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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엘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후에 말했다.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구나. 백 년 전과 다르게 제법 오만해졌어.”
엔디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리엘보다 먼저 움직였다. 성검이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서 빛의 칼날이 날아갔다.
마리엘은 재빠르게 창을 들어서 공격에 대응했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창을 한 바퀴 회전시켜 빛의 칼날을 쳐낸 후에 곧장 투창 자세를 잡았다. 힘껏 날아간 창은 공기를 찢고 대지를 진동시켰다.
저것이 얼마나 강력한 공격인지 아는 엔디미온은 정면에서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오른쪽으로 뛰었고 바닥을 한 번 구른 후에 다시 벌떡 일어나서 마리엘을 향해 달렸다. 간발의 차이로 불타는 창이 그가 있던 자리를 스쳐지나갔고 창이 날아가면서 발생시킨 바람에 의해 바닥이 쩌적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빗나간 창은 마치 의식이 있는 것처럼 알아서 마리엘을 향해 돌아갔다.
엔디미온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후에 검을 크게 휘둘렀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바닥이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며 돌조각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하지만 엔디미온의 자세는 굳건했다. 그는 자신의 힘 때문에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도 똑바로 마리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챙 소리가 났다. 그 다음에는 우레의 소리가 났다. 검과 창이 만들어내는 강철의 우레였다. 엔디미온과 마리엘은 서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며 감히 눈으로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세찬 바람이 불고 대지가 진동했다. 무저갱은 두 반신적 존재가 벌이는 싸움의 충격으로 신음했다. 무기가 서로 부딪힐 때마다 발생하는 충격은 무저갱의 곳곳을 박살내고 있었다. 마리엘과 엔디미온의 싸움은 공간 자체를 박살낼 듯 격렬했다.
그들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어둠 위로 작은 금이 생기는 정도였다. 그 다음에는 잘게 쪼개진 가루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고 좀 더 전투가 격렬해지자 이제는 큰 덩어리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단지 위쪽의 공간만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무저갱은 천상과 지상이 뒤집힌 곳이기에 위아래의 구별은 의미가 없었다. 발을 딛고 있는 대지 역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쪼개져서 위쪽을 향해서 조각들을 떨어트렸다.
참 기이하게도 아래에서 위로 공간의 조각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마치 위아래가 뒤집힌 것처럼.
그런 식으로 반대 방향으로 떨어지던 조각들은 공간의 빈자리를 채웠다. 무저갱은 빠른 속도로 부서지고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수복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 제법 재빠르구나!”
마리엘은 크게 웃으며 한 손으로 창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른 손은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허공에서 보라색 불꽃이 타오르더니 세차게 회전하며 엔디미온을 향해 불씨를 뿌렸다. 처음에는 작은 불씨였으나 날아오면서 점차 크기가 커져 금세 거대한 칼날이 되었다.
엔디미온은 신성력을 이용해 보호막을 만들었다. 단단한 보호막 위로 불꽃의 칼날이 우수수 쏟아졌지만 투두둑 소리만 낼 뿐 어느 것도 안쪽으로 침투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마리엘의 창이 보호막을 관통하여 날아왔다.
쨍―그랑! 날카로운 솔가 엔디미온의 귀를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선명한 소리였다. 그는 칼자루를 세게 쥐고서 날아오는 창날을 쳐내려고 했다. 수많은 전투 경험을 통해 단련된 감각이 어느 순간에 검을 휘둘러야 할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 감각을 따라서 검을 휘두르는 순간 갑자기 치솟는 열기에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날아오는 창보다 먼저 뜨거운 불꽃이 몸을 집어삼켰다. 마리엘이 창에 두르고 있던 보라색 불꽃이 창보다 더 빠르게 질주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불꽃에게 집어삼켜진 엔디미온은 입술을 꽉 깨물면서 하려고 했던 행동을 이어갔다. 불꽃 때문에 반응이 약간 느려졌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창을 막아낼 수 있었다. 불꽃을 먼저 보내고 보통의 창으로 돌아간 마리엘의 무기는 뱀이 쉭 소리를 내는 것처럼 기이한 소리를 발생시켰다.
그러자 엔디미온의 몸을 휘감았던 불꽃이 다시 창에 휘감겼다. 덕분에 숨통이 트인 엔디미온은 거칠게 호흡했다. 목구멍이 따끔한 것이 화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때문에 쉰 목소리가 나왔다.
“별 걸 다 하는군.”
“그래, 나는 별 걸 다 하지. 그런데 아직 다 보여준 게 아니야.”
