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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83화 (183/199)

183

“마지막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호수의 여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왔다니.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 너무 멀리 왔구나. 네가 누구인지는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지 않니? 말해보렴, 네가 누구인지.”

다물린 입술이 열리고 목소리를 뱉어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는 차분했다.

“성배기사, 성배의 운반자, 전능자의 화신, 번뜩이는 칼날, 신성한 징벌자.”

엔디미온은 자신의 다른 이름을 줄줄이 내뱉었다. 호수의 여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몇 개의 단어를 더 내뱉은 후에 엔디미온은 도전적인 시선으로 호수의 여왕을 바라보았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을 설명하는 말은 많습니다. 그럼 인간 엔디미온은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말을 이었다.

“아마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네가 만들어졌으니까?”

호수의 여왕은 한 가지 얼굴 외에는 없는 것처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웃고만 있었다. 목소리도 처음과 똑같이 따스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일 때 이유 모를 오한이 돋는 것은 왜일까.

“너는 그 말을 믿니?”

“제가 바이올렛과 만났다는 걸 알고 있으셨군요.”

“내 딸이 보는 것은 나도 볼 수 있단다. 브릴리언스 말이야.”

브릴리언스는 성검 에투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것은 오직 호수의 여왕에게만 허락된 이름이었다.

“왜 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아까 물었지 않니.”

호수의 여왕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입술은 적당한 기울기로 호선을 그리며 물에 젖은 것처럼 빛났다. 곱게 접힌 두 눈도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그린 것처럼 완벽하게.

“그 말을 믿느냐고. 그 아이는 사악한 것들의 꾐에 넘어가서 온갖 죄를 범했지. 한때 너를 도와서 대악마를 죽였다고 해도 지금은 악마와 같은 자란다. 아이야, 그런데도 너는 그녀의 말을 믿는 것이니? 나를 의심하고 변절자를 믿는 것이니?”

“저는 바이올렛을 믿지 않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녀는 변절자고 사악한 것들의 꾐에 넘어간 자니까요. 그녀가 저의 마음을 뒤흔들고 혼란을 주기 위해서 거짓을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엔디미온은 웃었다.

“그러니 제게 진실을 말해주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저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제가 누구인지 말입니다. 누구의 자식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그런 아주 사소한 추억들이요.”

웃었다. 마치 몹시 지친 사람이 맥없이 웃는 것처럼. 엔디미온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얼굴로 웃었다.

“절 달래시려면 그냥 아무 말이나 하시면 됩니다. 너는 앤토니의 자식이며, 톨란 마을에서 왔으며, 어렸을 적에는 철없는 개구쟁이였다. 이런 것들을 그냥 거짓말 좀 보태서 말하면 됩니다. 어렵지 않죠. 절 달래는 건 말입니다.”

호수의 여왕의 얼굴이 움직였다. 변화는 아주 느렸다. 하지만 확실했다. 커다란 바위를 세찬 너울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마모시키는 것처럼 꾸준히 얼굴이 변했다.

이제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웃지 않는 여왕은 싸늘했다. 아까는 봄이었으나 지금은 겨울이었다. 이제는 새도 우짖지 않았다. 기분 나쁜 고요가 몸을 휘감았다.

“아이야.”

호수의 여왕은 이곳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널 다른 걸로 대체하게 만들지 마렴.”

그것은 완곡한 인정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엔디미온은 웃었다. 수많은 감정이 담긴 웃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도 없었고 머리를 흔드는 현기증도 없었다.

엔디미온은 그냥 웃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왜 그러셨습니까?”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것은 엔디미온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게 내 의무니까. 의무에 대한 강박적이고 맹목적인 집착의 뿌리는 이곳에 있었다.

“아이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란다. 전능자가 세상만물을 창조했으니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모셨으나 그것은 무지로부터 비롯된 잘못이란다. 전능자에게 이 세상은 단순한 변덕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였고 돌볼 가치가 없는 오물이었다.”

은밀한 진실은 언제나 충격적이다. 엔디미온은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호수의 여왕은 말을 이었다.

“부모가 없는 아이는 반드시 뒤틀리고 흉악한 성정을 갖게 되는 법이지. 그것이 바로 세상의 악의란다. 태초에는 일곱 머리의 용이라고 불렸고 수천 년 전에는 날개 달린 거인이라 불렸으며 수백 년 전에는 세상을 삼키는 뱀이라고 불렸지. 그것이 바로 악의의 총체이니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었단다.”

세상을 위협하는 커다란 위기가 지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를 보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적들이 몇 번이고 나타났었다. 호수의 여왕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악마 다르디낭이라고 불리지. 알겠니, 아이야? 이 세상은 뒤틀려 있단다. 태생을 속일 수 없고 성정을 바꿀 수 없는 법이란다. 이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 악의는 몇 번이고 부활해서 이 세상을 위협할 것이야. 나는 그것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 있었단다. 왜냐하면 나 역시 스스로 존재하는 자였으니까. 거대한 악의 대칭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나였으니까.”

