마을을 버리고 다른 도시로 도망쳤으나 각 성들은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서 단결하거나 흩어진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흩어져서 개인의 생존을 추구했다. 그것이 늦든 빠르든 가장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는 것을 모르고.
“검을 들어라! 살기 위해 싸우지 마라! 살리기 위해 싸워라! 너 자신이 아니라 네 이웃을 위해 싸워라!”
토르델에서 서쪽으로 달리며 엔디미온은 여섯 마을을 구했다. 그는 공격 받고 있는 마을에 후광을 번쩍이며 달려와 사악한 것들을 단칼에 베었다.
울림이 있는 외침에 도망치려던 사람들은 전부 걸음을 멈추고 무기를 들었다. 성배기사는 다시 한 번 성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것은 바람에 나부끼는 기치와 같았다. 사람들은 성검의 번쩍이는 빛 아래에 다시 한 별 단결했다. 그리고 싸웠다.
“성배기사가 돌아왔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몰아내기 위해서!”
엔디미온은 또한 세 도시를 구했다. 그는 성벽 위를 기어가는 악귀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린 후에 그들을 지휘하던 악마의 목을 베었다. 어린 소년의 몸만큼 거대한 악마의 머리를 한 손에 들고서 그것을 머리 위로 들었다.
기운을 잃었던 병사들은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악마가 싸늘한 시체가 된 모습을 보고서 환호했다. 이길 수 있다. 그 작은 희망이 그들 모두의 마음속에 심어졌다.
“나는 오늘 너희에게 승리를 약속했다!”
이것은 약속된 승리였다. 엔디미온의 등장으로 병사들의 마음속에 심어졌던 작은 믿음은 이제 커다란 믿음으로 바뀌었다. 성배기사가 함께하는 한 절대로 지지 않는다!
“단결하라! 그리고 싸워라! 저항을 멈추지 마라!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여섯 마을과 세 도시를 구하고 나서 엔디미온은 다시 서쪽으로 떠났다. 길고 긴 여행이었다. 그는 길을 가면서 불타고 있는 마을과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악귀들을 보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전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세상은 거대한 불덩이였다. 그가 아무리 달리며 마을을 구하고 도시를 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미봉책일 뿐이었다. 커다란 산불이 났는데 바구니로 물만 뿌리는 꼴이었다.
일신의 선의로는 불길이 잡히지 않는다. 이 세상의 안녕을 되찾고 전란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로 단결된 거대한 힘이 있어야 했다.
그것을 위해서 엔디미온은 빠르게 돌아가야 했다. 성도 뒤르겔로 돌아가서 성기사들을 규합하고 악에 맞설 군세를 조직해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반드시 끝내야 할 일.
“성배기사 만세! 성배기사 만세! 성배기사 만세!”
“전능자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돌아온 성배기사를 경배하라!”
엔디미온은 또 두 마을을 구하고 네 도시를 구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왕국 서부의 대교구를 중심으로 힘을 합치라고 했다. 기사수도회들은 각 도시끼리 협력할 방법을 강구했고 도시의 영주들은 갈 곳을 잃은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서부는 일시적인 안정을 되찾았다. 아직 거대한 전쟁의 초입일 뿐이고 또 다시 위험한 적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기 전에 대항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성배기사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서쪽으로.”
“또 새로운 생명을 구하러 가시는군요.”
“아니.”
엔디미온은 이름 모를 노인에게 말했다.
“새로운 희망을 구하러 가는 거지.”
엔디미온은 말을 타고 달렸다. 그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혔기에 이제 왕국 서부에서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성배기사의 이름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 성배기사가 나타나 그들을 구해줄 것을 알기에 사람들은 단결하고 하나로 뭉쳐서 사악한 것들에게 대항했다. 사람은 믿음과 희망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엔디미온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쪽으로, 더욱 서쪽으로 달렸다.
“그리운 느낌이 드는 곳이로군.”
성검 에투알은 나직하게 말했다.
“길, 나무, 바위. 모두 다.”
성배기사는 여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싸우고 달리고 또 싸우기를 반복했다. 백 년 전부터 늘 해오던 일이었으니 특별히 힘들 것은 없었다. 다만 그가 긴장으로 몸을 한 번 굳혔던 것은 지금 있는 이곳이 그의 목적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곧 도착할 것 같소.”