휘리릭! 창이 한 바퀴 회전하더니 그 경로를 따라서 불꽃이 원을 그렸다. 마치 마법진처럼 빙그르르 회전하던 불꽃의 원은 상하좌우로 움직이면서 스스로를 복사했다. 복사된 불꽃의 원들은 혼자서 움직이더니 저들끼리 또 하나의 거대한 원을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마리엘의 등 뒤에서 그녀를 기준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점차 회전속도가 빨라지더니 불꽃의 화살을 토해냈다. 마치 수백 명의 궁병들이 연달아서 화살을 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엔디미온은 멍청하게 제자리에 멈춰있지 않았다. 그는 마리엘을 기준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달렸다. 불꽃의 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숫자의 화살들이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서 날아갔다. 대부분은 바닥에 처박혔는데 그때마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대지가 흔들렸다.
화살 하나가 강력한 마법이나 다름이 없었다. 엔디미온은 이미 몸 전체에 약한 화상을 입은 터라 저런 것에 맞아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반 바퀴 정도 달린 후에 슬쩍 마리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투창 자세를 잡고 또 한 번 창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공격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곧장 방향을 틀어서 마리엘을 향해 뛰었고 마리엘은 들고 있던 창을 힘껏 던졌다. 공기를 찢으며 강철의 벼락이 질주했다. 불꽃의 화살과 불타는 창, 어느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정면에서 마리엘을 노리는 것은 분명 위험한 짓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돌격이 아니라 그냥 개죽음이 될 게 뻔했다.
그럼에도 엔디미온은 달렸다.
“하하하! 그래! 끝장을 볼 생각이구나!”
마리엘이 기쁜 듯이 웃었다. 공격이 엔디미온의 몸에 직격할 때까지 1초도 남지 않은 순간이었다. 성배기사는 달리고 또 달렸고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충돌의 순간.
“내가 물었지, 이게 전력이냐고.”
무언가 공기를 갈랐다. 처음에는 빛이었고 그 다음에는 검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빛이었고 검이었다. 그것은 성검이었다. 성검은 빛으로 불꽃을 잘랐다. 창은 끼이이이익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며 두 방향으로 튕겼다.
마리엘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걸 잘랐다고?
“아직이다!”
아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백 개나 되는 불꽃의 화살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무리 엔디미온이라도 그것들 전부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무언가 대책을 세우기도 늦었다. 불꽃의 화살들은 그대로 엔디미온의 몸에 직격했다.
“기세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런 무모한 돌격은······.”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검은색 연기를 뚫고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찬란한 광휘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대로 마리엘의 배를 찔렀다. 단단한 갑옷도 성검의 강렬한 일격을 막아줄 수는 없었다.
마리엘은 커억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지럽다. 쓰라리다. 고통스럽다. 백 년 전에도 느꼈던 감각이었다. 아니, 그 전에도 몇 번이고 느꼈던 감각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역시나 괴로웠다.
“크크큭······.”
잇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칼자루를 더욱 세게 쥐면서 손목을 비틀었을 뿐이었다. 또 한 번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마리엘은 아직 웃고 있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한 거 아니겠지, 내 대적자야?”
쐐애애액! 바닥에 갈라진 수십 개의 틈에서 수많은 창들이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엔디미온은 미처 도망칠 새도 없이 모든 창에 몸을 꿰뚫렸다. 마치 꼬챙이 형벌을 받는 죄인처럼 몸 전체가 너덜거렸다.
목구멍에서 뜨거움이 느껴지며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양이 많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흘려야 할 피는 모두 수많은 상처에서 먼저 흘렀으니까.
“엔디미온!”
성검 에투알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 엔디미온을 도우려고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성가신 무기로구나. 너는 잠깐 빠져있어라.”
마리엘이 성검의 칼날을 손으로 붙잡았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성검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에투알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으나 이길 수는 없었다. 마리엘은 자신의 배에서 성검을 뽑아서 바닥에 휙 내던졌다.
갈라진 바닥의 틈에서 솟아오른 그림자들이 미끌거리는 몸으로 성검을 붙잡았다. 또 한 번 비명이 울렸다.
“자,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덤벼라, 내 대적자야! 내 의무는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싸움뿐이다! 나의 유일한 즐거움을 위해 춤춰라! 싸우고 또 싸워서 세상의 멸망을 유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란 말이다!”
깔깔깔 웃는 소리가 성가셨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숙인 채로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핏방울을 보았다. 양껏 흘린 피가 웅덩이를 이루었을 때 그는 가만히 생각했다.
거 말 되게 많네.
“설마 벌써 끝이냐? 우리의 운명은 여기서 끝인 거냐? 내 대적자야! 좀 더 날 즐겁게 해라! 좀 더 날······. 컥!”
강철 같은 육체는 몸을 고정한 창들을 단숨에 부쉈다. 꽉 쥔 주먹은 시끄럽게 나불거리는 입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마리엘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핏물이 튀었다. 엔디미온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몸은 만신창이였다. 상처도 심했고 피도 너무 많이 흘렸다. 아무리 그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해도 본질은 인간이었다. 더 싸우면 죽는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분명히.
엔디미온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두 손은 아직 움직였다. 두 다리도 마찬가지고 어깨 역시 삐걱거리기는 해도 움직일 수는 있었다. 심장도 아직 세차게 뛰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보였고 귀도 제대로 들렸다.
