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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칼리와 비다르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켰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마치 경기장 위에 올라간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 따위는 없었다. 그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서로를 향한 거리를 재다가 아무 전조도 없이 내달렸을 뿐이다.
먼저 주먹을 뻗은 것은 비다르였다. 강철 주먹은 묵직하게 카르칼리의 안면에 꽂혔고 그 충격으로 얼굴에 달린 몇 개의 눈이 터졌다. 하지만 카르칼리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곧장 반격했다.
빠르게 날아온 주먹이 비다르의 복부를 가격했다. 내장이 흔들거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비다르는 입 안에서 가득 느껴지는 신맛을 무시하며 왼쪽 주먹을 날렸다. 또 한 번 깔끔한 적중. 그가 주먹을 날릴 때마다 카르칼리의 눈알들이 무참히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들은 빠르게 재생했다. 아무리 몸 곳곳을 타격하며 눈알들을 터트려도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비다르는 미간을 좁혔다. 카르칼리의 몸을 아무리 때려도 때린 것 같지가 않았다. 매끈하게 검은색 광택이 나는 몸은 몹시 탄성이 있어서 힘껏 후려갈겨도 제대로 된 타격감이 없었다.
그에 비해 비다르의 몸에는 제대로 타격이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다르와 카르칼리가 서로 비등하게 싸우는 듯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카르칼리와 달리 비다르는 몸에 충격이 누적되고 있었다. 오래 끌 싸움은 아니었다. 비다르는 주먹을 더욱 세게 쥐었고 있는 힘껏 날렸다. 빨리 끝내는 것이 상책이다.
“움직임이 크군.”
덤덤한 목소리. 비다르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그 틈을 노려 카르칼리의 주먹이 또 한 번 복부에 꽂혔다. 비다르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신물을 억지로 삼키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또 다시 공기를 가르며 주먹이 날아왔다. 이번에 노리는 것은 턱. 비다르는 손을 뻗어 공중에서 주먹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홱 당기며 그대로 바닥에 메쳤다. 쾅 소리가 나며 먼지구름이 일었지만 카르칼리는 멀쩡했다.
그는 유연한 몸을 이용해서 다시 한 번 비다르에게 달려들었다. 주먹이 서로의 몸에 꽂혔다.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주먹을 날리고 또 때리는 소리만 났다. 주먹이 비다르의 몸을 때릴 때마다 근육들이 발간색으로 달아올랐고 카르칼리의 몸을 때릴 때는 수많은 눈알들이 터졌다가 다시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비다르와 카르칼리는 방어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싸웠다. 무자비한 난타전이었다. 한데 엉켜서 싸우는 맹수처럼 서로의 목숨만을 탐하던 투사들은 거의 동시에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좀 치네?”
비다르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피가 섞인 침을 뱉어냈다. 그의 몸은 땀범벅이었다. 그에 비해 카르칼리는 호흡 한 번 헐떡이지 않았고 처음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저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비다르가 혀를 차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카르칼리는 오히려 들고 있던 주먹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비다르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실망이군. 강철 주먹의 비다르라고 해서 얼마나 강한지 기대했더니만.”
“뭐?”
비다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주먹질뿐이군. 하긴 그래서 강철 주먹인가. 어쨌든 흥이 식었다. 딱 잘라 말해서 너는 날 즐겁게 해줄 수 없다. 시간이 아까우니 얼른 처리해주마.”
카르칼리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비다르는 설마 도망치는 건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카르칼리는 발을 들었다가 쿵 소리가 나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 순간 비다르는 다리를 꼼짝할 수 없었다.
“뭐야?”
고개를 내리는 순간 자신의 발이 검은색 손들에 의해 붙잡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자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손들이 다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무슨 같잖은 수를······.”
비다르는 힘으로 끊어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카르칼리가 조종하고 있다고 해도 그림자는 비다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림자를 떼어낼 수 없다면 속박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야, 이거 뭐야! 뭐냐고! 싸우다가 안 되니까 수작을 부리는 거냐!”
카르칼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주먹을 쥐고서 천천히 비다르에게 다가왔다. 그의 어깨가 크게 열리면서 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마치 번데기를 벗어나려는 나비처럼 꿈틀거리던 그것은 촤악 소리를 내며 우화했다. 등을 뚫고 나온 것은 손이었다. 그림자처럼 새까만 여섯 개의 손.
비다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그에게 닥칠 미래가 어떤 것일지 상상이 됐기 때문이다. 카르칼리가 주먹을 쥐었고 이제 도합 여덟 개의 주먹이 비다르의 몸에 꽂혔다. 마치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숨 쉴 틈도 주지 않고서 비다르를 때렸다.
비다르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명을 참는 것뿐이었다. 그는 두 팔을 올려서 머리를 보호하고 몸을 움츠려 배를 보호했다. 하지만 카르칼리의 주먹은 집요하게 빈틈을 노려 타격했다. 쉬지 않고 얻어맞으면서 비다르는 얼굴을 가린 팔 사이로 카르칼리를 쳐다보았다.