에투알은 이곳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사람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기억은 선명하고 어떤 기억은 불분명했다. 하지만 백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이곳에 대한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이었던 탓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깥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바로 여기였다. 그녀는 호수의 여왕의 딸로 태어나 성배기사를 만났을 때 비로소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머니의 기운이 느껴지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가 애타게 찾던 장소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배를 찾기 위해 딱 한 번 와본 곳이지만 몇 번이나 와봤던 길처럼 익숙했다. 그는 거침없이 움직였고 곧 어느 동굴의 입구를 발견했다.
엔디미온은 말에서 내렸고 근처 나무에 끈을 맸다. 말은 투레질을 한 번 한 후에 근처에 난 잡초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럼 가지.”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잡초를 뜯어먹던 말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주인이 왜 아무것도 없는 벽을 향해서 걷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말이 보기에는 엔디미온은 멍청하게 벽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동굴의 입구는 오직 엔디미온에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신성한 장소였고 오직 성배의 안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한 발자국, 딱 한 발자국을 들였을 뿐이다. 엔디미온은 단 한 발자국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바뀐 것을 느꼈다. 그가 발을 들인 것은 동굴 안이었으나 주변은 동굴의 모습이 아니었다.
싱그러운 녹색의 빛이 가득했고 하늘에서는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산들바람이 엔디미온의 머리카락을 낮게 띄웠다.
분명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주변의 모습은 마치 잘 가꿔진 정원 같았다. 신기할 법도 하지만 엔디미온은 바보처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잔디밭 위를 사슴이나 토끼 따위가 뛰어다녔다. 그것들은 불쑥 들어온 엔디미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왔다. 에투알은 정말 사랑스러운 것을 봤다는 것처럼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이런! 내 귀여운 친구들! 참으로 오랜만이오!”
에투알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서 동물들을 한껏 껴안았다.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에투알이 다급하게 뒤를 따랐다.
“먼저 갈 건 없잖소. 오랜 친구들과의 재회였는데.”
“난 바빠.”
에투알이 짖굿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긴장한 것이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내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까.”
물론 장난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 그냥 장난이었소.”
“나도 장난이야.”
엔디미온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에투알은 잰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다가 무언가에 부딪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발간색으로 달아오른 코를 문지르던 그녀에게 엔디미온이 말했다.
“뭐해?”
“벽이 있었소……. 이곳에서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자는 한 명뿐인데.”
에투알은 으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내가 따라오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오. 참으로 섭섭하군.”
“네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할 생각인가 보지. 거기서 기다려. 곧 올 테니까.”
엔디미온은 에투알을 남겨두고서 다시 움직였다. 그에게 동물들이 다가왔지만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어서 쫓아냈다. 길을 갈수록 초목들이 점차 우거졌다. 그리고 박하처럼 알싸한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우거진 초목을 손으로 밀어내며 엔디미온은 야트막한 호수와 마주했다. 호수 주변에는 동물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 어떤 것도 감히 호수의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미물이라도 본능적으로 감히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엔디미온은 백 년 전을 떠올렸다. 저 호수에서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를. 등 뒤가 따끔거렸다. 성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는 침착하게 날뛰는 성배를 진정시켰다. 아직은 때가 아니로다.
“전능자의 화신, 성배의 운반자, 그리고 나의 대리자.”
고운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엔디미온은 호수를 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엔디미온. 네 마지막 의무를 행하러 왔니?”
그곳에는 여왕이 있었다. 늘씬한 몸에 흰 살결을 가진 여왕이. 금색의 머리에는 왕관이 없었으나 이 호수가 그녀의 왕관임을 엔디미온은 안다.
전능자를 대신하여 성배를 관리하고 있으나 그 누구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신비의 존재.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한낱 필부를 위대한 성배기사로 만들어준 존재.
그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전능자의 일부인지 아니면 스스로 존재하는 정령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존재.
호수의 여왕은 곱상하게 눈을 접어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아직은 그때가 아닙니다.”
엔디미온은 그녀의 빛나는 두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 왔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진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
그것은 도발에 가까운 당돌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