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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니, 그럴 리가…….”
엔디미온은 두 다리가 굳어버린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어둠의 여왕만을 향하고 있었다.
탁하게 변색된 금색의 머리카락은 지금까지 흐른 시간의 증거였다. 얼굴은 작고 창백했으며 입술은 옅은 색이었다. 눈매를 보면 얌전한 인상이었으나 청록색 눈에 감도는 탁기가 스산함을 느끼게 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쭉했으며 특히 손가락이 곱고 가늘었다. 엔디미온은 기억과 현실을 겹쳐보았다. 대조하고 비교하며 어디가 다르고 어디가 같은지 찾아내려고 했다.
그럴수록 괴로운 것은 그였다. 어둠의 여왕은 곱게 웃었다. 백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마리엘 뤼스트니아. 그것은 성녀의 이름이었고 그녀는 백 년의 시간을 넘어서 돌아왔다. 성배기사가 그랬던 것처럼.
“엔디미온! 정신 차리시오! 저것은 가짜에 불과하오! 기억하시오! 마리엘은 죽었소! 성녀는 죽었단 말이오!”
성검 에투알이 외치는 소리에 엔디미온이 몸을 움찔했다.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곱 명의 영웅이 다 함께 대악마 다르디낭에 맞서 싸웠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격렬한 전투 끝에 목숨을 잃은 영웅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성녀 마리엘 뤼스트니아였다. 그녀는 다르디낭이 내뿜는 사악한 독기로부터 영웅들을 보호하고서 그 대가로 목숨을 바쳤다. 무엇이든 녹여버리는 독기는 강력한 신성력으로 충만한 성녀의 몸조차 걸쭉한 액체로 바꾸어버렸다.
때문에 엔디미온은 싸움이 끝나고 나서 그녀의 시체조차 구할 수 없었다. 몹시도 쓰라린 기억이었다.
“이 더러운 것아! 시답잖은 수작을 부리는구나! 사술로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마음을 흐트러트린다고 해서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장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라!”
에투알이 일갈하자 어둠의 여왕은 작게 웃었다.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군. 이게 내 진짜 모습이다.”
“닥―쳐―라! 감히 우리를 기만하려 드는구나! 네 말대로라면 성녀가 배신자라는 뜻이냐? 타락하고 배교하여 성배기사에게 대적하려 든다는 뜻이냐? 그것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성녀는 죽었다.”
어둠의 여왕은 덤덤히 말했다. 성녀의 모습으로 성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몹시 기괴한 일이었다.
“그래! 성녀는 죽었다! 그리고 죽은 자는 배신할 수도 없고 배교할 수도 없…….”
“하지만 껍데기는 남는 법이지. 내가 그녀의 거죽을 뒤집어썼다. 악의란 것은 형체가 없어서 담을 만한 자루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인간의 몸이란 것은 참 재밌는 것이로구나. 내가 대악마였을 적보다 지금의 이 모습이 성배기사를 더욱 두렵게 하니까 말이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너는 죽은 자를 얼마나 모욕할 셈이냐! 죽음은 언제나 숭고해야 한다! 그것은 너희 사악한 것들이라고 해도 그럴 것인데 어찌 망령된 짓만 하느냐!”
에투알이 성난 목소리로 어둠의 여왕을 타박했다. 하지만 성녀의 얼굴을 한 악의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투알이 내뱉는 모진 소리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어둠의 여왕은 그저 성배기사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엔디미온만을 향했다.
그리고 시선은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했다.
“성녀 마리엘…….”
엔디미온은 나직이 말했다. 시선은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엘의 모습은 백 년 전과 달라진 곳도 있었으나 변하지 않은 곳이 더 많았다. 추억은 비눗방울과 같아서 덧없지만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욱 집착하고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엔디미온은 머릿속으로 성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직 젊고 미숙할 때였다. 젊다는 것은 비단 육체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정신은 아직 어렸다. 그 시절에는 몰랐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태어나고 자라난 것이 아니니까.
만들어진 존재는 스스로 배우고 익혀야 했다. 그것이 그의 미숙함이었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은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언제나 승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신의 용력은 대단했으나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악마들의 꾐에 빠져서 그가 이끌던 군세가 큰 타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왔고 성기사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성배기사가 할 수 있는 그저 싸우고 또 싸워서 한 명이라도 많은 적들을 죽이자는 것뿐이었다.
밀물이 밀려오듯 빠르게 숨통을 죄여오는 적들을 보면서 모두가 마지막을 직감했다. 용감하게 싸우고 영광스럽게 죽을 것을 각오했다.
그때 광명이 비추었다. 백마를 타고 순백의 갑옷을 입은 성녀가 비추는 빛이었다. 그녀는 용맹한 성기사들을 이끌고 거침없이 악마와 악귀들을 무찔렀다. 선지자가 바다를 가리키니 물살이 갈라졌다는 옛 전설처럼 많고 많은 적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또 그 육신이 신성한 칼날에 갈려나갔다.