있는 것은 눈뿐이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아마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재미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하품이라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비다르는 킬킬대며 웃었다. 얼굴을 가린 두 팔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없이 주먹을 날리던 카르칼리의 몸에 달린 눈들이 반쯤 감겼다. 그것은 의문이고 또한 불쾌함이었다. 이 녀석은 왜 웃지? 정신이 나가버린 것인가?
카르칼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주먹을 날리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가 자신의 그림자 주먹을 하나로 합쳤다. 비다르의 맷집이 엄청나서 이런 타격으로는 싸움을 끝낼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튀어나온 여섯 개의 주먹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하게 변했다. 여기에 사악한 기운과 괴력을 담아 힘껏 날린다면 비다르는 분명 죽을 것이다. 목이 부러질 것이고, 갈비뼈가 부러질 것이고, 상반신이 단단하게 고정된 하반신만을 남기고 분리될 것이다.
하찮은 적의 마지막으로는 딱 알맞았다. 주먹은 망설이지 않고 질주했고 비다르의 몸을 날려버리기 직전이었다.
비다르가 움직였다. 웅크리고 있던 뱀이 몸을 날리는 것처럼 왼쪽 팔을 내리고, 오른쪽 팔을 들고, 허리를 틀고, 어깨를 뒤로 뺐다.
“너 바보냐? 내 다리를 봉쇄했다고 이겼다고 생각한 거야? 멍청한 놈아. 이건 오히려 날 도와주는 거란 말이다.”
쾅 소리가 나며 지면이 함몰됐다. 비다르의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이 무너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다리는 단단하게 땅에 붙어있었다. 그림자를 사라지게 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강력한 힘은 분명한 반작용을 동반한다. 그가 힘을 모으면 두 발로 딛고 있는 바닥은 박살난다. 그러면 충분한 만큼의 힘을 낼 수가 없게 된다. 바닥이 불안정하니까 주먹을 똑바로 날릴 수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림자에 의해 두 다리가 땅에 붙잡혀 있으니 어떤 경우에도 떨어질 일이 없었다.
그것은 곧 비다르가 본연의 힘을 모두 낼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뒈져라, 이 빌어먹을 놈아!”
주먹과 주먹이 충돌했다. 카르칼리의 주먹은 비다르의 것과 부딪치는 순간 손가락이 모두 뒤틀렸다. 그리고 충격은 그대로 손목까지 이어져서 자루가 터지듯 찢겼다. 비다르의 주먹은 그 후에도 기세를 잃지 않고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카르칼리의 얼굴. 그것은 글자 그대로 박살났다. 아무리 충격을 흘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비다르가 날린 주먹은 카르칼리의 능력을 한참 넘어섰다. 얼굴은 괴상한 모습으로 크게 늘어났다가 터졌다. 어찌나 강력한 일격이었는지 카르칼리의 얼굴이 터지고 나서 그 충격으로 생겨난 풍압이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별 것도 아닌 게 까불어.”
비다르는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싸운 탓, 그리고 카르칼리에게 너무 얻어맞은 탓에 체력이 상당히 소진됐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다잡았다. 카르칼리가 죽음으로써 그림자의 손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또 싸워야 하는데······.”
고개를 돌려 라우렌시오와 코르도나 쪽을 보았다. 도와줘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비다르는 비틀거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그가 약해진 틈을 노려 악마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귀찮은 놈들. 주먹을 들고 그들과 싸우려다가 문득 테오도스 성 쪽을 보았다.
반짝임. 처음에는 그냥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점만 했다가 점점 그 크기를 키우며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목덜미가 오싹했다. 사술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강력한. 과연 내가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막아낼 수 있을까? 비다르는 멍하니 날아오는 보라색 광선을 보았다. 이미 늦었다.
그것은 적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이 모두 한 줌의 재로 만들었다. 비다르는 몸 안의 신성력을 운용했다. 되든 안 되든 부딪쳐야 했다. 자신의 등 뒤에는 수많은 성기사들이 있다. 그들이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사악한 기운에 몸이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비다르는 굳게 버티고 섰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몸 안의 신성력을 모두 짜내서 자신의 몸에 둘렀다. 그는 죽을 각오로 사술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시야 안으로 뛰어드는 자가 있었다.
“나는!”
우레가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면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섬광이 번쩍이고 엄청난 굉음이 발생했다. 빛과 빛이 부딪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요란한 발광이었고 무시무시한 분노였다.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마치 벼락 같았다. 아니, 벼락이었다. 라이오넬의 검이 번쩍였고 날아오는 보라색 광선을 잘라냈다. 단지 반으로 가른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기세는 사술을 흩어버렸다.
비다르는 자신을 등지고 선 라이오넬을 쳐다보았다. 오래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검술의 극에 달하면 세상에 벨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나는 언젠가 벼락을 벨 것이라고.
그 말이 맞았다. 라이오넬은 천둥검이었고 벼락을 베었다. 어쩌면 그간의 노력은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비다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이 새끼······.”
“비다르.”
라이오넬은 등을 돌리지 않고서 말했다.
“싸우게. 힘껏 싸우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믿게.”
목소리는 단호했다.
“성배기사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그 말을 끝으로 모든 기력을 소진한 라이오넬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