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86화 (186/199)

186

“가, 강철 주먹의 비다르······.”

아레온은 악마사냥꾼의 이름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강철 주먹의 비다르라는 이름은 성기사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그도 그럴게 그는 갑작스럽게 성도에 나타나 에스메렐다 추기경을 만나게 해달라며 난동을 부렸으니까. 그를 말리려고 성기사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었으나 결국 진정시키지 못해서 에스메렐다가 직접 나왔다고 했다.

그런데 에스메렐다는 비다르를 보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며칠 뒤에 비다르는 황금장미 기사수도회를 일하는 용병이 되었다. 뒤르겔의 추기경들은 감히 성도에서 난리를 부린 이 무뢰한을 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일부 성기사들의 강렬한 반발에 부딪치고 말았다.

추기경들은 무뢰한을 감싸주는 성기사들을 보고서 단체로 정신이 나갔다고 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의 여섯 기사 중 하나인 비아네가 나서서 비다르를 비호했다.

이 기가 막힌 일 때문에 추기경들은 바짝 열이 올랐고 에스메렐다 추기경과 사이가 나쁜 성기사들을 부추겨 일을 크게 키우려고 했다.

하지만 비다르는 자신에 대한 소음들을 오직 실력 하나로 잠재웠다. 특등기사는 물론이고 여섯 기사의 실력도 아득히 넘는 강력함으로 엄청난 공적을 세우며 추기경들의 입을 닥치게 했다.

이제 성도에서 강철 주먹의 비다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비다르가 백 년 전 영웅의 환생이라고 환호했다.

“라이오넬은?”

“영감님은 칼립손과 함께 다른 곳에 있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그럼 난 이제부터 쉴 거니까 일 생기면 불러라.”

비다르는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떠나다가 고개를 홱 돌려서 말했다.

“아, 그리고 저 친구가 네 욕하더라.”

씨발······. 아레온의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아레온 경.”

“······부르셨습니까!”

아레온은 얼른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입술을 옴짝거리며 작게 비다르의 욕을 했다. 머리 위로 에스메렐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리한 명령이었는데도 아주 잘 해냈군요. 오늘 아레온 경이 지킨 이 언덕은 반격을 향한 위대한 한 걸음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병들을 뒤쪽으로 보내세요. 이제부터 본대에 합류해서 싸우게 될 겁니다. 내일 출발이니 가서 쉬세요.”

“알겠습니다!”

아레온은 감격했다. 황금장미 기사수도회가 이끄는 군세에 합류했으니 이제부터 더 위험한 싸움이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욱 큰 영광을 얻게 되리란 뜻이었다. 가시밭길을 걷는 자에게 영광 있으라.

아레온은 생존한 병사들과 성기사들을 시켜서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에스메렐다의 군세가 언덕 위에 진지를 짓기 시작했다. 한참 진지를 구축하는 중인데 멀리서 또 다른 성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립손과 라이오넬이 이끄는 부대였다.

에스메렐다는 기쁘게 그들을 맞았다. 빠르게 진지 구축을 끝낸 군세는 보초병들을 제외하고 내일을 대비해서 휴식에 들어갔다. 에스메렐다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림발드, 에우레킬슨, 칼립손, 라이오넬, 비다르가 모인 회의였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에스메렐다는 탁자 위의 지도를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왕국 중부는 이미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악마들을 몰아냈습니다.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각 도시의 기사수도회만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북부.”

지휘봉이 지도의 북쪽을 가리켰다.

“다시 결집한 북부 요정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의용대가 혁혁한 전공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각 기사수도회가 연합하여 악마들을 처부수고 있지요. 이곳도 곧 안정화될 겁니다.”

에스메렐다는 북부에 요정기사와 대마법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서부. 이곳에서는 놀랍게도 성배기사가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비다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거 엔디미온이잖아. 놀랍기는 뭐가 놀라워.”

“하지만 성배기사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꺼려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당하게 밝히고 사람들을 구원하고 다니시는군요. 놀라울 만한 일이 아닙니까?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기에.”

비다르는 이번에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쓴맛이 났다. 그는 엔디미온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고 다닐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에스메렐다는 지휘봉으로 지도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여행하실 때 저희 기사수도회의 이름을 대고 다닌 건가요? 사람들이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엔디미온과 성배기사 엔디미온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거냐고 매번 물어본단 말입니다.”

비다르는 큭큭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아냐? 그거야 엔디미온 마음이지.”

“후······. 다음은 남부입니다. 이곳은 본래 악마사냥꾼들의 세력이 강한 곳이라 성기사들이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군요. 여유가 있는 기사수도회를 남부 쪽으로 보내면 상황이 수습될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남부의 전사들은 약하지 않다고.”

