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98화 (197/199)

198

“백 년 전과는 달라졌구나.”

마리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의무만을 알던 인형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사람이 되었어. 아마 이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사람이 됐다는 게 네 약점이란 것을 모르는구나.”

마리엘이 두 손을 천천히 들었다. 손이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서 사악한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곧 몸 전체를 휘감았다.

빠르게 회전하는 회오리처럼 마리엘의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사악한 기운은 곧 하나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색의 갑옷이었으나 검은색 물감이 한 방울 떨어진 것처럼 금세 흑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광택 없는 묵색의 갑옷은 무저갱의 색깔과 똑같았다. 마리엘은 건틀릿을 낀 손을 움직여 철컥철컥 소리를 냈다. 어느새 오른손에는 검은색 창이 들려있었다. 휘리릭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창은 쿵 소리를 내면서 창자루 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네가 과연 성녀를 죽일 수 있을까? 내 얼굴을 보고도 칼을 들이밀 수 있겠냐는 말이야.”

엔디미온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쓰러트려야 할 적이지만 그 모습은 마리엘과 같았다. 과연 악마들을 상대할 때처럼 거칠게 때려눕히고 목을 자를 수 있을까?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나는 신성한 징벌자다. 이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 있다면 그게 전능자라 하더라도 벌하는 것이 내 의무라는 뜻이다. 네가 성녀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게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면 내가 망설여야 할 이유가 뭐냐.”

“과연 강철과 같은 마음이로구나. 아주 오래 전부터 나에게 대적했던 자들은 모두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 자, 그럼 이번 시대의 대적자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자.”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백 년 전 성녀가 자주 짓던 미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자애롭게 어린 양들을 쓰다듬는 인애의 미소와 무기를 들고 휘두르며 사악한 것들을 학살하는 징벌의 미소.

이번 것은 명백히 후자였다.

쾅! 무저갱의 단단한 바닥이 박살나며 마리엘이 공중으로 뛰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위로 들면서 방어 자세를 잡았다. 성녀가 아래로 낙하하면서 강렬한 공격이 직격했다.

엔디미온은 얼른 검을 들어서 창을 막았으나 그 충격으로 거센 바람이 일고 단단히 딛고 있던 바닥이 쾅 소리를 내면서 박살났다. 마리엘은 갑옷을 입고 있지만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날쌔게 움직이며 다시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빠르게 창을 내질렀다가 다시 회수하면서 대각선으로 크게 휘둘렀다. 엔디미온은 공격을 막으면서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단지 막기만 했는데도 손목이 저릿할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리엘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또 한 발자국 움직였다. 빠르게 날아오는 창날은 집중하지 않으면 막기 힘들었다. 또한 창은 보라색 불꽃에 휩싸인 채로 타오르고 있었는데 성검과 부딪칠 때마다 사방으로 불씨를 튀겼다.

단지 불씨일 뿐인데 그 열기가 엄청나서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엔디미온은 호흡을 가다듬고서 마리엘의 공격에 대비했다. 챙! 다시 한 번 창과 검이 부딪쳐서 사방으로 열기를 뿌렸다.

“제법 잘 막는구나. 그럼 이것도 막을 수 있는지 볼까!”

마리엘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서 창을 한 바퀴 휘리릭 돌렸다. 그리고 착 소리를 내며 어깨 위로 들었다. 한 발을 뒤로 빼고 허리를 트는 것만 봐도 무슨 행동을 할지 유추가 됐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다.

성검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신성함 힘은 곧장 보호막이 되었고 공기를 찢으며 날아온 창과 부딪쳐 힘겨루기를 했다. 창은 보호막을 잡아찢으며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성검은 더욱 강력한 신성력을 뿜어내며 그것을 저지했다.

힘겨루기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슬쩍 고개를 들어서 마리엘 쪽을 보았다. 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없었다.

“여기다, 성배기사야!”

머리 위로 들리는 목소리에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머리 바로 위에 마리엘이 있었다. 그녀는 엔디미온의 머리 위로 뚝 떨어지면서 건틀릿 낀 주먹을 내질렀다. 쾅 소리가 나면서 보호막이 흔들리자 엔디미온은 슬쩍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았다.

보호막이 사라지고 아직 추진력을 잃지 않은 창이 그대로 질주했다. 머리 위와 정면, 두 방향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 동시에 날아오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망설이지 않고서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크게 올려치는 공격은 날아오는 창끝에 부딪쳐 경로가 약간 틀어지게 만들었고 그대로 다시 위로 전진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건틀릿을 막아냈다.

방향이 틀어진 창은 바닥에 처박혔고 검에 건틀릿이 부딪친 마리엘은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후 바닥에 착지했다. 그녀는 날렵한 동작으로 착지한 후에 곧장 바닥을 박차고 다시 뛰었다. 달리면서 건틀릿 낀 손을 휙 휘두르자 바닥에 처박혔던 창이 스스로 뽑혀서 주인에게 돌아갔다.

공격은 세차게 쏟아지는 비와 같았다. 일 초에 수십 번씩 행해지는 찌르기 공격에 엔디미온은 오로지 방어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럼에도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낼 수는 없었다. 옷이 찢기고 그 아래의 단단한 근육들도 공격을 버티지 못했다. 사방으로 튀는 피는 창이 만들어낸 바람을 따라서 흩날렸다. 그야말로 혈풍이었다.

엔디미온은 입술을 깨물며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한바탕 공격이 이어진 후에 마리엘이 다시 창을 뒤로 회수했다. 하지만 정말 잠깐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 한 발자국 전진하며 빠르게 창을 휘둘렀다.

