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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84화 (18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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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이 아니라 인간 엔디미온으로 죽겠다니. 엔디미온은 본래 인간이었다. 호수의 여왕이 인간으로 만들었으니까.

난해한 한 마디를 들은 호수의 여왕은 눈썹을 한 번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줄곧 침착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노기 서린 목소리를 냈다.

“아이야, 감히 내 뜻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니? 너를 만든 것이 누구인지 잊지 마렴. 너를 왜 만들었는지도 잊지 말고. 너에게는 역할이 있고 의무가 있다. 그것을 감히 어기려 드는 것이니?”

“백 년 전의 나는 영웅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사람들을 결집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사악한 것들과 맞서 싸울 것을 독려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대악마 다르디낭을 무찔렀지요.”

“그래. 그것이 네 역할이고 의무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저는 잠들지 못한 망령일 뿐입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의무로부터 숨거나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마땅히 맞이해야 할 마지막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내 의지로 끝을 맺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은 오롯이 나의 것이니까.”

호수의 여왕의 등 뒤로 반짝이던 후광이 일렁거렸다. 그것은 마치 성난 불꽃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두 눈에서 번쩍이는 강렬한 안광이 그녀의 노여움을 대변했다.

싱그럽게 녹색으로 빛나던 식물들이 생기를 잃고 고개를 숙였다. 햇살을 따라 반짝이던 호수가 빛을 잃었다. 날아다니던 나비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동물들은 멀리 도망쳐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여왕의 진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엔디미온만은 똑바로 서서 호수의 여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해야 하는 일이라면 결코 숨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아이야, 너는 기어코 날 화나게 하는구나! 내가 널 왜 만들었는지 잊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니? 나는 이 세상의 수호자다! 전능자가 마음대로 만들고 버린 이 세상을 진정으로 지킨 것이 바로 나란 말이다! 너는 내 일부면서 어찌 내 마음을 몰라주니? 어째서 날 화나게 하는 것이니? 아이야! 너는 내 뜻을 따라야 한다!”

하늘이 갑작스럽게 어두컴컴해지고 커다란 우레가 쳤다. 산천초목이 벌벌 떨고 공기가 흔들렸다. 여왕의 노여움에는 감히 대적하기 힘든 박력이 있었다.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을 때였다. 성난 여왕의 옥음이 공기를 타고 내달렸다.

“너는 모른다, 아이야! 이 세상이 몇 번이나 멸망할 뻔 했는지! 몇 번이나 궁지에 몰렸는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너는 아무것도 몰라!”

신경질적으로 외침을 내뱉은 호수의 여왕은 두 눈을 더욱 번뜩이며 말했다.

“만약 내가 널 만들지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세상이 망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있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고 세상을 다시 한 번 지킬 수 있었다! 아이야, 명심하렴! 너는 미래의 수호자란다! 이제부터 무수히 길게 이어질 미래를 지키는 수호자란 말이다! 너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는데 어찌 그걸 내버리겠다는 것이니! 그것은 선의가 아니라 악의다!”

한바탕 쏘아붙인 호수의 여왕이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씩씩 소리를 내며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호수의 여왕이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우레가 쳤고 바람이 불었으며 서릿발이 섰다. 모두가 침묵할 때 오직 한 사람만이 말했다.

그의 이름은 엔디미온이었다.

“제가 없어도 미래는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억측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는 겁쟁이의 억측이지요.”

어두컴컴해진 세상을 몰아내는 빛이 있었다. 그것은 성배의 빛이었다. 시들었던 식물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빛을 잃었던 호수가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날아갔던 나비들이 되돌아왔다. 도망쳤던 동물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분위기가 변하고 있었다. 단 한 명에 의해서.

“사람은 약합니다. 혼자서 악귀 하나 상대하지 못하고 악마가 나타나면 도망치기 급급하지요. 그들은 때때로 추악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알량한 힘을 탐해 사악한 것들의 하수인을 자처하기도 하지요. 맞습니다. 그들은 약하고 추악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하지만 사람은 또한 강합니다.”

엔디미온은 말했다.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우레가 잦아들고 바람이 멈췄으며 서릿발이 녹았다.

“사악한 것들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단결했습니다. 악마와 악귀들이 나타났을 때 처음으로 사악한 것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성배기사도 아니고 성기사도 아니고 그저 사람이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우던 그저 한 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가능한 싸움을 하고 불가능한 승리를 얻어냈습니다. 그들에게는 의지가 있습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불굴의 의지가. 제가 없더라도 그들은 싸우고 투쟁하여 승리를 쟁취할 겁니다.”

