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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87화 (18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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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말이었다. 에스메렐다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고 비다르는 손을 흔들면서 떠나갔다. 이제는 불씨만 남은 모닥불을 가만히 쳐다보던 에스메렐다도 몸을 돌려 막사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에스메렐다의 군세는 집결지를 향해 전진했다. 집결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출발하고 늦은 밤에 휴식했다. 강행군이 며칠 이어졌지만 성기사들은 지친 기색 없이 움직였다.

물론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진 성기사들과 달린 일반 병사들에게는 제법 버거운 행군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명이 있었다. 사악한 것들로부터 이 세상과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비록 병사들은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후방에서 보급이나 지원 임무를 맡지만 그래도 이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성기사들의 뒤를 힘껏 쫓았다.

“생각보다 조용하군.”

비다르가 말 위에서 말했다. 그의 눈은 멀리 있는 것까지 볼 수 있었고 귀는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과연 영웅다운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 능력으로도 주변에서 적들의 기척이 느낄 수 없었다.

적들이 잘 숨은 것이 아니라 그냥 없는 것이었다. 집결지까지 이동하면서 몇 번은 전투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오산이었다.

“긴장의 끈을 늦추게 하고 급습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습니다.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하지요.”

에스메렐다는 척후병을 먼저 보냈다.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달려간 척후병은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 돌아왔다.

“근처에 적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적들의 매복 가능성은?”

“저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근거는?”

“악마라면 자존심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고 악귀라면 그런 걸 할 머리가 없으니까요.”

신랄한 말이었다. 비다르가 웃었고 에스메렐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진합시다.”

척후병의 말대로 적들은 없었다. 매복도 없었고. 에스메렐다의 군세는 쉬지 않고 나아갔다. 행군과 휴식을 며칠 반복한 끝에 그들은 언덕 위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그들이 모이기로 한 집결지였다.

에스메렐다는 척후병 몇을 보내서 정보를 수집하고 병사들에게 진지를 구축할 것을 명령했다. 그녀는 언덕 위에 서서 멀찍이 보이는 악마와 악귀들을 발견했다.

“······숫자가 많군.”

언덕 아래에 있는 너른 들 위에 수많은 악마와 악귀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악마와 악귀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 같으니 그곳이야말로 지상에 현현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스메렐다가 신경 쓰는 것은 저들이 아니었다. 그 뒤쪽에 있는 커다란 성. 성벽이 날카롭게 솟아있고 그 두께는 쉬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껍다. 본래라면 저 거대한 성벽 위에 활과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이 올라가 있었을 것이고 감히 겁도 없이 접근한 불온한 자들을 모두 죽이는 역할로써 기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두꺼운 성벽 곳곳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날카롭게 솟은 첨탑도 부러져서 희끄무레한 연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또한 성벽 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은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아니라 온갖 추악한 짓거리를 일삼는 악마들이었다.

비참한 꼴이 되어버린 저 도시의 이름은 테오도스였다. 왕국 동부의 대교구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악마들에게 농락당하는 오욕의 도시가 되었다.

여명교단이 이곳을 집결지로 삼은 이유는 바로 저 도시 때문이었다. 악마들이 대교구를 함락시키고 테오도스를 점령했으며 저곳을 중심으로 사악한 것들을 집결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든 전투가 되겠군요······.”

에스메렐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저 많은 숫자의 적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힘겨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테오도스의 가장 안쪽에 있는 어떠한 존재 때문이었다.

테오도스가 무너지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도망친 일부 성기사들은 악마들을 지휘하는 자가 있다고 했다. 감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다루며 성벽을 마치 과자 부수듯 박살냈다고 했다. 놀랍게도 그 존재는 악마처럼 흉측한 모습이 아니라 사람과 비슷한 형체를 가졌다고 했으나 몸과 얼굴을 망토와 모자로 가리고 있어 생김새를 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비다르는 그 자가 바로 어둠의 여왕일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정체는 몰랐다. 단지 마법사왕에게 어둠의 여왕이란 존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어둠의 여왕이라. 대체 누구지?’

대악마 다르디낭이 죽고 그 적자들은 저들끼리 세력 다툼을 했고 저급한 악마들은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고 행동했다. 사실 지금까지 이 세상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악마들을 한데 묶을 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약 대악마를 대신할 무언가를 진작 찾았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일찍 전란에 휩싸였을 것이다.

“척후병이 돌아왔군요.”

부관 칼립손의 말에 에스메렐다는 상념에서 깼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척후병의 보고를 받았다.

언덕 아래의 악마와 악귀들은 딱히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성벽 근처까지는 갈 수 없었다, 우리보다 저쪽의 숫자가 더 많은 듯하다, 기타 등등.

보고를 받은 에스메렐다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 자리를 사수하는 것이었다. 언덕 위에서 적들의 움직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싸움을 하더라도 지형적 이점이 있다.

후발 부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반드시 이곳을 지켜야 했다. 에우레킬슨과 그림발드는 여러 가지 의견을 냈고 어떤 것은 채택되고 어떤 것은 기각됐다. 칼립손도 간간이 의견을 냈으나 비다르와 라이오넬은 하품만 하며 시간을 축냈다.