그리고 등 뒤의 후광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문제없군.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싸울 수 있다.
“엔―디―미―온!”
주먹에 맞고 날아갔던 마리엘이 두 눈을 빛내며 달려왔다. 그녀 역시 창을 잃었기에 휘두를 것은 두 주먹뿐이었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가슴 위로 들었다. 그리고 날렸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어느 쪽에서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사정없이 주먹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한 번 때릴 때마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부러진 뼈가 살가죽을 뚫고 툭 튀어나왔다.
분질러진 갈비뼈가 장기를 찔러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코뼈가 뒤틀려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눈두덩이 부어서 시야가 불분명했다. 그래도 싸우고 또 싸웠다. 엔디미온의 왼쪽 팔이 마리엘의 주먹에 맞고서 부러졌다.
축 늘어진 팔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하지만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오른쪽 팔이 남아있었으니까. 그것마저 부러져도 싸울 수 있었다. 두 다리가 있으니까. 두 다리가 부러지면 머리가 남아있었다.
성배기사는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놈! 백 년 전보다 더 질척거리는구나!”
마리엘의 상태 역시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입 안에 고인 핏물을 연신 뱉어냈다. 피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손가락뼈가 전부 부러져서 주먹을 쥘 수 없었고 눈 하나는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 역시 아직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또 한 번 격돌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휘두르는 주먹은 무저갱에 수많은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리엘은 퉤 하고 또 한 번 피 섞인 침을 뱉어냈다. 그녀는 거칠게 호흡하며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그 뒤에 있는 무저갱의 균열을 보았다. 본래라면 스스로 메워져야 할 틈이 어째서인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균열을 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 친구들이 오는 모양이구나. 백 년 전의 그 얼치기들 말이야.”
“그래서.”
엔디미온은 피범벅이 된 손으로 얼굴의 땀을 쓸어내렸다. 얼굴에 기다란 자국이 남았다.
“비겁하다고 할 셈이냐? 이제 와서 친구들을 불렀다고? 걱정할 것 없다. 이번 공격으로 다 끝이 날 테니까.”
엔디미온은 하나 남은 주먹을 들었다. 마리엘 역시 픽 웃으며 멀쩡한 쪽의 주먹을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망설이지 않았다. 모든 힘을 짜낸 주먹이 서로를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쨍그랑!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치는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저갱이 무너져 내렸다. 차츰 크기가 커지던 균열은 결국 무저갱을 굴복시키고 안쪽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세상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위대한 광경이었다.
“커······윽!”
빛이 어둠을 굴복시켰다. 환한 빛이 무저갱의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고 오색찬란한 휘광을 뿌렸다. 뒤따라 들어온 영웅들도 그 빛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광채는 빛으로 무저갱을 가득 채워 스스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둠이 빛으로 걷히고 천상과 지상이 제자리를 되찾으며 아무것도 없는 곳에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지 않는다.”
엔디미온은 바닥에 쓰러진 마리엘을 보고서 나직이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으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글쎄. 벌써 승리를 자축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
마리엘은 큭큭 웃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불길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일이 심상치 않았다.
“이번 시대에는 네가 승리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상처뿐인 승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 여기서 죽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악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까!”
마리엘은 자신의 모든 힘을 소모해서 테오도스 성을 날려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가만히 마리엘을 쳐다보았다. 이미 방금 전의 일격으로 상당한 기력을 소모한 상황이었다. 달리 막을 방도가 없었다. 마리엘도 그것을 알기에 비웃은 것이다.
엔디미온은 그저 가만히 마리엘을 쳐다보기만 했다.
“악의를 저울에 달 수 있는가?”
조용한 목소리였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그저 덤덤했다.
엔디미온은 등 뒤에서 들리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를 통해서 영웅들이 이곳에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저 마리엘을 보며 말했을 뿐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죗값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저울은 언제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저지른 죗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가 기꺼이 자신의 살점을 잘라서 저울 위에 올리겠는가? 누가 기꺼이 심장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죗값은 우리가 지불하기에는 너무 무겁다.
또한 그것은 끝없이 불어나는 부채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도 시샘하지 않고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사람은 그런 존재니까. 악의는 불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 않는다. 저울은 기울기만 하고 반등하지 않는다. 우리는 죗값을 치를 수 없으나 저울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마리엘의 몸에 더 많은 힘이 모였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이 흉흉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렸다.
“누군가는 저울 위로 올라가야 한다.”
타닥타닥 하고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엔디미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리엘의 몸에 모인 사악한 기운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엔디미온 씨! 안 돼요!”
베로니카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엔디미온의 등 뒤에서 번쩍이는 성배의 빛을 보았다. 눈물이 났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지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모든 죗값은 내가 치른다. 그게 내 의무니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이것이 성배기사 엔디미온의 마지막 의무다!”
빛이 번쩍이고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