이야기를 듣던 호수의 여왕이 참다못해 소리를 내뱉었다.

“헛소리다! 만약 악의가 또 한 번 괴물의 형상으로 이 세상을 습격했을 때 그들이 너 없이 과연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으니? 불가능하다!”

“아닙니다. 그들을 해낼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 번이나 위기를 넘겼으니까. 만약 네 번째 위기 때 제가 없었다고 해도 그들은 다시 한 번 승리했을 겁니다. 저항하고 투쟁하며 이길 방법을 찾아냈을 겁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하니까. 의지는 결코 휘지도 않고 부러지지도 않으니까. 불굴의 의지란 그런 것이니까.”

“입 다물어라, 아이야! 그들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내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곱 머리의 용이 나타났을 때 내 힘을 빌린 자가 없었다면 세상을 구할 수 있었겠니? 날개 달린 거인이 나타났을 때 내 힘을 빌린 여기사가 없었다면? 세상을 삼키는 뱀이 나타났을 때 내 힘을 빌린 노기사가 없었다면? 그리고 대악마 다르디낭이 나타났을 때 네가 없었다면 어땠을 것 같니?

세상은 멸망했을 것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것이다! 아이야! 네가 만약 내 뜻을 거스르겠다면 나는 이제 사람들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겠다! 악의는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고 그럼 세상은 멸망하겠지!”

호수의 여왕의 말은 맞았다. 그녀의 힘이 없었다면 세상은 진즉 멸망했을 것이고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엔디미온도 알고 있었다. 호수의 여왕의 세상의 존속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를. 그럼에도 그는 말했다. 힘주어서 말했다.

“그래도 사람은 이겨낼 겁니다.”

엔디미온은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반드시요. 그들은 거대한 악의에 밀려 몇 번이고 패주할지도 모릅니다. 몇 번이고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몇 번이고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싸울 겁니다. 몇 번이고 다시 기운을 차릴 것입니다.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겁니다. 지는 것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부끄러운 것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긍지가 있으니까요.”

기억하십시오.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쐐기처럼 호수의 여왕의 가슴에 박혔다.

“몇 번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기만 한다면 아직 진 게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은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말을 마치고서 엔디미온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호수의 여왕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돌아가는 엔디미온의 뒷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엔디미온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엔디미온의 말은 그녀에게 강렬한 충격이 되었다. 사람은 지지 않는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 세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악의의 괴물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힘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것을 부정했다. 호수의 여왕이 가진 힘은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사람은 언젠가 그것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아낼 것이라고.

이 세상이 지켜낸 것은 호수의 여왕이 가진 힘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라고. 자신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있을까. 화를 내고 반박하며 엔디미온을 윽박지를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호수의 여왕은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자신의 착각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니까.

아이는 자란다. 성장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호수의 여왕은 이 세상을 자신이 지켜야 할 아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훌쩍 자라서 이제 스스로 지킬 만한 힘을 얻었다.

사람은 약하다. 또한 강하다. 그리고 지지 않는다. 그 말을 내뱉은 엔디미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호수의 여왕의 것이 아니다. 백 년의 시간은 충분히 길었다. 이제는 안으려고 해도 안을 수 없었다.

“아이야······.”

엔디미온이 목소리에 반응해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걸음을 멈추는 일도 없었다. 그는 호수의 여왕을 뒤로 한 채 동굴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멈추면 다시 달릴 수 없음을 알기에.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길을 가리는 초목을 손으로 밀어냈다. 몇 발자국 더 걸으니 아까 헤어졌던 성검 에투알과 다시 조우했다.

에투알은 엔디미온을 발견하자 얼른 달려왔다.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소?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는데 혹시 어머니께서 화가 나신 거요? 바이올렛이 거짓말을 해서?”

“에투알,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얼른 돌아가야겠다.”

“엔디미온! 말해주시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어머니가 저리 화나신 것은 처음 보오.”

“나에 대한 이야기.”

엔디미온은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

“사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아······. 해야 할 일······. 그 말이 맞소. 하지만 나중에 꼭 말해주어야 하오?”

“약속하지.”

에투알은 다시 성검의 모습으로 변했고 엔디미온은 그것을 허리춤에 찼다. 그는 거침없이 동굴의 출구 쪽을 향해 걸었다. 빠른 걸음이었고 거의 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지만 호수의 여왕은 엔디미온이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동굴 근처에서 한가롭게 잡초를 뜯고 있던 말 위에 올라타며 엔디미온은 결연하게 말했다.

“끝을 낼 때가 왔다. 싸움도, 내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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