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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93화 (19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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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라이오넬! 라이오넬!”

비다르는 쓰러진 라이오넬을 향해 뛰어갔다. 숨을 확인해보니 단지 기절한 것뿐이었다. 노쇠한 몸으로 무리한 싸움을 한 탓에 기력을 모두 소진한 것이다.

“에스메렐다! 에우레킬슨! 그림발드! 비아네! 씨발, 아무나 상관없으니까 좀 오라고!”

다급한 외침을 듣고서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그림발드였다. 말을 타고 달려온 그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라이오넬을 보고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멍청하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엄청난 공격이 날아왔고 그것을 반으로 가른 것이 라이오넬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림발드는 말에서 뛰어내려 기절한 라이오넬을 두 손으로 안아들었다. 그리고 안장 위에 올린 후에 자신도 말에 올라탔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책임지고 안전한 후방까지 이송하겠소!”

비다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발드는 바로 말의 머리를 돌려서 진지 쪽으로 달렸다. 그를 가로막는 적들이 있었으나 다른 성기사들이 달려와서 길을 뚫어주었다.

한참동안 그림발드의 뒷모습만 보던 비다르는 주먹을 꽉 쥐고서 테오도스 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잔챙이들만 상대하고 있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성 안에 틀어박힌 어둠의 여왕을 끝장내야만 이 싸움도 끝이 났다.

비다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엘라티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해골용들과 싸우고 있었고 라우렌시오 역시 아직 코르도나와 싸우는 중이었다. 베로니카는 은빛여명회와 함께 악마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다른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아네를 위시한 교황의 여섯 기사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비다르 혼자뿐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서 테오도스 성을 향해 성큼성큼 움직였다. 처음에는 걷고 있었으나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나중에는 거의 달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주먹을 꽉 쥐고서 시선은 테오도스 성을 향해 고정했다. 길을 가로막는 것에는 가차 없이 주먹을 날렸다.

그는 지금 이성보다는 본능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저 거대한 성을 박살내고 무너트려 이 길고 긴 싸움을 끝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성난 황소처럼 질주하며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쳐내던 비다르 때문에 전장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었다.

악마들은 혼자서 돌격하는 비다르의 뒤를 쫓아서 움직였고 성기사들은 갑자기 느슨해진 공세에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거칠게 움직이고 있던 에스메렐다 역시 전장의 흐름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돌적으로 테오도스 성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비다르를 발견하고서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비다르님!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자리를 지키세요!”

“어딜 가기는! 저 빌어먹을 성이야! 끝을 내야지! 끝을 내야 한다고!”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다 함께 진격해야 합니다!”

비다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달려드는 악마들을 물리치며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의 힘은 강력했지만 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격렬한 전투를 몇 번이나 했고 대악마의 적자인 카르칼리와 싸우기도 했다.

체력이 처음만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들의 공격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몸에 하나둘씩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비다르는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에스메렐다는 입술을 깨물며 일부 성기사들을 추려냈다.

비다르는 귀중한 전력이었고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추격대를 꾸려서 비다르를 도우러 가려는데 갑자기 공기가 진동했다. 웅웅 울리는 소리는 몹시 불길했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에스메렐다는 테오도스 성을 보았다. 아까 전에 날아왔던 것과 같은 공격이 다시 한 번 발사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다르님······!”

소리를 쳤지만 늦었다. 보라색 광선은 공기를 찢으며 직선으로 날아왔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스메렐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비다르의 뒷모습을 보았다. 광선이 비다르는 물론이고 악마들까지 집어삼켰다.

바닥이 갈라지고 조각났다가 가루로 변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다. 압도적인 힘은 소리조차 집어삼켰다.

에스메렐다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불어오는 바람과 흔들리는 땅 때문에 뒤로 홱 넘어졌다. 그녀는 힘겹게 다시 일어났고 먼지구름이 천천히 걷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쓰러진 비다르를 발견했다.

“비다르님! 비다르님!”

비다르는 바닥에서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주변으로 악마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에스메렐다는 성기사들과 함께 달려가려고 했지만 몸을 찌르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까 뒤로 넘어진 충격으로 갈비뼈가 쑤셨다. 그녀는 이 순간 절망을 느꼈다. 불리한 전황, 끝이 보이지 않는 악마들, 점점 지쳐가는 성기사들, 부상을 입은 라이오넬과 비다르.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성배기사가 올 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까? 의심은 한 번 고개를 내밀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힘차게 고개를 내밀며 그 크기를 키워갈 뿐이다.

에스메렐다는 멍하니 테오도스 성을 바라보았다. 이 싸움에 끝이 있는 걸까? 우리는 이길 수 있는 걸까? 믿음은 약해지고 희망은 흐려진다. 빛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온다. 마음은 무너질 듯 휘청거린다.

“······아.”

