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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앤드루?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비다르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검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던 에스메렐다가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앤드루 경이 왔습니다! 원군이 왔어요! 다들 힘을 냅시다!”
그녀의 외침에 모두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비다르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상당한 숫자의 성기사들이 말을 타고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지를 살짝 우회하여 곧장 전장으로 달려왔다.
비다르는 악마 하나의 머리를 더 부순 후에 에스메렐다를 붙잡고 물었다.
“저기 저 정신 나간 놈, 엔디미온이 성기사 시켜주라고 너한테 보냈던 거 아니야?”
기억 속에서 찾아낸 앤드루는 성검을 들고서 성배기사 흉내를 냈던 남자였다. 엔디미온에게 성검을 빼앗겼으나 순수한 용기와 정의감을 기특하게 여겨 성기사가 될 수 있게 에스메렐다에게 보내졌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에스메렐다의 기사수도회가 아니라 다른 기사수도회와 함께 나타난단 말인가? 설마 너무 괴짜라서 감당하기 힘든 탓에 다른 곳에 보내버린 것인가?
“맞습니다. 본래 성기사가 되려면 종자 생활부터 해야 하기에 저희 기사수도회에서 종자로 지냈었는데 알고 보니 무재가 상당하더군요. 그래서 저희 기사수도회에서 곧장 이등기사로 성기사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비아네 경이 자기 쪽 기사수도회에 맡겨 달라고 하더군요. 자신도 성배기사와 인연이 있다면서.”
“비아네? 그럼 지금 온 놈들이?”
에스메렐다가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비아네 경이 이끄는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입니다.”
등 뒤쪽에서 히이잉 하고 거칠게 말이 울었다. 비다르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곁을 수많은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새롭게 전장에 투입된 성기사들은 다른 자들과 똑같이 특등기사였지만 실력은 똑같지 않았다.
교황의 여섯 기사 중 하나인 비아네가 이끄는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성기사들은 특등기사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특등기사라 불리는 것은 단지 그 위의 등급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가 왔다! 사악한 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부상자들은 뒤쪽으로! 우리가 대신 싸우겠다!”
“앤드루! 혼자서 달려나가지 말고 대형 유지해! 앤드루!”
적들의 숫자 때문에 조금씩 밀리던 전장의 분위기가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참전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들은 특등기사 이상의 실력을 뽐내면서 악마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 돋보이는 것은 앤드루의 활약이었다. 그는 본래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시골 무지렁이였고 검술에 재능도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지금은 강력한 성기사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성배기사에게 성검을 돌려줄 때 성검이 은밀하게 선물한 신성력 덕분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성배기사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성검을 들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강력한 성기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워낙 성격이 괴짜라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하하하, 앤드루 경이 오늘도 날뛰고 있군요. 기운이 없는 것보다는 활발한 게 낫죠. 반갑습니다, 에스메렐다 경.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요?”
말을 타고 다가온 것은 비아네였다. 그가 웃으며 말을 건네자 에스메렐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오, 딱 맞게 도착하셨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비다르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지난번 잉굴라트와의 싸움 이후로 처음이지요?”
비아네가 알은체를 하자 비다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화는 일단 싸움 끝나고 나서 하지 그러냐?”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금방 끝내고 마저 대화하도록 합시다. 이럇!”
비아네가 말을 몰고 달려나갔다. 잘 훈련된 군마는 거대한 덩치의 악마를 보고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등 위에 타고 있는 남자가 악마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아네의 검술은 기본에 충실했다. 하지만 가장 정석적인 공격도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노력으로 연마하며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빠르게 휘두른 검은 악마의 허리를 끊었고 아래로 떨어지는 머리를 일격에 베었다. 그 다음에 곧장 말의 머리를 돌려서 다음 적을 향해 달렸다. 그는 엄청난 기세로 악마를 하나씩 죽여나갔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비다르님.”
“그래, 살아서 보자.”
에스메렐다가 뛰쳐나갔고 비다르도 허공에 손을 몇 번 털고서 다시 전투 자세를 잡았다.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우레가 치고 악마들이 죽었다. 라이오넬은 가장 선두에 서서 악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성기사 앤드루 나가신다아아아아아!”
시끄럽게 외치면서 앤드루가 말 위에서 악마의 정강이를 베었다. 그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경험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악마 하나를 가지고 제법 오래 싸웠다. 그래도 결국에는 쓰러트렸다.
좀 싸우네. 비다르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성기사의 뒤를 공격하려는 악마를 몸으로 밀어내 넘어트렸다. 그리고 버둥거리며 다시 일어나려는 악마의 몸을 자신의 두꺼운 다리로 꾹 누른 후에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리를 노리고 직선으로 곧장 날렸지만 단단한 것을 때려부수는 감각이 없었다. 비다르의 주먹은 악마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악마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막아?”
비다르는 왼쪽 주먹을 날렸다. 악마는 이번에도 주먹을 붙잡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실수였다. 왼손으로 날린 공격이니 더 약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강력했다. 비다르의 주먹은 악마의 손을 관통해서 그대로 쇄골을 박살냈다.
