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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사들은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괴성을 질렀다. 사람이 낼 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괴물을 상대하려면 자신도 괴물이어야 했으니까.
“고지를 사수하라! 우리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 도망치지 마라!”
강철 칼날 기사수도회의 대장인 아레온은 수염을 우아하게 기른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현재 언덕 위에서 성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며 아래에서 몰려드는 악귀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본래 한적한 작은 도시의 교구장이었던 그는 추기경 에스메렐다의 부름을 받고 이 전장에 달려왔다. 처음에는 출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현재 추기경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를 가진 에스메렐다의 부름을 받았으니 공을 세워서 본청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전장의 모습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오늘 싸우지 않으면 내일 죽는다. 이 언덕 하나를 사수하기 위해서 수많은 병사들이 달라붙어야 할 정도로 적이 많았다. 그는 이곳에 며칠 있었을 뿐이지만 일생 동안 본 것보다 더 많은 악귀들을 상대했다.
그리고 오늘 또 싸우고 있었다.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성기사가 성배기사의 적생자이며 그의 강철 같은 마음과 의지를 이었다고 해도 사람은 결국 사람이니까.
“막아! 뚫리면 전부 죽는다! 죽을 각오로 막아!”
그럼에도 아레온은 군대를 이끌고 악귀들에 맞서 싸웠다. 도망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도망칠 이유도 없다.
죽음을 각오한 저항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강성하던 적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아무리 악귀가 멍청해도 언덕 위에 있는 것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깨지지 않는 강철의 성벽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레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남은 병력만으로 저들을 일소할 수는 없지만 버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추가 병력이 올 테니 그들과 합류해서 언덕 아래를 청소해버리면 될 일이었다.
“조금만 더 힘내라! 추가 병력이 오면 우리의 승리다! 우리가 누구냐! 자랑스러운 강철 칼날 기사수도회다!”
병사들과 성기사들은 또 한 번 괴성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악귀들은 뒤로 물러나는 듯 했다. 아레온은 이 길고 길었던 공방전이 드디어 끝나는구나 생각했지만.
“키―아―아―악―!”
소름 끼치는 소리,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소리, 입 안이 바싹 마르게 하는 소리. 생전 처음 들어본 괴성이 모두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본 것은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거대한 생물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 뼈. 앙상하게 뼈만 남은 괴물은 너덜너덜한 날개를 흔들어 비행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렸다. 뼈만 남은 몸이었기에 뱃속에서 무엇이 들끓는지 훤히 보였다. 그것은 불꽃이었고 곧장 목구멍을 통해서 발사됐다.
하늘에서 태양이 떨어졌다. 아레온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끄아아아악!”
“뜨거워! 아아아악!”
악귀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밀집 대형을 이루었던 것이 독이 되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이었는데 수백 명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의 비명을 양식 삼아 더욱 크게 타올랐다.
“제기랄! 저건 또 뭐야? 다들 뒤로 흩어져! 밀집하지 말고 흩어져! 또 온다!”
아레온은 명령하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상에서 숫자로 밀어붙이는 악귀들은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늘 위를 날면서 불을 뿜는 저 괴물은 도저히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마법사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가 이끄는 군대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성기사들은 신성력으로 불꽃의 열기에 대항할 수 있지만 그 효과는 자기 자신에만 적용됐다. 이대로 가면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그냥 잃어야 했다.
‘씨발, 저걸 무슨 수로 죽이라고!’
아레온은 연신 욕을 내뱉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에스메렐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사수하라고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기사가 아무리 잘났어도 하늘을 날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 후······.”
결국 어쩔 수 없이 후퇴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병력의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천히 좌우로 갈라졌다. 아레온은 눈썹을 까딱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가 묻기도 전에 병사들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결은 검고 키는 크다. 맨몸이면서 갑옷을 입은 성기사보다 덩치가 배는 컸다. 그리고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주먹이었다. 회색의 주먹. 강철의 주먹.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제법 크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 여유로운 태도라서 아레온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누구요?”
“누구냐고? 보면 모르냐? 원군이잖아.”
“워, 원군? 그럼 당신은 전령인가? 본대는?”
“무슨 헛소리야. 내가 전령이겠냐? 내가 본대야. 내가 원군이라고.”
“아니, 그럼 당신 혼자 왔단 소리요? 원군을 보내준다면서? 이게, 이게, 무슨 씨발! 에스메렐다 추기경이 날 속였군! 빌어먹을 년!”
아레온은 화를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진정하라고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충분하기는 개뿔이! 뭐가 충분해! 혼자서 뭘 하겠다고!”
“충분하지. 왜냐하면 난 악마사냥꾼이니까.”
“뭐?”
악마사냥꾼은 아레온이 손에 들고 있던 전투망치를 뺏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거 빌린다.”
뭐하는 짓거리냐고 물을 힘도 없었다. 아레온은 힘이 쫙 빠져서 그냥 악마사냥꾼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악마사냥꾼은 전투망치의 손잡이를 잡고 어깨를 크게 돌렸다. 붕, 붕, 붕. 한 바퀴 회전할 때마다 엄청난 소리가 났고 바람이 일어서 먼지구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돌린 괴물과 회전하는 전투망치가 일직선이 되었을 때 어깨의 탄력을 이용해서 힘껏 던졌다.
