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95화 (195/199)

195

“나엘라티나! 나엘라티나!”

엔디미온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나엘라티나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한때 자신의 친구였던 자들을 때려눕히고 백 년 전의 과오를 씻어내린 용은 성배기사의 부름에 응답해 크게 울부짖었다.

달리는 성기사들의 머리 바로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그것은 용의 것이었고 선두에 서서 달리던 엔디미온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인 신호가 되어 나엘라티나가 지상을 향해 강하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용이 머리 위에서 가깝게 나는 모습은 아무리 성기사들이라 해도 움찔할 만한 일이었다. 용이 날갯짓하면서 생겨난 바람이 그들을 날려버릴 듯 거칠었으나 성배기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서커스를 하는 것처럼 달리는 말 위에서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엘라티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엔디미온의 손을 잡아챘다. 일견 사악한 용에게 납치를 당하는 기사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암벽을 오르듯 두 손의 힘을 이용해 차근차근 나엘라티나의 몸 위로 올라갔다. 밑에서 보는 성기사들은 아찔함을 느꼈지만 정작 당사자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얼마 걸리지 않아서 엔디미온이 등 위에 올라타자 나엘라티나는 다시 한 번 울부짖으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신성한 빛으로 감싸진 용기사 같았다.

나엘라티나는 입에서 불꽃을 뿜어내며 도망치는 악마들을 공격했다. 테오도스 성이 가까워지자 악마들도 더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몸을 돌려서 성기사들과 맞섰고 일부 악마들은 하늘로 날아올라 나엘라티나를 떨어트리려고 했다.

만약 나엘라티나 혼자였다면 악마들과 싸우다가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등 위에는 성배기사가 타고 있었고 그는 악마들이 용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휘두르는 성검은 엄청난 신성력을 뿜어내며 길게 늘어났다. 횃불에 부딪친 날벌레들처럼 악마들은 우수수 지상으로 떨어졌고 나엘라티나는 더욱 흥이 나서 힘차게 날개짓을 했다.

불꽃이 또 한 번 대지를 달궜다. 악마들이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고 성기사들이 그들을 완전히 끝장냈다.

“나엘라티나! 밑으로 내려가라! 지금 당장!”

나엘라티나는 엔디미온이 시키는 대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내려오는 것이 보이자 악마들이 또 다시 공격을 감행했으나 성검이 만들어낸 보호막에 모두 막혔다.

엔디미온은 나엘라티나가 지상에 착지하기 전에 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쿵 소리가 나며 먼지구름이 생겨났다가 다시 걷혔다. 엔디미온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후에 성문을 쳐다보았다.

악마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이미 부서졌던 성문을 다시 수리하지 않아서 뻥 뚫려 있었다. 엔디미온은 성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악마들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등 뒤에서 빛나는 후광과 신성한 빛으로 불타는 성검을 손에 든 엔디미온은 진정한 성배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악마 다섯이 성문을 막았으나 엔디미온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뛰었다. 첫 번째 악마를 향해 성검을 휘둘렀다. 악마는 사술을 부리는 재주가 있는지 사악한 기운을 모아서 보호막을 만들었다. 당연히 일격에 깨졌으나 그것은 다른 악마들에게 공격 기회를 주기 위한 술수였다. 나머지 네 악마가 동시에 엔디미온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손톱, 거대한 창과 칼, 묵직한 철퇴. 모두가 엔디미온을 노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처음에 사술을 부렸던 악마를 향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서 몸을 절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허리를 돌려 왼쪽에서 날아오는 창과 칼을 일시에 잘랐다.

검은 다시 위로 치솟으며 악마 하나를 세로로 길게 잘랐고 그 다음은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악마 둘을 동시에 죽였다.

남은 악마 하나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얼른 따라잡아 심장을 찔렀다. 악마 다섯을 죽이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빛의 화신은 뚜벅뚜벅 걸으며 성문을 향해 움직였다.

“엔디미온!”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라우렌시오가 있었다.

“이겨라! 꼭 이기라고!”

엔디미온은 대답하는 대신에 손만 흔들었다.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싸우고 있을 때 그는 혼자서 조용히 성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하군.”

“······기분 나쁜 침묵이오.”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바깥과 대조적으로 테오도스 성 안은 조용했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고개를 움직였다. 성문을 통과하면 곧장 보이는 대로는 본래 번성한 도시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 깨지고 부서져서 돌과 바위로 가득했다. 대로 주변에 늘어선 건물들은 반쯤 무너지거나 아니면 완전히 무너졌다. 악마들의 공격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멀쩡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오. 이만큼의 공격이 있었다면 길 위에도 시체들이 즐비해야 하는 것인데······.”

성검 에투알의 지적대로 길 위에는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만이 있을 뿐 시체는 없었다. 테오도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고 또한 성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었을 것이다.