나는 이 세상 모든 선의의 총체란다. 호수의 여왕이 웃으며 말했다. 엔디미온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성배기사의 것처럼 환한 후광이 호수의 여왕의 머리 뒤쪽으로 반짝였다.

“나는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단다. 일곱 머리의 용이 나타났을 때는 세상이 거의 멸망할 뻔 했지. 하지만 내게서 힘과 무구를 받아간 한 남자의 영웅적 행위로 일곱 머리의 용을 무찌를 수 있었단다. 그때는 아직 성검도 없을 때였지. 우후훗, 내 딸 브릴리언스 말이야.”

한 번 곱게 웃고서 다시 말이 이어졌다.

“날개 달린 거인이 나타났을 때는 고대 왕국의 여기사가 나의 대리인을 자처하고 나섰지. 나는 그녀에게 기꺼이 내 힘을 나누어 주었고 오랜 싸움 끝에 날개 달린 거인을 무찌를 수 있었단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세상을 삼키는 뱀이 나타났을 때는 은퇴한 노기사에게 힘을 빌려주었단다. 그의 노련함과 내 힘이 합쳐지자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고 긴 싸움 끝에 세상을 삼키는 뱀을 무찌를 수 있었단다. 애석하게도 노기사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세상을 위협했던 세 번의 악의는 모두 무찔렀다. 그리고 네 번째 악의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성배기사 엔디미온이 해결했다. 호수의 여왕은 그 이야기도 할 것인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내가 세 번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게 무엇인지 아니? 그것은 이 세상에는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

“안전장치?”

“그래, 안전장치. 이 세상이 세 번이나 살아남은 것은 대단한 행운이 작용한 결과였단다. 나는 이 호수에서 떠날 수 없고 내 힘을 나누어 줄 용기 있는 자를 찾아 나설 수도 없지. 그저 그런 자들이 날 찾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해. 만약 그런 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엔디미온은 호수의 여왕의 거처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만들어진 존재인 그조차도 숱한 고생을 통해서 겨우 찾아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곳은 단순히 길을 알고 있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자격의 문제다. 호수의 여왕의 힘을 나누어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선의를 가졌는지 아닌지의 문제.

“세상에서 악의를 몰아낼 수는 없단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재앙이라면 미리 대비하면 된다고. 그게 바로 너였단다. 악의의 총체가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나타날 때 그것에 반응해서 일어날 나의 기사.”

길었던 설명 끝에 호수의 여왕은 이제 진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세상을 삼키는 뱀을 무찌르고 나서 나는 곧장 널 창조했단다. 내 힘의 일부를 영영 잃어가면서. 그리고 세상 속에 널 숨겨두었지. 언젠가 악의가 새로운 이름으로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나는 또한 너에게 줄 무기를 만들었단다. 그게 바로 브릴리언스지.”

“제가 대악마 다르디낭을 죽이고 난 후에는 어쩌시려고 했습니까?”

“널 잠들게 하려고 했단다. 다음 악의에 대비하기 위해서. 기억을 지우고 다시 한 번 날 찾아오게 해 나의 기사로서 싸우게 할 생각이었단다. 왜냐하면 악의는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다시 돌아오니까. 반드시 말이야.”

엔디미온은 입을 꾹 다물고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는 다물린 입술을 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힘겹게 입술을 밀어올리고 혓바닥을 움직였다.

“그런데 왜 바로 잠들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백 년이나 절 더 깨있게 한 것은 왜입니까?”

“너에게 백 년의 의무를 내린 것은 조금이라도 세상의 악의를 약하게 하기 위해서였단다. 성수로 독기를 몰아내고 악의를 희석시켜 다음에 나타날 괴물의 힘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너와 함께 했던 영웅들이 의무를 내버리고 도망쳤지만 사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단다. 나는 네가 절대로 의무를 버리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세상의 모든 선의입니다.”

엔디미온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선의를 왜 제게는 나누어 주지 않으셨습니까? 왜 저를 여기까지 내모셨습니까? 왜 저를 당신의 마음대로 쓰고 버리고 고치고 다시 쓰려 하셨습니까?”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또 그 말이었다. 엔디미온이 언제나 하던 그 말. 빌어먹을 의무.

“누군가 위선을 부려야 한다면 그건 내 역할이니까. 그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내 선의니까. 아이야, 너는 내 일부란다. 너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니? 하지만 이것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단다. 그만 노여움을 거두어주렴.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는 결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단다. 아이야, 네가 정말 힘들다면 네 기억을 지워줄 수도 있단다. 그리 하겠니?”

엔디미온은 웃었다. 어깨를 늘어트리고 힘없이. 언제나 당당했던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웃었다.

“아니오. 그럴 것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입니다. 그게 의무니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아이야, 네게는 언제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네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을 선물해주마. 그것은 속죄일수도 없고 사죄일수도 없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구나.”

“그러실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배기사 엔디미온이 아니라.”

엔디미온은 약간 충혈 된 눈으로 호수의 여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인간 엔디미온으로서 죽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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