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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90화 (19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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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에스메렐다는 지휘관들을 전부 막사로 불렀다. 모두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역시 척후병들이 보내온 보고를 이미 들은 상태였다.

적들의 숫자가 이쪽의 배가 넘으니 불리한 싸움이 되리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성기사 아델은 이곳을 버리고 뒤쪽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서부와 북부의 성기사들이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성기사 틸라가 반대했다. 지금 우리들이 여기서 후퇴하면 뒤쪽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이 악마들에게 해를 입는다는 주장이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지휘관들끼리 의견이 갈렸다. 개중에는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서부와 북부의 성기사들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고 악마들의 숫자는 점차 늘어나고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승부를 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물론 너무 무리한 도박이었기 때문에 그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지휘관들의 의견은 후퇴 또는 항전으로 좁혀졌다.

“후퇴를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적들 역시 성 위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뻔히 보고 있는데 후퇴를 시도한다면 당연히 뒤를 쫓아오지 않겠습니까? 악마들은 애초에 공성전을 할 생각이 없으니 우리의 후퇴를 기회로 볼 것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결사의 의지로 항전하는 것보다 도망치며 싸우는 것이 더 힘든 법입니다.”

그것은 교황의 여섯 기사 중 하나인 성기사 데우스의 의견이었다. 그의 말대로 악마들은 공성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 증거로 무너진 성벽을 그냥 두었고 성문을 새로 수리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테오도스 성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둠의 여왕이 그곳을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이 싸움은 악마와 성기사 중에서 어느 하나가 멸절해야지만 끝이 난다. 성기사들이 후퇴하면 악마들이 그것을 그냥 두고만 보고 있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데우스 경의 말대로 저들의 공성전을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후퇴해야 하는 것이오. 이것 사람들끼리의 전쟁이 아니오. 적이 물러갔다고 해서 싸움이 흐지부지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칼은 뽑았으면 휘둘러야 하는 법이오. 저 더러운 악마 놈들이라고 그걸 모르겠소? 뭉그적거리면 적들이 먼저 움직일 것이니 그때 싸워봤자 개죽음일 것이오. 결정은 신속하고 단호해야 하오, 에스메렐다 추기경.”

아델은 에스메렐다를 쳐다보았다. 추기경은 교황 다음 가는 자리고 이곳에서 추기경은 에스메렐다 혼자뿐이었으니 당연히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겼다. 어느 쪽도 맞는 말이라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개죽음이라니! 겁쟁이 같은 소리를 하는군! 기사로서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이 어찌 개죽음이냐! 인생은 별을 쫓는 아이처럼 살아야 하는 법이다! 불가능에 도전하고 끝없이 패배하며 수없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 패배한 승리자가 아니라 승리한 패배자가 돼야 한다고!”

벌떡 일어나 외친 것은 앤드루였다. 그는 광인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서 아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그 모습을 보고서 아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저 천둥벌거숭이가 또······.”

앤드루의 괴짜 같은 성미는 이미 성기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아델은 굳이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에 비아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과했다. 그는 부하를 시켜서 발작하듯 화를 내는 앤드루를 쫓아낼 것을 명령했다.

끌려 나가면서도 앤드루는 꽥꽥 소리를 쳤다.

“성배기사는 실존한다! 성배기사가 돌아올 것이다!”

비아네는 다른 성기사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앤드루 경이 좀 욱하는 성격이 있어서. 아델 경,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소. 부하의 잘못은 상사의 허물이라고 하지만 저런 미치광이를 어떤 상사가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소. 비아네 경을 탓하지는 않겠소.”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회의는 다시 시작됐다. 막사 안에는 비다르와 라이오넬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 발언도 하지 않고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머리 쓰는 것은 영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낼 수 있는 의견이라고 해봤자 일단 싸우고 보자 외에는 없었다.

한참 회의가 이어지다가 잠깐 휴식 시간을 가졌다. 다들 열성적으로 떠드느라 말라붙은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막사 안으로 병사 하나가 뛰어왔다. 아무리 휴식 시간이라 해도 병사가 멋대로 막사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이 병사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모두가 얼굴을 굳혔고 병사는 다급하게 소식을 전했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회의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적들이 움직였다면 후퇴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다른 성기사들은 탄식 비슷한 소리를 냈다. 후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은 당연히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고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도 지금 당장 싸움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얼굴색이 어두워지며 막사 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바로 그때 비다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뭘 다들 죽상을 하고 있냐. 하여튼 요즘 성기사들은 기개가 없다니까, 기개가. 너희 역할이 뭐야? 악마들이랑 싸우는 거잖아? 그럼 해야 할 일을 해.”

비다르의 말투는 경박했지만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듣고서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에스메렐다였다. 그 다음은 에우레킬슨과 그림발드였고 뒤를 이어서 비아네가 일어났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다들 갑시다. 우리의 일을 합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요.”

에스메렐다가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막사를 나갔다. 비다르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해? 가자고, 친구들.”

