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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기사가 사라진지 1년이 지났다.
그의 마지막을 목격했던 자들은 성배기사가 이 세상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모두에게 알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세상 모두의 죗값을 기꺼이 지불한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했다.
사람들은 성배기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했던 모든 행위를 노래로 만들고 이야기로 썼다. 아이들은 백 년의 시간을 넘어서 또 한 번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 성배기사의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다녔다. 거기에 얼마나 숭고한 자기희생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냥 부르고 다녔다.
싸움이 끝나고 1년. 세상은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성배기사가 모든 자들의 죗값을 대신 치렀지만 세상 모두가 성인이 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질투하고 시샘하며 증오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니까. 사람들은 누군가를 질투하고 시샘하며 증오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며 귀애했다. 선의와 악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악인이 될 수도 있었고 선인이 될 수도 있었다.
성배기사의 희생은 단지 가능성을 위한 것이었다. 동전을 던졌을 때 선한 면이 나올 가능성. 열 번을 던져서 한 번이라도 더 선한 면이 나온다면 그의 희생은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리라.
전쟁이 끝나고 나서 여명교단은 공식적으로 성배기사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비록 시체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성도 뒤르겔에 그의 무덤을 만들고 매년 기일을 기리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배기사의 무덤을 찾아왔다.
또한 여명교단은 성배기사와 함께 싸웠던 자들이 백 년 전의 영웅임을 인정했다. 천둥검의 라이오넬, 요정기사 라우렌시오, 강철 주먹의 비다르, 대마법사 베로니카. 그들의 공적에 교황이 직접 감사의 말을 전했다.
대마법사 바이올렛에 대한 일은 불문에 붙여야 했기에 베로니카는 바이올렛의 먼 후손으로 알려졌다. 가문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 세상의 위기에 기꺼이 몸을 내던진 위대한 마법사라는 설정이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곧장 여행을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 찾아야 할 게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라이오넬은 전쟁이 끝난 후에 성기사들의 검술 교관이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어디가 부족한지 어디서 실수했는지 대번에 알아차렸기에 검을 가르치는데 문제가 없었다.
성기사들은 그에게 한 번이라도 더 지도를 받기 위해 매일 같이 줄을 섰다. 가끔씩 노망이 나서 천둥검을 외칠 때만 빼면 라이오넬은 훌륭한 지도자였다.
라우렌시오는 공언했던 대로 북부 요정들의 부흥을 위해 힘썼다. 그는 마르티레스 가문의 위명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가주 엘리야를 중심으로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키워갔고 그의 소식을 들은 옛 요정 가문들이 북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마르티레스 가문은 북부의 절반을 발아래에 두었다. 일곱 요정 가문의 주인이자 북부의 대영주라는 이름을 되찾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았다.
비다르는 왕국에서 작위를 받아 남부의 영주가 되었다. 그가 백 년 전부터 바라던 일이었다. 이제 강철 주먹의 비다르가 아니라 비다르 백작이라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백작이라 불리며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을 즐겼는데 백작 놀이도 금세 질렸다. 또한 영주가 되면서 귀찮은 서류 작업을 해야 했는데 책상머리에서 종이나 만지작거리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한때 전장에서 적들의 대가리를 깨던 그가 서류를 쳐다보며 끙끙대고 있는 모습은 제법 우스웠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책무를 내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영지와 백성들을 그냥 버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천성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나엘라티나는 백 년 전의 죗값을 씻고 완전히 개심했음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성도 뒤르겔을 지키는 수호룡이 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추기경 에스메렐다는 차기 교황에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그녀의 공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림발드와 에우레킬슨은 다음 추기경 후보로 추대됐다. 만약 에스메렐다가 다음 교황이 된다면 그들이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다.
앤드루는 성도를 떠나서 유랑했다. 자신이 성배기사의 위광을 세상 곳곳에 알리는 기수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성배기사의 뜻을 이어 가겠다고 했다.
성배기사가 사라지고 1년, 전쟁이 끝나고 1년.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기리며 살아갔다. 전쟁의 상처가 차츰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세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어어, 잠깐 정지. 그래, 거기 너 말이야. 여기 너 말고 달리 누가 있겠어?”
세상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긍정적인 방향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작용했다. 햇살이 화창한 어느 날에 가방을 메고 길을 걷던 남자는 산적들과 마주했다.
산적들의 숫자는 다섯 명. 모두 저급한 무장을 하기는 했지만 숫자가 숫자인 만큼 무시할 수 없었다. 남자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서 제자리에 멈췄다. 산적들은 낄낄 웃으면서 무기를 들이밀었다.
“그 가방만 넘기면 목숨은 살려줄게.”
“야야, 우리 바빠. 빨리 가방 벗고 꺼져.”
남자는 조용히 가방을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가져갈 거면 가져가라는 듯한 태도에 산적들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들은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산적들 중 하나가 얼른 나와서 가방에 손을 뻗을 때였다.
“끄아아악!”
산적은 덜렁거리는 손목을 붙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남자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손목을 부러트린 것이다. 산적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욕설을 내뱉었다.
“이 씹새끼가! 얌전히 가방만 넘기고 꺼질 것이지!”
“죽여! 저 새끼 죽여!”
남자는 달려오는 산적들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산적에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산적을 보면서 반대쪽 주먹으로 또 한 명의 얼굴을 날렸다.
남은 것은 셋. 남자는 검을 휘두르는 산적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날이 무뎌진 검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칼날을 손으로 잡은 후에 홱 잡아당겼다. 산적은 어어 소리를 내며 끌려가다가 묵직한 주먹에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죽어!”