전투망치는 마치 화살처럼 날아갔다. 공기를 찢고 바람을 가르며 정확히 괴물의 날개를 박살냈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뼛가루가 아래로 떨어졌다. 또 한 번 불꽃을 뱉으려던 괴물은 날개 하나를 잃고 비틀거리며 아래로 추락했다.
악마사냥꾼은 손을 한 번 털고서 말했다.
“내가 저 용 끝장내고 올 테니까 너희는 악귀 새끼들 다 죽여. 할 수 있지?”
아레온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사냥꾼이 붙잡은 어깨가 부러질 것 같아서.
“그럼 간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나도 금방 끝내고 와서 도와줄 테니까.”
악마사냥꾼은 훌쩍 뛰어서 언덕을 내려갔다. 그는 길을 가로막는 악귀들의 머리를 주먹으로 다 터트리며 질주했다.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 달라붙었으나 괴력을 발휘하는 그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히려 수십 마리의 악귀들을 그대로 매단 채로 달렸다. 아레온은 언덕 위에서 길이 뚫리는 것을 보았다. 악마사냥꾼은 거침없이 달려서 바닥에 떨어진 용과 마주했다.
“거 한 번 뒈졌으면 땅 속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사람 귀찮게 난리야.”
악마사냥꾼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주먹을 들었다. 그의 강철 주먹이 햇빛을 받아서 반짝였다. 하늘을 나는 용을 죽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땅에 내려와 있을 때 때려죽이면 된다.
하지만 그 방법을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용은 날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달릴 줄도 아니까.
악마사냥꾼에게 한쪽 날개를 잃은 용은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박찼다. 살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뼈만 남은 용이지만 그 박력은 대단했다. 그 누가 저 거대한 용의 진격을 몸으로 막아서려고 할까.
“나지, 나야. 내가 막아선다.”
악마사냥꾼은 실실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자세를 낮추고, 바닥을 힘껏 딛고, 어깨를 뒤로 빼고, 주먹을 꽉 쥐고.
그리고 달려오는 용에게 내지른다. 단지 그것뿐이다.
“키―악!”
입을 벌리고 내뱉었던 괴성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악마사냥꾼의 강철 주먹이 그대로 대가리를 박살냈으니까.
사방으로 뼛조각이 튀었다. 그리고 악마사냥꾼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서 쓰러지는 용의 목뼈를 부쉈다. 그 다음은 등뼈, 다음은 갈비뼈, 다리뼈. 순서대로 착실하게 모두 분쇄했다.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게.
악마사냥꾼은 후 하고 숨을 내뱉은 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덕 위에서 병사들과 성기사들이 아래로 내달리고 있다. 그들은 함성을 질렀지만 처음과 같은 괴성은 아니었다. 본능적인 흥분과 함께 신이 나서 내지르는 함성이었다.
“새끼들, 빠져가지고 이제 내려오네.”
악마사냥꾼은 혼자서 웃더니 주먹을 꽉 쥐고서 몸을 돌렸다. 그는 숨을 한껏 삼켰다가 내뱉으며 병사들과 똑같이 함성을 내뱉었다.
“더러운 악귀 새끼들아! 딱 기다려라! 강철 주먹 나가신다!”
전장의 상황은 뒤바뀌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지루한 공방전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는 학살극으로.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악마사냥꾼이 있었다. 그는 일당백을 넘어섰다. 이미 혼자서 군대였다.
악마사냥꾼 단 한 명의 참전으로 전투는 시시할 정도로 쉽게 끝났다. 며칠간의 분투가 우스울 정도로.
병사들과 성기사들은 단 한 마리의 악귀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죽였고 자연스럽게 악마사냥꾼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아레온은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
뒷말은 뻔했다. 누구요? 악마사냥꾼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언덕 위로 수많은 군세가 나타났다. 수십 개의 깃발은 수많은 기사수도회의 연합을 의미했다. 가장 중앙에서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에는 황금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아레온은 언덕의 끝에서 끝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군세를 보았다. 마침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고 군세는 후광이 비추는 듯 광명에 휩싸였다. 전능자의 군세가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경건한 장면이었다.
일부 병사들과 성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언덕 위에 정지한 저들은 이 시대의 희망이었다. 가는 곳마다 악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구하는 참된 희망.
“거 씨발 일은 내가 다했는데 멋있는 척은 왜 자기들이 하는 거야.”
악마사냥꾼이 툴툴댔다. 언덕 위에서 말을 타고 몇 사람이 내려왔다. 아레온은 그들이 누구인지 얼른 알아보았다.
망치와 정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로게나 대교구장인 그림발드, 가시왕관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아델리온 가문의 적자인 고결한 에우레킬슨.
그리고 열두 추기경 중 하나이자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대장이며 군세의 주인인 에스메랄다.
저항의 횃불을 들고 희망의 기치를 널리 알리는 기수들이 이 자리에 모두 모였다. 아레온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수고했습니다, 아레온 경. 내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했군요.”
아레온은 에스메렐다의 칭찬을 들으며 악마사냥꾼을 슬쩍 보았다. 아까 전에 욕한 걸 고자질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당신도요.”
에스메렐다는 곱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강철 주먹의 비다르다운 무용이었습니다.”
아레온은 그 순간 이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