남부 출신이 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에스메렐다는 또 한 번 지휘봉을 움직였다.

“문제는 동부입니다. 사람들을 지키고 악을 몰아내야 하는 성기사로서 몹시 부끄러운 일이지만 동부의 거의 대부분이 악마들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도망친 악마와 악귀들이 동부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싸움을 끝내려면 동부에서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결연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왔고요.”

여명교단에서는 총력을 집중해서 싸움을 끝내려 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것은 길게 끌수록 손해만 늘어나는 일이었다. 각지의 기사수도회가 한 자리에 집결할 것이고 그들의 신앙심은 날카로운 창칼이 되어 악마들을 관통할 것이다.

그 생각은 악마들도 동일했다. 그들 역시 한 번의 싸움으로 끝을 볼 생각인지 군세의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대가리를 박살낼 수고를 덜었으니까.

“며칠 뒤면 집결지에 도착할 겁니다. 우리가 맡은 임무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에스메렐다의 황금장미 기사수도회는 영광스럽게도 선봉대의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지금의 언덕에서 며칠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결지까지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고 진지를 구축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속속 모여드는 다른 기사수도회와 힘을 합쳐 사악한 적들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몰아내리라.

“에우레킬슨 경, 물자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아직 괜찮습니다. 말들을 먹일 건초가 조금 부족하기는 한데 그건 집결지까지 가는 길에 있는 도시에서 징발하면 됩니다. 그리 많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요.”

“그림발드 경, 부상자들의 상태는 어떤가요?”

“종군사제들의 기도 덕분에 대부분 빠른 시일 내에 자리로 복귀하고 있다네. 물론 부상이 너무 심한 자들은 뒤르겔로 보내서 요양할 수 있게 조치했고. 최근에는 큰 전투가 없어서 부상자들의 숫자도 별로 없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칼립손 경, 오늘 전투 결과에 대해서 보고해주세요.”

“라이오넬님과 함께 악마 열다섯을 죽이고 악귀 백서른 마리를 격퇴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밤늦게까지 회의가 이어졌다. 사실 비다르와 라이오넬은 이런 쪽으로는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먼저 퇴장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다. 라이오넬은 곧장 잠을 자러 갔고 비다르는 몰래 빼돌린 술병을 들고서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저들끼리 떠들고 있던 성기사들은 비다르를 보고서 알은체를 했다. 비다르도 대충 인사를 받아주고서 그들의 수다에 끼어들었다. 그는 성기사들에게 술 한 모금을 권했지만 모두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군율이 엄격하기에 전시에 함부로 입에 술을 대며 엄벌을 받았다. 군율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오직 비다르뿐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비다르 혼자서 술을 마셨다. 그는 성기사들과 함께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고 어깨를 들썩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이제 성기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근무 교대를 하러 가는 자도 있었고 잠을 자러 가는 자도 있었다. 성기사들의 숫자가 점차 줄었고 으슥한 새벽이 되어서는 모닥불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오직 비다르뿐이었다.

밤바람이 찼다. 반대로 얼굴은 취기 때문에 뜨거웠다. 비다르는 가만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백 년 전이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악마들을 죽이고 악귀들을 찢었지. 그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비다르는 입을 벌려서 입김을 내뱉었다.

도망칠 수도 있었다. 마지막 의무를 행할 때 그랬던 것처럼 도망쳐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

백 년 전의 그는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돈과 명예를 위해서 성배기사와 함께 했으나 아무것도 보답 받지 못했다. 온갖 위험한 싸움을 하고 수없이 많은 악마들을 죽였으나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다르는 에스메렐다를 찾아갔다. 단 한 번도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똑바로 걸어서.

비다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았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척 해도 결국 위기에 빠진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게 자기 천성이라는 것을.

“······멍청한 새끼. 이러니까 백 년 전에 뒤통수 맞은 거 아니야.”

병신, 멍청이, 바보. 비다르는 욕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으신가요?”

뒤를 돌아보자 에스메렐다가 있었다. 비다르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이제 잘 거야.”

비다르는 성큼성큼 걸어서 에스메렐다를 스쳐지나갔다. 그런 그의 귓가에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에스메렐다는 악마와 악귀들을 지배하는 어둠의 여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든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영웅들이 모두 모였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까?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에스메렐다는 그것을 몰아낼 확신을 요구하고 있었다.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영웅의 한 마디를.

“몰라, 씹.”

하지만 비다르는 버릇처럼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점쟁이냐? 싸우기도 전에 이길지 아닐지 알게?”

“······그 말이 맞군요.”

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에스메렐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 비다르가 불쑥 말했다.

“그래도 하나는 알지.”

“어떤 것 말씀입니까?”

비다르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성배기사가 돌아올 거라는 것. 반드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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