사각에서 기습을 시도한 산적이 남자의 몸에 검을 휘둘렀다. 어깨에 제대로 공격이 들어간 것을 보고서 환하게 웃었지만 기대했던 비명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벌레가 물었냐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곧장 산적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어, 으으······. 으아아아아!”
손목이 부러졌던 마지막 산적이 도망치려고 하자 남자는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집었다. 그리고 휙 던지자 다리에 맞은 산적이 바닥에 쓰러졌다.
산적 다섯을 순식간에 해치운 남자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길을 가려는데 어디서인가 휘파람 소리가 났다.
“휘유, 대단하시네요. 산적 다섯 명을 맨손으로 쓰러트리다니.”
남자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에 사람은 없었다.
“아, 이쪽이에요, 이쪽. 여기 나무 위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움직이니 나뭇가지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있었다. 새는 노란색 부리를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반가워요.”
“······넌 뭐냐?”
“저요? 보시는 것처럼 작은 새랍니다.”
그래, 내가 봐도 작은 새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새가 다급하게 날갯짓을 하며 남자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어디로 가세요?”
“넌 날 왜 따라오는 거냐?”
“당신을 찾아다녔으니까요.”
“날? 새가?”
“그럼요. 제법 힘들었다고요. 중간에 그만 둘까 생각도 했는데 말하는 검과 함께 다니는 떠돌이 용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여기까지 날아왔죠.”
“사람 잘못 본 거다.”
“아니요, 제대로 봤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 모습이 어때서.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금색 머리카락, 다부진 체격, 큰 키, 엄청난 괴력. 내가 찾는 사람과 똑같아요.”
남자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새를 쳐다보았다. 은색의 깃털, 보라색 눈.
“······너.”
“자, 걸음을 멈추지 말고 쭉 가자고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명랑하게 지껄인 새가 짹짹 소리를 냈다. 남자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부지런히 걸어서 언덕을 하나 넘은 후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혔다. 그가 보는 곳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저곳인가요? 당신이 가려는 곳이?”
“그래.”
남자가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마을에 가까워지자 밭일을 하던 농부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어어 소리를 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그들을 무시하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을 아낙네들이 한데 모여서 수다를 떨다가 갑작스럽게 마을에 들어온 남자를 보고서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들의 눈은 농부들보다 더 컸다.
남자는 그들도 무시하고서 걸었다.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이 그를 보고서 도망쳤다. 작은 새가 짹짹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으시군요.”
“조용히 해.”
남자는 또 걸었다. 그는 마을을 통과해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 마주한 것은 거대한 황금의 바다였다.
“와아······.”
새가 감탄했다. 순수한 감탄이었다. 바람을 따라 흔들거리는 수많은 호밀들은 일견 황금처럼 보였다. 호밀밭은 엄청나게 컸다. 감히 사람이 경작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될 만큼.
남자는 호밀밭 근처에 있는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작지만 튼튼한 오두막이었다. 그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아마 이맘때쯤 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물이 글썽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
“제가 죽기 전에 다시 만나 뵐 수 있어서 기쁩니다.”
남자가 웃었고 순간 오두막 안에서 빛이 번쩍였다. 이제 남자의 어깨에 작은 새는 없었다. 있는 것은 요정 마법사뿐이었다.
“여기군요. 여기가 당신의 고향이로군요. 여기서 시작했고 여기서 끝내려는 거군요.”
“모두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지.”
“난 당신이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감동적인 믿음이군.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요정 마법사는, 베로니카는 물기 어린 웃음과 함께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엔디미온 씨.”
“그래, 정말 오랜만이지.”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았다가 엔디미온이 먼저 어색하게 베로니카를 밀어냈다. 베로니카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숙맥이시군요.”
“······큼.”
노인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엔디미온은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런데 왜 쫓아온 거냐?”
“섭섭한 말씀을 하시네. 바늘 가는 데 실이 빠질 수 있나요? 우리의 인연이 얕지 않으니 당연히 쫓아와야죠.”
“말은.”
베로니카가 빠르게 웃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하실 건가요? 은퇴도 했으니 여유롭게 여생을 즐길 생각인가요?”
“글쎄. 이것저것 생각해봤는데 역시 할 일은 하나뿐이야.”
“무슨 일요?”
엔디미온은 엄숙하게 말했다.
“호밀 농사.”
“아하하하!”
베로니카는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다만 엔디미온은 진지했다.
“그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이제부터 먹고 살려면 농사라도 지어야지.”
“그럼 왜 하필 호밀이에요? 다른 것도 많잖아요. 백 년 동안 호밀 농사만 지었으면서 질리지도 않아요?”
“잘하는 걸 해야지. 그래서 싫어?”
“아뇨, 저도 좋아요. 생각해보니 엔디미온 씨한테 딱 맞는 것 같아요. 암, 역시 호밀이 최고지. 왜냐하면요, 엔디미온 씨는······.”
베로니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호밀밭의 성배기사잖아요.”
엔디미온도 웃었다. 그 한 마디는 길고 길었던 여정의 종지부를 찍기에 충분했다.
[호밀밭의 성배기사] 마칩니다
- 완결 후기-
안녕하세요, 덧붙임입니다.
호밀밭의 성배기사가 200화로 완결이 났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였습니다만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부분도 많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글이지만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 있어서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다들 환절기 건강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곧 더 재밌는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덧붙임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