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절세미남 벼락부자가 돈을 숨김 1
서울 시내 모처에 이철성과 이태강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철성은 면전에 마주 앉은 태강에게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착한 우리 아들놈을 뭐하러 들쑤시는 건가?"
"청와대의 엄명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회장님."
"내 돈을 수십억이나 받아먹은 주제에, 그게 내 앞에서 할 말인가?"
"죄송합니다. 회장님."
"비겁하게 큰 아들놈을 건드릴 생각하지말고, 나에게 정면으로 직진하시게."
"큰 아드님을 회장님 대신 제물로 삼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철성은 성택을 끔찍하게 아꼈다.
그런 탓으로 태강의 조언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대선 비자금 문제를 언론에 폭로 할 수 밖에 없네."
"그 문제는 VIP와 직접 의견을 교환하시죠. 저는 혐의가 포착된 이성택 씨를 최우선적으로 조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검사의 본분인가?"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철성이 노회한 눈빛을 내비치며 넌지시 물었다.
"성택의 비자금 조성 자료를 누구한테 입수한 거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태강은 단호한 어조로 답한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이철성은 한남동에 도착하자마자 이성택을 호출했다.
얼마 후, 성택이 한남동 서재에 나타났다.
철성은 눈 앞에 서 있는 성택에게 지시를 내렸다.
"박영조를 조사해봐."
"네에...?"
"박영조를 살펴보라고."
"그게 무슨 말이죠?"
"네놈의 비자금 조성 파일이 검찰에 넘어갔어. 아무리봐도 박영조 그놈이 의심스러워."
그제야 성택의 두뇌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날 새벽.
인천 항만의 컨테이너 창고에 성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전신에 피칠갑을 둘러쓴 채, 철제의자에 결박당한 박영조를 싸늘한 시선으로 주시한 뒤, 곁에 서 있는 정강호에게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저놈한테 알아낸 사실이 있나?"
"전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박영조는 아무 것도 모르는거 같습니다."
강호는 그리 답한 뒤 의혹에 휩싸인 얼굴로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저놈의 대포폰에서 도청 장치가 발견됐습니다."
그리 말하며 손톱 크기 만한 도청 장비를 성택에게 내밀었다.
성택은 도청 장치를 살핀 뒤, 강호에게 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 박영조를 도청 한건가?"
"그런거 같습니다. 전무님."
"역추적을 해봐."
"안 그래도 수상한 봉고차를 애들이 뒤쫒는 중입니다."
"봉고차?"
"박영조의 집 근처에서 발견한 차량입니다."
***
다음날.
평창동에 정강호가 나타났다.
그는 이성택에게 긴급 보고를 올렸다.
"박영조의 폰과 자택에 도감청 장비를 설치한 배후가 밝혀졌습니다."
"그놈이 누구지?"
"미래골드 김한빈 대표의 수행기사로 알려진 놈입니다."
성택은 사건의 전모를 단박에 파악했다.
그는 곧바로 한남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택은 한남동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이철성에게 자초지종을 소상히 보고했다.
철성이 진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김한빈이라는 놈이 너의 비자금 자료를 검찰에 넘겼다는 말이냐?"
"확실합니다. 더군다나 그놈은 대검 특수부 총괄 부장인 이태강의 매제로 알려진 놈입니다. 그 두놈이 편을 먹고 저를 작살내려는 겁니다!"
성택이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런 탓일까, 철성의 분노지수 역시 덩달아 급상승했다.
"김한빈과 이태강 두놈을 반드시 요절내 버릴테다!"
"아버지. 이태강은 현직 특수부 총괄부장입니다. 손을 대기가 쉽지 않다고요."
성택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일단 김한빈 먼저 손을 보는게 어떨까요?"
철성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김한빈, 그놈을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려!"
"예. 아버지."
***
고즈넉한 공원에 정강호와 30대 남자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벤치에 자리한 채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0억을 일시불로 주십시오. 물론 현찰로 주셔야 합니다."
정강호가 즉답했다.
"내일 이 시간에 돈을 갖고 오지."
"그럼 내일 다시 만납시다."
남자는 그리 말하며 장내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다음날.
정강호는 남자에게 현찰 10억을 지불한 뒤, 성택의 대포폰으로 한통의 전화를 걸었다.
***
미래골드 마포 사옥.
사무실의 창가를 서성이며 줄담배를 말아올렸다.
미래골드의 5호 6호 펀드의 수익률이 2조원대로 불어났다.
그 덕분에 내 재산은 13조원에 육박할 지경이었다.
허나, 모든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내 재산이 금융권에 고스란히 드러난 덕분에, 국세청에서 조단위의 세금을 부과한 탓이다.
또한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에서 연일 수백 수천억에 달하는 금품을 요구했다.
골이 지끈지끈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런 탓일까, 미래골드의 본사를 조세회피처로 이전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허나, 그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래골드의 수익이 국세청과 금감원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탓이다.
애당초 검은머리 외국계 자금으로 위장한 후, 미래골드를 설립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국세청에서 조단위의 세금을 추징 당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에서 돈 달라고 떼를 쓰는 일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만시지탄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그 후, 17층에 위치한 VIP 라운지로 내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달달한 칵테일을 음미하기 위함이었다.
VIP 라운지에 들어서자 여직원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지금은 오전 9시 무렵이었다.
그런 탓인지 라운지는 아직 정리정돈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라운지 테이블에 좌정한 뒤 김소정이란 이름표를 가슴에 부착한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하와이안 블루 한잔 부탁해."
그녀가 다소곳이 화답했다.
"예. 대표님."