“막아 봐. 또 막아 봐. 이것도 막아보라고.”
쾅! 쾅! 쾅! 주먹이 한 번 직격할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본래 깔끔하게 일격에 죽었어야 할 악마는 괜히 주먹을 막은 잘못으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얻어맞았다.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숨이 끊어진 악마는 죽어서도 몸을 움찔거렸다.
“별 것도 아닌 게 까불어.”
비다르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음 적을 찾아서 고개를 돌리다가 악마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비다르와 라이오넬, 그리고 새로 참전한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존재 때문에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새끼들, 꽁지 빠져라 도망치네.”
비다르는 킬킬대며 웃었다. 성기사들은 승리에 환호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이번 싸움으로 성기사들 역시 제법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방에 있었던 병사들도 일부가 목숨을 잃었다.
에스메렐다는 빠르게 진지를 보강하고 사상자들을 수습할 것을 명령했다. 에우레킬슨과 그림발드가 성기사들과 함께 바쁘게 뛰어다녔다.
종군사제들은 부상자들에게 신성력을 나누어 주었다. 일부 성기사들은 언덕 아래로 악마들의 시체를 밀어냈다.
척후병들은 바쁘게 언덕 아래를 뛰어다니며 적들의 동태를 확인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가 되자 에스메렐다는 막사로 비아네를 초대했다.
막사 안에는 비다르와 라이오넬도 있었다. 비아네는 그들을 보고서 반갑게 인사했다.
“선봉대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에스메렐다와 바이네는 엔디미온이 성배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기에 서로 은근한 유대감이 있었다. 때문에 비아네가 다른 기사수도회를 제치고 제일 먼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며칠 내로 다른 기사수도회도 도착할 겁니다. 각 기사수도회는 각자의 구역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 이곳으로 모이는 중입니다. 일단은 제가 제일 먼저 왔지만 내일 중으로 아마 아델 경과 틸라 경이 도착할 겁니다.”
아델과 틸라는 비아네와 마찬가지로 교황의 여섯 기사 중 하나였다. 그들이 도착한다면 내일 또 습격이 있더라도 버틸 수 있었다.
비아네는 말을 이었다.
“저와 아델 경, 그리고 틸라 경을 제외한 성하의 기사들도 이곳에 올 겁니다. 그리고 율리아 경과 앨런 경이 각각 보급부대를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아마 서부의 기사수도회들과 함께 도착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남부의 악마사냥꾼들도 곧 합류할 거고요.”
“감사한 소식이군요. 솔직히 이제 겨우 두 번의 공격을 받았을 뿐인데 저희끼리 버티기에는 제법 벅찼습니다.”
“이해합니다. 적들의 세력이 워낙 강성하니까요.”
에스메렐다와 비아네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비다르가 불쑥 끼어들었다.
“북부는 어떠냐? 요정들 말이야.”
“아, 그쪽도 곧 올 겁니다. 북부 요정들을 중심으로 한 의용군의 기세가 대단하다더군요. 그런데 의용군에 엄청난 실력을 가진 기사와 마법사가 있다고 하던데요. 기사는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마법사는 누구입니까? 그때 같이 다니던 요정 아가씨는 아닐 거고.”
비아네가 기억하기에 베로니카의 마법 실력은 라우렌시오의 발끝에 겨우 미치는 수준이었다. 비다르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확인해 봐.”
그 뒤로 막사 안의 네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식사를 했고 각자 휴식을 취했다. 다행히도 오늘 밤은 야습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 사악한 것들이 또 한 번 공격을 감행했다. 어제보다 더 많은 숫자였지만 교황의 여섯 기사라 불리는 아델과 틸라가 합류하여 성공적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그 다음 날에도 공격은 이어졌다. 하지만 악마들의 공격이 올 때마다 또 다른 기사수도회가 새롭게 합류했다. 공방전은 며칠 동안 반복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기사들의 숫자는 늘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성기사들이 언덕 위로 집결하는 것처럼 각지의 악마와 악귀들도 테오도스 성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다.
적대적인 두 세력은 끝없이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싸우면서 서로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갉아먹으려고 애썼다. 에스메렐다의 선봉대가 집결지에 처음 진지를 세운 날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남부의 악마사냥꾼들이 집결지에 합류했다. 저쪽에서는 대악마의 적자 하나가 군세를 이끌고 참전했다.
그 뒤로도 합류와 싸움은 반복됐다. 두 세력의 크기는 비등하였지만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았다. 양쪽 다 아직 힘을 모으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일주일 정도 된 날이었다. 교황의 여섯 기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저쪽에서는 이름 난 악마들이 각자의 군세를 이끌고 나타났고 또 대악마의 적자가 참전했다.
성기사들의 합류 속도보다 악마들의 합류 속도가 더 빨랐다. 이쪽은 아직 서부와 북부의 성기사들이 모이지 않았는데 저쪽은 벌써 배 이상의 세력을 모았다.
곧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들으며 에스메렐다는 입술을 짓씹었다.
“악마들이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지만 만약 어둠의 여왕이 직접 나선다면······.”
어둠의 여왕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배기사뿐이다. 만약 성배기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