악마들이 그들을 그냥 살려줬을 리는 없다. 성기사들과 병사들은 전토 중에 잔혹하게 찢어 죽였을 것이고 시민들은 싸움이 끝난 후에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죽였을 것이다.

엔디미온은 악마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길 위에 시체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더 가다 보면 알 수 있겠지.”

엔디미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발에 돌멩이가 채였다. 박살난 길은 울퉁불퉁해서 걷는 데 방해가 됐다. 엉망이 된 도시의 길 위를 혼자서 걷는 것은 대단히 으스스한 일이었다.

망가진 도시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혼자뿐이라는 기분은 결코 자주 경험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테오도스의 중심을 향해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명백한 살기와 악의. 온갖 기분 나쁜 것들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이 하려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각들은 어떤 수를 써도 엔디미온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성배기사니까.

“우스운 일이군.”

엔디미온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테오도스의 중심부를 향해서 멈추지 않고 걸었다. 점차 사악한 기운이 강해지고 숨 쉬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나 엔디미온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걸어서 광장에 도착했다. 역시나 무너지고 박살난 건물들의 잔해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곳이다. 그리고 쥐새끼들이 숨어 있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

“언제까지 시답잖은 장난질만 한 셈이냐?”

나직이 내뱉은 말에 인기척이 났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은 악마들에게 함락됐고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기척이라니? 엔디미온은 손으로 턱을 약간 긁었다.

누구일지는 뻔했다.

“악마숭배자들이냐?”

무너진 건물의 잔해 뒤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색 망토를 두른 자들이었다. 까마귀의 깃털처럼 새까만 망토에는 금색 실을 둘렀는데 알아보기 힘든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보통 악마숭배자들이 옷이나 몸에 문양을 남기는 것은 모시는 악마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엔디미온은 문양만 보고도 대개 악마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지만 저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성배기사라고 해도 모든 악마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니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어떤 악마가 적이든 그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너희가 성벽 위에서 사술을 부렸던 거냐?”

엔디미온이 연달아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눈대중으로 확인한 악마숭배자들의 숫자는 서른셋이었다. 굉장히 많은 숫자였지만 엔디미온은 별로 겁먹지 않았다.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있는 악마숭배자들을 보고서 약간 짜증이 났다.

“벙어리들만 모인 거냐?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라. 헛소리만 하는 것보다 그게 나으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엔디미온도 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박차고 뛰었고 반사적으로 악마숭배자들이 사술을 날렸다.

서른셋이나 되는 악마숭배자들이 한꺼번에 부리는 사술은 엄청난 박력이 있었다. 하늘이 빨간색으로 물들고 보라색 번개가 쳤다. 바닥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불타는 거인의 손이 솟아오르고 뼈를 자를 듯 강력한 바람이 불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사술들이 엔디미온을 노렸다.

숫자가 많다고 해도 엄청난 규모의 공격이었다. 엔디미온은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보라색 빛을 보고서 이곳이 악마숭배자들을 위한 제단임을 알았다.

광장의 중앙에서 홀로 선 엔디미온은 전능자를 향한 짤막한 기도문을 외우고서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힘껏 들어 올린 성검을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단지 검을 꽂았을 뿐인데 바닥이 박살나며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섰던 악마숭배자들이 몸을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성검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신성력은 바닥을 부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사악한 사술들을 일소에 소멸시켰다.

서른셋 악마숭배자들이 한꺼번에 날린 사술도 결국 성배기사에게 상처 하나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애초에 그 어떤 악마도 성배기사를 이길 수 없는데 악마를 섬기는 악마숭배자가 엔디미온을 이기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며 다시 성검을 바닥에서 뽑았다. 대부분의 악마숭배자들은 방금 전의 공격으로 기절했지만 일부 악마숭배자들은 아직 남아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난 악마숭배자를 혐오하고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 테니까. 서로 시간 낭비는 하지 말자고. 너희는 무슨 수를 써도 날 이길 수 없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고? 과연 성배기사. 자신감이 대단하군.”

남은 악마숭배자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문양의 망토를 두른 자가 큭큭 웃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여자였다. 마녀로군. 엔디미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마지막 수가 남아있다! 이것을 보고도 네가 자신만만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바닥에서 다시 한 번 보라색 빛이 번쩍였다. 제단을 박살낸 줄 알았는데 아직도 멀쩡히 기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악마숭배자들의 주인이 엄청나게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뜻했다.

바닥에서 번쩍이는 빛의 세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마녀가 자신만만하게 외친 것을 보니 무언가 대단한 일을 벌이기는 할 모양이었다.

“너는 실수한 거다, 마녀야.”

“하, 실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네가 이곳에 들어온 것부터가 실수다!”

“내가 말한 실수라는 건 네가 마녀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알고 있나? 마녀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엔디미온의 시선이 싸늘했다.

“그리고 내가 굳이 그걸 설명하지 않아도 너는 잘 알겠지.”

“······.”

마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허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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