그럼에도 검을 버리지 않는다. 몸을 돌려서 도망치지 않는다. 약간 남은 믿음을 움켜쥐고 희망을 그러모은다. 꺼져가는 빛을 삼키고 어둠을 몰아낸다. 마음은 아무리 휘청거려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살아있다면 아직 싸울 수 있다. 에스메렐다가 검을 들고 달렸고 그 뒤를 수많은 성기사들이 따랐다. 무모한 돌격이고 무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싸우지 않고 죽는 것이다.

“······태양으로 벼려진 강철이니 빛이 없는 곳에서 빛을 위해 싸운다!”

함성, 괴성, 강철의 소리, 충돌. 길었던 전투는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악마의 종복들과 전능자의 추종자들. 둘 중 하나는 거꾸러질 것이고 세상은 변할 것이다.

“보아라.”

목소리는 나직했다. 소음이 가득한 전장 속에서 결코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었다.

“여기 죽음을 무릅쓴 용맹한 자들이 있으니.”

말발굽 소리가 났다. 군단의 소리였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고 서쪽에서 달려오는 거대한 군세를 발견했다. 그리고 선두에서 가장 반짝이는 자가 있음을 보았다.

기다림은 길었다.

“이것은 아직 이 세상의 정의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보아라, 사악한 것들아. 너희가 감히 누구를 대적했는지를!”

군세가 달렸다. 거침없이 땅을 때리는 말발굽은 대지를 찢을 듯 했고 힘차게 내뱉는 함성은 하늘을 뒤흔들 듯 했다.

싸움은 다시 한 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 더러운 놈들아! 너희의 적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아라! 그리고 내 이름을 들어라! 나는 전능자의 번뜩이는 칼이자 신성한 징벌자다! 말해라, 내가 누구냐!”

쏟아지는 군세는 마치 오물을 씻어내리는 물줄기와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군세의 공격에 악마들이 주춤거렸다.

새롭게 나타난 성기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용맹하게 싸웠다. 전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성기사들의 공세가 격렬했고 악마들은 주춤거리며 테오도스 성 쪽으로 물러났다.

한 발자국 물러나면 그 다음에는 두 발자국 물러나야 하는 법이다. 악마들은 이제 성기사들에게 쫓기듯 후퇴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어도 그들 역시 생물이었고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악마들은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성기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한 남자에게.

남자는 빛나는 검을 휘둘러 쉬지 않고 적들을 베었다. 그는 악마의 단단한 몸을 종이 자르듯 가볍게 잘랐고 그들의 두꺼운 뼈를 분쇄했다. 감히 남자에게 대적할 자는 없었다.

그의 등 뒤에는 후광이 번쩍이고 있었고 그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녹아내렸다. 강렬한 빛은 그 자체로 무기였고 신성한 징벌이었다.

테오도스 성에서 또 한 번 보라색 광선이 날아왔으나 남자는 말의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광선을 향해 달려들면서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그것은 마치 거인을 향해 돌격하는 기사의 기개였다.

보라색 광선이 남자의 몸을 집어삼키기 전에 커다란 빛의 칼날이 대지를 가르며 날아갔다. 빛과 어둠의 힘이 충돌하자 서로를 상쇄시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흩어졌던 보라색 광선은 수백 개의 뱀으로 변해서 다시 한 번 남자를 습격했다. 그 순간 빛이 번쩍였다. 충만한 신성력은 사악한 힘의 침범을 감히 허락하지 않았다. 남자의 목을 물려고 했던 뱀들은 화톳불 안에 뛰어든 것처럼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다가 사라졌다.

적의 사술을 간단히 물리친 남자는 숨을 크게 삼켰다가 내뱉으며 소리쳤다.

“이 개 같은 놈들아! 와서 봐라! 누가 돌아왔는지! 영웅이 돌아왔다! 나는 성배기사 엔디미온이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그 한 마디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성기사들은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무기를 쥐고 당당하게 한 걸음 내딛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단 한 마디. 애타게 기다렸던 마지막 희망. 악을 몰아내는 횃불이자 죄 없는 어린 양들을 지키는 목자.

돌아왔다, 성배기사가. 백 년의 시간을 넘어서.

“드디어 왔다······.”

사투 끝에 용왕 코르도나를 쓰러트린 라우렌시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엔디미온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크게 외쳤다.

“돌아왔다! 빌어먹을 성배기사가 드디어 돌아왔다! 우리가 이겼다! 빌어먹을! 우리가 이겼다고! 우리는 오늘 승리를 약속받았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성기사들은 함성과 함께 내달렸다. 도망가는 악마들을 쫓아서 그들의 등에 창칼을 꽂았다.

악마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성기사들만이 아니었다. 악마사냥꾼들, 마법사들, 북부 의용군까지,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이끄는 것은 단 한 명이었다.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단 한 명뿐인 위대한 자.

“우리는 오늘 승리할 것이다! 백 년 전에 맛봤던 달콤한 승리의 미주를 다시 한 번 맛보게 될 것이다! 나를 믿고 너 자신을 믿으며 전우와 함께 싸워라! 단결된 의지는 결코 지지 않는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은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우며 사악한 적들을 몰아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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