성기사들은 결심을 굳혔다. 이것은 도망칠 수 없는 의무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다행히도 대열을 가다듬을 정도의 시간은 있었다. 성기사들은 언덕 위에 서서 너른 들 위를 가득 채운 악마와 악귀들을 보았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차분함을 느꼈다. 백 년도 넘게 이어졌던 싸움이 오늘 이곳에서 끝이 나는 것이다.

“악마사냥꾼들은 우측으로! 마법사들은 성기사들 뒤로!”

이 전투에 참전한 것은 성기사들만이 아니었다. 남부의 악마사냥꾼들도 있었고 은빛여명회를 주축으로 한 마법사들도 있었다. 세 집단은 서로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육신은 나약하다. 오직 강철과 마법만이 영원할 뿐이다!”

전투의 시작을 알린 것은 언덕 위를 달려오는 악귀들을 향해 날아가는 마법이었다. 마법사 부대를 지휘하는 사르하가 투구 안에서 눈을 빛냈다. 수백 명의 마법사들이 한꺼번에 날리는 마법은 천벌과 같았다. 공기가 뜨거워지고 바닥이 갈라지며 살과 뼈가 갈기갈기 조각났다.

단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엄청난 숫자의 악귀들이 죽었다. 하지만 죽은 악귀들보다 아직 달려오는 악귀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같은 악귀의 시체를 밟고서 미친 듯이 언덕 위를 향해 달렸다.

“충격 대비! 충격 대비! 자리를 지켜라!”

악귀들은 성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굳건한 성벽처럼 단단히 버티고 선 성기사들은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성기사들은 악마사냥꾼들과 힘을 합쳐 악귀들을 죽였다.

“악마들이 온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악귀들이 아무리 덤벼도 성기사라는 성벽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이제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악마들이 나섰다. 그들은 거대한 덩치와 괴력을 이용해 무기를 휘두르거나 뒤쪽에서 사술을 부렸다.

성기사들이 악마들의 공격을 받아내면 악마사냥꾼들이 뛰쳐나가 적들을 사냥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술들은 마법사들의 마법으로 요격했다. 또한 종군사제들은 부상자들이 생기면 곧바로 치유하여 전선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전황은 어느 한쪽이 유리하거나 불리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기사들은 악마들의 거센 공세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저 방어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아네를 위시한 교황의 여섯 기사들은 종횡무진으로 날뛰면서 악마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성기사들의 정점이었고 이 시대에서 가장 강한 여섯 명이었다. 자신들이 어째서 교황의 여섯 기사라고 불리는지 그 실력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싸움을 지켜보던 비다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아네야 이미 실력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다섯도 엄청난 실력자였다. 백 년 전의 성기사들에 비해서도 전혀 꿇릴 게 없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음, 어서 가세나!”

비다르와 라이오넬은 여섯 기사 이상의 실력을 뽐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오직 시체만이 남았고 악마들은 감히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을 막으려면 저급한 악마 따위로는 어림도 없었다.

여섯 기사와 두 영웅이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고 그 숨통을 무참히 끊으니 성기사들은 기세가 올랐다. 그들은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악마들에 맞서 싸웠다. 악마사냥꾼들이 날랜 몸을 이용해 악마들을 농락하고 마법사들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들을 쓸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끝이 보이지 않을 듯 길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상대하던 에스메렐다는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상자들은 뒤쪽으로! 빨리!”

“오른쪽이 뚫린다! 막아!”

“막아! 죽을 각오로 막아라!”

성기사들은 강하다. 악마사냥꾼들도 마찬가지다. 마법사들의 강력한 화력은 악마들을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리했다. 성기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졌고 부상을 입은 악마사냥꾼들이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악마들이 부리는 사술에 막혔다.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에스메렐다는 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고 체력을 많이 소모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깜깜해졌던 것은 단지 너무 지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리라는 결과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성배기사의 적생자이며······.”

그럼에도 에스메렐다는 도망치지 않았다.

“전능자의 칼날이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싸워라!”

억지로 힘을 짜내서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귀를 찢을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에스메렐다의 시야가 흰색으로 물들었다. 귀가 멍멍했고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이 사라지고 굉음도 멎었을 때 슬며시 눈을 뜬 에스메렐다는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을 목도했다.

수많은 악마들이 한 줌의 재로 변해 있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일곱 요정 가문의 주인이자 북부의 대영주이며 참된 영광의 주인인 마르티에스 가문의 적녀가 이곳에 왔다! 북부 요정들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아라!”

갑자기 전장에 난입한 것은 요정들과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이 북부 의용군이란 것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큰 소리로 외친 것은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 요정이었는데 그 곁에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여자 요정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사가 지껄이는 소리가 영 부끄러웠던 탓이다.

“북부의 군대가 왔다! 원군이 왔어! 이길 수 있다!”

성기사들이 환호했고 악마들은 주춤했다.

에스메렐다는 얼른 고개를 돌려서 한 사람을 찾았다. 요정이고 보라색 눈을 가진 마법사.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카였다.

“으아아아악! 큰일 날 뻔했다! 마법이 빗나갈 뻔 했어요!”

베로니카는 말 위에서 허둥댔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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