쾅! 창과 검이 부딪쳤다고는 믿기 힘든 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공격을 막아냈지만 충격을 완전히 줄일 수는 없었다. 그의 몸은 뒤쪽으로 홱 날아갔고 바닥에 처박힌 채로 상당한 거리를 밀려났다.

부서진 바닥의 잔해가 엔디미온의 몸을 감추었다. 마리엘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돌무더기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알고 있다, 성배기사야. 이게 네 실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마리엘이 불타는 창으로 돌무더기를 겨누었다가 어깨의 탄력을 이용해서 힘껏 던졌다.

“네 전력을 보여라! 정말로 끝을 내길 바란다면 모든 힘을 다해서 내게 부딪치란 말이다!”

날아간 창은 우레가 치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을 발생시켰다. 이대로 엔디미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싸움은 여기서 끝이 난다. 긴 시간 끝에 처음으로 악의가 승리하는 것이다. 마리엘은 은근한 미소와 함께 돌무더기를 쳐다보았다.

과연 성배기사는 여기서 멈출 것인가? 더는 싸우지 않을 것인가? 도망치는 것으로 끝을 낼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빛이여!”

힘찬 외침과 터져 나오는 빛. 아무것도 없는 무저갱을 환하게 만들고 따스한 온기로 가득 채우는 강렬한 빛.

돌무더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명징하게 빛나는 신성한 징벌자였고 광휘를 휘두르는 전능자의 칼날이었으며 또한 찬란한 광명 그 자체였다.

성배기사는 후광을 두른 채로 힘차게 외쳤다.

“보아라! 나는 광명의 불꽃 그 자체다! 결코 꺼지지 않고 사그라들지 않는 저항의 불꽃이다!”

빛을 머금은 성검은 그 길이가 세 곱절은 길어졌다. 그 상태에서도 점점 더 세찬 빛을 뿜어내며 길이를 늘려가고 있었다. 창과 대적할 만큼 길어진 검은 단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징벌이었다.

무저갱의 어둠이 잘려나가고 빈자리는 백색으로 물들었다. 성배기사가 내뿜는 신성력은 이 공간 자체를 뒤바꿔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엘은 눈이 부셔서 성배기사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억지로 눈을 뜨고 보려고 하면 안구가 녹아서 흘러내렸다. 마치 태양을 가까이서 본 것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상태로 웃고 있었다. 피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그래! 전력을 다해서 덤벼라! 너와 나는 결코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우리의 운명은 태초부터 이어졌으며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하하하!”

마리엘의 갑옷은 신성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녹아내렸다. 부드러운 살갗이 드러났다가 곧 뼈까지 나타났으나 마리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성배기사를 보며 피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래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호수의 여왕은 악의로부터 이 세상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덧없는 믿음이다! 사람은 선행보다는 악행을 더 쉽게 저지르는 생물이니까 말이야! 우리의 운명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같지만 결국 끝은 있다! 이 세상은 결국 멸망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고 도망칠 수도 없는 운명이다! 하나의 진리란 말이다!”

마리엘이 크게 소리치며 창으로 바닥을 세게 찍었다. 그 순간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무저갱 전체에서 감돌았다. 성배기사의 신성력에 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기운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것은 마리엘의 몸을 휘감으며 그녀의 진정한 힘을 해방시켰다. 신성력에 타들어갔던 두 눈과 녹아내렸던 살갗이 다시 복구됐다. 또한 묵색의 갑옷에서 기이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고 창의 불꽃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이번 시대의 대적자야! 오늘이 이 세상의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라! 싸우고 또 싸워서 예정된 패배를 다음 시대의 대적자에게 넘길 수 있도록 발버둥 쳐라! 결국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니 의미 없는 유보일 뿐이지만 말이다!”

깔깔깔 웃던 마리엘이 창을 휙 휘둘러 엔디미온을 겨누었다. 아까까지는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는 싸움이었지만 지금부터는 서로를 죽이기 위한 싸움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뛰었다. 단지 한 발자국 움직였을 뿐인데 바닥이 박살나고 땅이 흔들렸다.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자 공기가 진동했고 창과 검이 부딪치자 벼락과 같은 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휘둘러 바닥을 갈랐고 마리엘은 부서진 바닥의 잔해를 밟고 뛰어서 공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창끝으로 엔디미온을 겨누며 그대로 낙하했다.

사악한 힘과 무시무시한 괴력이 합쳐진 공격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재앙과 같았다. 불길하게 빛나는 보라색 불꽃이 유성처럼 추락했다. 엔디미온은 한 손을 휘둘러 신성력으로 보호막을 만든 후에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두 번 반짝인 빛이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했다. 날아간 빛의 칼날은 마리엘의 어깨를 크게 베었으나 보호막은 창이 만들어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처럼 산산이 깨졌다. 불타는 창은 그대로 질주해서 엔디미온의 가슴에 직격했다.

쾅! 굉음과 함께 엔디미온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그의 상의는 완전히 찢어져서 형체조차 남지 않았고 방금 전 창에 찔렸던 부분은 멍이 든 것처럼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가슴이 관통당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창에 맞은 충격 때문에 목구멍에서 울컥하고 핏물이 터져 나왔다.

엔디미온은 핏물을 뱉어낸 후에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발간 자국이 길게 남았다.

“이게 전력이냐?”

서로에게 한 방 먹인 두 사람은 다시 덤벼들 기회만을 노리며 천천히 거리를 쟀다. 엔디미온은 아직 웃고 있는 마리엘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번에도 내가 이기겠군.”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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