그들은 백 년 전 영웅이지만 사실 뛰어난 지휘관이라기보다는 잘 싸우는 전사에 가까웠다. 사실 전략이나 전술 같은 건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강력한 힘은 어설픈 전략전술을 깨부술 만큼 압도적이니까.

“이상으로 회의 마치겠습니다.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주세요.”

아무 임무도 받지 않은 라이오넬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또 한 번 하품을 했다. 비다르는 또 술을 마시며 진지를 구축하는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무거운 것을 들고 낑낑거리는 병사가 있으면 불쑥 가서 한 손으로 들어서 옮겼다. 병사가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어있어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소년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비다르는 혀를 차며 말했다.

“뭔 이런 애들까지 데리고 왔냐······.”

그만큼 이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이겠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와서 싸워야 할 만큼. 비다르는 기분이 나빠져서 연신 혀를 찼다. 백 년 전에도 그랬다. 이런 꼬마들은 제일 열심히 싸우고 제일 먼저 죽었다.

짜증나네. 비다르는 후 하는 한숨과 함께 소년 병사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너 이거 들고 있어.”

그때부터 비다르는 본격적으로 병사들을 돕기 시작했다. 참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느끼면서도 짐을 나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게 아무 의미도 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괴력을 가진 비다르가 참여한 덕에 진지를 짓는 것은 한층 더 빨라졌다. 병사들은 환호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비다르는 아무 말 없이 소년 병사에게서 술병을 뺏어들었다. 소년 병사는 눈을 끔벅거리다가 슬그머니 웃음 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야.”

비다르는 후 하고 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뒈지지 마라. 집에 돌아가야지.”

“네, 알겠습니다!”

소년 병사는 힘차게 대답했지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비다르는 뛰어가는 소년 병사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느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병사들은 후방에서 복무한다는 사실이다.

“으휴, 기분 잡치게.”

비다르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진지 구축이 끝나고 더 많은 척후병들이 정보 수집을 위해 떠났다.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토대로 지휘부는 작전을 세우고 또한 수정했다. 하지만 비다르는 그냥 앉아서 술만 마셨다. 할 게 없으니까. 한참 동안 마시다보니 어느 순간에 정신이 끊어졌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소란스러워서 다시 일어났을 때.

“야습이다! 야습이야!”

“당황하지 마라!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저쪽이다! 저쪽에서도 적이 나타났다!”

비다르는 아직 남은 취기 때문에 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뭐야?”

머리를 휙휙 흔들어서 술기운을 털어내고 주변을 보았다. 대낮처럼 환하다고 생각했는데 횃불이었다. 비다르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성기사 하나를 붙잡았다.

빠르게 달려가던 그는 비다르가 갑자기 붙잡는 바람에 홱 넘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아니, 씹 뭐야? 넘어질 뻔 했잖······. 어? 비다르님!”

“너 얼굴 기억했어. 나한테 욕한 놈으로.”

“아, 아니, 그게.”

“됐고 무슨 일이냐?”

“야습입니다! 저 비겁한 놈들이 어둠을 틈타 기습을 했습니다!”

전쟁에 비겁한 게 어디 있어? 비다르가 말했다.

“그럼 나를 제일 먼저 찾았어야 할 거 아냐.”

“아, 설마 여기서 술 먹고 뻗어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몰랐기에······.”

“뭐 인마?”

“아닙니다!”

비다르는 성기사의 머리를 한 대 때리려다가 참았다. 그는 고갯짓을 까닥하며 말했다.

“가자.”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라이오넬은 어디 있냐?”

“아마 먼저 가셨을 겁니다. 막사에서 주무시고 있으셔서 찾기 쉬웠거든요.”

두 사람은 얼른 뛰었다. 성기사도 제법 빨랐지만 비다르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서 점점 뒤쳐졌다. 혼자서 먼저 싸움이 벌어진 곳에 도착한 비다르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적들의 숫자가 제법 많았다. 성기사들이 나와서 응전하고 있지만 늦은 밤이었고 잠을 자던 성기사들이 많아서 전부 나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 했다.

비다르는 숨을 한껏 삼켰다가 내뱉으며 외쳤다.

“강철 주먹 나가신다!”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성기사를 공격하던 악마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박살냈다. 악마들은 물론이고 성기사들까지 비다르를 쳐다볼 만큼 강렬한 등장이었다.

그리고 그 외침에 반응하듯 누군가가 번개처럼 나타나 또 다른 악마를 반쪽 내버렸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두 명의 영웅이 한 자리에 모였고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비다르와 라이오넬은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마치 미리 합을 맞춘 것처럼 동시에 튀어나갔다. 그리고 적들의 머리를 박살내고 몸을 반으로 자르며 성난 짐승처럼 날뛰었다.

성기사들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두 사람의 참전에 기운을 되찾았다. 그리고 성기사들과 함께 뛰쳐나온 에스메렐다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외쳤다.

“사악한 것들을 무찔러라! 오늘 우리는 영광스러운 첫 번째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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