***
시내 모처에서 조중동 관계자와 이태강이 만남을 갖고 있었다.
조중동 관계자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대영그룹 총수 일가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대영그룹은 대한민국의 경제를 견인하는 그룹입니다."
"우리 일에 적극 협조해 주신다면, 차기 검찰 총장으로 밀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태강의 얼굴에 극심한 갈등이 번갈아가며 교차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조중동 관계자에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백기투항했다.
"원하시는 대로 사건을 덮겠습니다. 대신 약속을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후, 그들은 각자의 갈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
내 집에 연락도 없이 이태강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이성택의 일은 그냥 잊는게 어때?"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이성택을 법적으로 단죄하는 게 쉽지 않을거 같다."
"비자금 조성 자료를 넘겨드리지 않았습니까?"
"정치권과 언론에서 압력이 너무 심해. 미안하지만 내 힘으로도 어쩔수 없는 일이야."
태강은 그 말을 끝으로 내 집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다음날.
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태강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그는 생각 외로 간사한 남자였다.
정치권과 언론을 핑계로 나와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실망스러운 심경이었다.
내가 그를 너무 높이 본 모양이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나 홀로 이성택을 단죄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 무렵, 나를 태운 마이바흐 리무진이 회사 정문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보안 요원이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로비로 들어섰다.
***
그날 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박종태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허나, 그는 내 전화를 끝내 받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바로 그때, 반대쪽 차선에 대형 덤프 트럭이 나타났다.
덤프 트럭은 눈깜빡할 새에 중앙 차선을 침범하자마자 마이바흐를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순간 마이바흐가 실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난간의 가드레일을 훌쩍 넘어 한강 물 속으로 순식간에 추락했다.
나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였다.
극심한 통증이 전신에 엄습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모든 고통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쾌적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내 영혼이 밤하늘로 휘영청 날아올랐다.
그때, 덤프 트럭 운전기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놈은 사건 현장에서 3킬로 떨어진 지점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인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1시간 뒤.
트럭 기사는 인천 항만의 컨테이너 창고로 들어갔다.
익숙한 곳이었다.
내가 총맞아 죽은 바로 그 곳이었다.
컨테이너 안에는 이성택의 해결사가 트럭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한남동으로 날아갔다.
영혼 상태라 그런지 생각과 동시에 한남동에 도착했다.
흔히 말하는 사속(思速)의 스피드였다.
서재로 들어서자 이철성 회장과 이성택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 보였다.
이철성이 넌지시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됐느냐?"
성택이 즉답했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가장해서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철성의 얼굴에 야비한 미소가 드러났다.
"뒷탈이 없도록, 청부업자도 같이 처리하거라."
"정강호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이 회장과 이성택은 타고난 악인이었다.
부전자전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찰나, 두눈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졌다.
동시에 무저갱 같은 깊은 잠 속으로 저절로 빠져들었다.
***
눈을 뜨자 병원 응급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직후 간호사 아가씨가 내 앞에 나타났다.
잠시 뒤, 응급실 닥터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익숙한 얼굴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나는 또 다시 20년전 그날로 회귀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혹시나 하는 심경에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에서 김한빈의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예상대로였다.
지금은 2000년 1월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김한빈으로 빙의환생했다.
허탈한 심경이었다.
복수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재벌 노릇마저 제대로 못한 탓이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무렵, 보험사 직원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어조로 이런저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의중을 밝혔다.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파요. 그리고 머리도 어지러운게 골병이 심하게 든거 같습니다."
그러자 보험사 직원이 쓴 웃음을 지으며 의례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일단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시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날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한편 목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천만원에 달하는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다시 한번 주식 투자에 나설 계획이었다.
예전처럼 알바로 돈을 모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 몸을 쓸데없이 혹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달 후.
병원의 휴게실에서 흡연을 즐기는 한편, 이철성과 이성택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나는 바보처럼 정체를 드러낸 채, 그들 부자에게 칼날을 내밀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고용한 청부업자에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들 부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내 정체를 철저히 숨겨야 한다.
놈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나 또한 놈들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게 최선이었다.
법에 연연할 경우 도리어 내가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외국계 사모펀드로 돈을 모은 후, 해결사를 고용해서 놈들의 명줄을 끊는 게 상책이었다.
다음날.
보험사에 두부외상과 허리디스크, 목디스크 소견서가 상세히 적혀있는 진단서를 제출했다.
그런 탓일까, 보험사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날 오후에 나를 찾은 것이다.
보험사 직원이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2천5백만원에 합의를 보시죠."
"최소 4천만원 이상은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건 힘들어요. 솔직히 말해서 3천만원이 마지노선입니다."
결국 보험사와 3천만원에 합의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은행을 찾았다.
그 후, 보험사에서 입금한 3천만원을 달러화로 교환했다.
다음날.
미국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조세회피처에서 사모펀드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며칠 뒤.
케이맨 제도의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영국계 은행을 방문했다.
은행 직원에게 말했다.
"사모펀드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그리 말하자 은행원이 노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밀 계좌도 필요하시겠군요?"
"당연히 비밀 계좌도 만들 생각입니다."
"비밀 계좌 개설 비용과 50년치 보관 비용으로 1만2천 달러를 선불로 지급해 주십시오."
그의 말은 계속 됐다.
"그리고 사모펀드 설립 비용 5천불을 추가로 지불 하십시오."
한화로 2,000만원에 육박하는 돈이었다.
나는 그날, 케이맨 제도의 영국계 은행에서 '타지마할 사모펀드' 설립과 비밀 계좌 개설을 일사천리로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