가장 선두에 서서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처럼 종횡무진으로 날뛰던 성녀는 환한 미소와 함께 성배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배기사님. 저는 마리엘 뤼스트니아라고 해요.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와 함께 돌아가셔요.”
따사롭게 얼굴 위로 내리쬐는 아침 햇살을 처음 본 아이처럼, 성배기사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순간 오직 싸우고 벌하는 것만 알던 미숙아는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이었다. 세상 곳곳은 악마들의 침략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영웅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으니 일곱 명의 영웅들은 왕국 각지로 떠나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
때문에 성배기사와 성녀가 함께 있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엔디미온은 그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행복했다. 전장에서 함께 말을 타고 달리며 적들을 무찌를 때, 성으로 돌아와 피와 땀으로 젖은 지친 육신을 위로할 때, 다시 또 의무를 다하러 가기 전 맛없는 아침 식사를 할 때.
모든 순간이 행복이었고 웃음이었다. 엔디미온은 마리엘이 싱그럽게 웃으며 이쪽을 볼 때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행복은 짧은 듯 길었다. 그래서 더 썼다. 감히 삼키기도 힘들 정도로.
“네가 그 모습을 한 것은 날 농락하기 위해서인가? 날 화나게 하기 위해서인가?”
한참 만에 입을 연 엔디미온을 보고서 마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형체가 없는 자다. 악의는 바람과 같아서 잡아두지 않으면 날아가고 말지. 나는 그저 날 담아둘 그릇으로 이것을 택했을 뿐이다. 거기에 악의는 없다.”
몹시 모순적이게도 말이야. 마리엘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백 년 전과 꼭 닮았다.
“너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군.”
엔디미온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흠칫 놀랐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차분하고 덤덤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악의는 대악마의 가면을 벗고 마리엘의 거죽을 뒤집어썼다. 당연히 화가 나야 하는 일인데 어째서인지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리엘의 태도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널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엔디미온! 그게 당최 무슨 소리요! 갑자기 머리가 돌아버리기라도 한 거요?”
에투알의 말을 무시하며 엔디미온이 말을 이었다.
“백 년 전에는 몰랐다. 네가 대악마 다르디낭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때는 우리가 차분히 대화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대화를 해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네가? 나를? 재밌구나. 그래, 나에 대해서 무엇을 오해했지? 그리고 무엇을 알게 됐지?”
“너는 나와 같다.”
엔디미온은 한 박자 쉬고 나서 말했다.
“너는 긴 시간 동안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했다. 왜냐하면 너는 세상 모든 악의의 총체니까. 왜 그랬을까? 질리지도 않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복수를 위해서? 아니야. 네게는 목적의식이 없다. 강렬한 욕망이 없다. 그래서 나와 같은 거다.”
너는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야. 엔디미온의 한 마디에 마리엘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그것이 내 의무다? 그래서 너와 같다?”
“그래.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내 의지로 여기에 섰으니까.”
마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그것은 곧 내가 하나의 법칙이라는 뜻이지. 모든 것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태양이 뜨면 낮이 오고 달이 뜨면 밤이 온다, 강은 흐른다, 바람은 분다, 불은 뜨겁다, 물은 차갑다. 이것은 하나의 진리고 법칙이다. 결코 바꿀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진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악의는 세상을 해친다.”
성녀의 목소리로 말이 이어졌다.
“내가 몇 번이고 부활하며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그저 법칙이고 또한 진리다. 감히 진리를 어쩔 테냐? 아래에서 위로 떨어지고, 낮과 밤을 바꾸고, 강을 치솟게 하고, 바람을 멈추게 하고, 불을 차갑게 하고, 물을 뜨겁게 하는 것이 되겠나? 저것들 중 하나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나? 진리는 결코 변하지도 않기에 진리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진리다.”
마리엘이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것은 세상을 짓누르는 듯 묵직한 걸음이었다.
“악의가 세상을 해치는 것은 진리다. 때문에 나는 끝없이 이 세상을 해치려 들 것이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것처럼 선과 악의 대결은 결코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악의는 약하게 만들 수 있고 줄일 수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자, 성배기사야. 세상 모든 선의를 휘두르는 자야. 우리는 서로 같으면서 다른 자다. 그런 우리들이 만났으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지?”
“우리는 서로 같으면서 다른 자가 아니다.”
스산하게 웃는 마리엘을 보면서 엔디미온 역시 한 발자국 움직였다. 마리엘이 그랬던 것처럼 묵직함은 없었다. 하지만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한 걸음이었다.
“너와 나는 명백하게 다르다. 그것은 의지의 차이다. 너에게는 의지가 없다. 세찬 바람이 집을 망가트리고 담을 무너트려도 거기에 의지가 없는 것처럼. 그래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성배기사는 빛나는 성검으로 마리엘을 가리켰다. 한때 성녀였으나 지금은 그저 악의의 껍데기에 불과한 자를.
“나는 이곳에 내 의지로 섰다. 의지의 차이, 아주 작고 작은 차이지만 그것이 승부를 결정지을 것이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엔디미온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와라, 아무것도 없는 괴물아.”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