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공격적인 인수합병 1
다음날 오후.
워싱턴 플라자 호텔에서 휴식을 취할 무렵, 초인종 소리가 울려퍼졌다.
문을 열자, 정장룩 차림의 에바가 내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 사랑해. 자기야."
그녀는 내 품안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사랑의 세레나데를 쉴 새 없어 읇조렸다.
곧바로 격정적인 애정행각에 몰입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킹사이즈 더블침대에서 한몸처럼 화신한 채, 이런저런 대화를 길게 이어나갔다.
그러기를 얼마 후, 그녀에게 속엣말을 꺼냈다.
"월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소개해줄래?"
그녀가 두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고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내 남편이 월가에서 펀드매니저로 활동 중인데, 그이를 소개시켜줄까?"
"조금 그런데..."
말끝을 흐리자,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남편은 자기와 내 사이를 전혀 몰라. 그러니까 부담갖지 말고, 그냥 만나봐."
"그래도 될까?"
"왜? 그 사람한테 우리 관계를 들킬까봐 겁이라도 먹은거야?"
에바는 생각외로 대담한 여성이었다.
그런 탓인지 아무런 걱정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레 겁먹지 말고, 그이를 한번 만나봐. 자기한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거야."
결국 그녀의 말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채 호텔을 나섰다.
그 후, 벨보이가 잡아준 택시를 타고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지배인이 내 앞을 막아섰다.
"예약을 하셨나요?"
"네. '크리스 킴'이라는 이름으로 예약을 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지배인은 예약명부를 확인한 뒤 창가 쪽에 위치한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10분 뒤, 에바의 남편인 건장한 체격의 몽고메리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악수를 교환한 후 곧바로 저녁식사에 돌입했다.
잘 익은 스테이크와 포도주를 번갈아 음미하던 몽고메리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넌지시 물었다.
"에바의 절친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에게 대충 답했다.
"남들이 그리 말하더군요."
"에바와 언제 친해지신거죠?"
중요한 순간이었다.
말한마디라도 잘못할 경우, 그가 우리 관계를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탓에, 나름 신중한 어조를 내뱉었다.
"에바가 옥스포드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왔을 때, 많이 친해졌습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물었다.
"크리스는 아직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죄송하지만 제 나이는 금년에 35살입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몽고메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원래 동양인들은 겉으로 봐서는 나이를 알 수 없습니다. 거의 대다수 동안이거든요."
녀석이 납득한 얼굴로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이제 본론으로 진입할 차례였다.
가죽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몽고메리가 호기심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뭐죠?"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한국의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에 투자한 미국과 영국의 사모펀드 명단입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이걸 저에게 보여주시는 의도가 뭡니까?"
"대영전자와 자동차의 주식을 매각할 의향이 있는 사모펀드 관계자와 다리를 놔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거액의 수수료를 지불할 의향이 있습니다."
몽고메리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건넨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 뒤, 그의 입에서 긍정적인 어조가 흘러나왔다.
"에바의 절친이시니, 제가 책임지고 알아보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힘차게 마주 잡은 뒤 레스토랑을 나란히 빠져나왔다.
***
몽고메리는 전 세계 최고의 자산운용사인 블랙스톤에서 펀드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미국과 영국의 사모펀드에 대해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에바의 절친인 크리스 킴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가 크리스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신신당부한 탓이다.
몽고메리는 블랙스톤의 맨해튼 본사에 들어서자마자 여비서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에 있는 사모펀드 관계자들과 면담 일정을 잡아봐."
"네. 보스."
그는 여비서에게 지시를 내린 뒤, 크리스에 대해 생각했다.
몽고메리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크리스를 보자마자, 에바와 깊은 관계라는 사실을 첫눈에 알아챘다.
그녀가 좋아하는 외모와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에바의 남자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는 에바의 이상형이었다.
몽고메리는 그렇게 확신했다.
허나, 그는 소모적인 질투심에 별로 사로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 부부는 정략으로 결혼한 사이였다.
그런 탓으로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 터치하지 않기로 오래전에 합의를 본 상황이었다.
에바는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목표로 하고 았었다.
그리고 몽고메리는 월가를 휘어잡는 최고의 거물을 꿈꾸고 있었다.
나름 죽이 잘맞는 커플이었다.
***
워싱턴 플라자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서자마자 응접실에 놓여진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상에 자리를 잡은 뒤 노트북을 켰다.
그 후, 뉴욕 증시에 접속했다.
내가 투자한 종목의 시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구글과 애플, MS, 아마존, 넷플릭스의 주가 그래프는 큰 폭의 우상향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내 주식평가금액은 한화로 거의 14조5천억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차익을 실현할 시점이었다.
다음날.
메릴린치 증권사의 맨해튼 본사를 방문했다.
VIP 라운지에서 다과를 즐기는 한편, 담당자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타지마할과 킬리만자로, 키나발루,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K2 사모펀드가 보유한 구글,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MS 등의 주식을 전량 장내 매도해 주십시오."
담당자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내 결심은 확고부동합니다. 그러니 내 말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주식이 처분되는 즉시 타지마할과 킬리만자로, 키나발루,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K2 사모펀드 계좌로 각각 20억불(2조4천억)을 이체하십시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플라자호텔 스위트룸.
응접실 책상에 좌정한 채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타지마할을 비롯한 6개의 사모펀드 계좌에, 각각 20억불에 달하는 자금이 예치되었다.
한화로 14조5천억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리고 한국의 증권 계좌에도 8천억 상당의 자금이 있었다.
모두 합할 경우 15조3천억 정도였다.
내 전재산이었다.
나는 15조3천억 전액을 대영전자와 자동차에 배팅할 계획이었다.
당연히 미국과 영국계 투자사를 적극 활용할 생각이었다.
내 정체를 철저히 숨기기 위함이다.
대영전자와 자동차의 공격적인 인수합병이 선언되면, 그들 두 회사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명약관화했다.
이철성은 주식 방어를 위해, 막대한 사내유보금을 자사주 매입에 전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나는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할 계획이었다.
이철성을 열받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
늦은밤.
플라자호텔 스위트룸에 에바가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격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우리는 곧바로 침대로 이동했다.
열정적인 시간을 오롯이 만끽한 뒤 에바를 품에 안은 채 나직한 어조를 흘려보냈다.
"몽고메리가 우리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까?"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기는 신경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그이도 다른 여자가 있으니까."
"그 말이 정말이냐?"
"응. 원래 우리 부부는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아."
놀라운 얘기였다.
"그러니까 자기는 아무 신경쓰지말고, 나한테만 집중해 달라고."
에바는 그리 말하며 내 입술에 사랑스러운 키스를 선사했다.
다음날.
에바와 함께 호텔을 나섰다.
그녀는 오늘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하원 청문회에 나설 예정이었다.
촉망받는 신진 정치인답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청문회에, 민주당을 대표해서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이별키스를 선사하자, 울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매달 한번씩 워싱턴에 와주면 안될까?"
그녀는 나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시간을 내볼게. 그러니까 너무 울상짓지마라."
"고마워. 그럼 나중에 봐. 빠이."
에바는 아찔한 뒷태를 과시하며 저 멀리 사라져갔다.
곧바로 주변을 배회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몽고메리가 소개해준 사모펀드 관계자들과 연쇄 미팅이 잡혀있었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지배인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그에게 '크리스 킴'이라는 이름을 밝히자 구석에 위치한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장년의 백인 남성이 나홀로 파스타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왼손을 쭉 내뻩었다.
왼손잡이인 모양이었다.
악수를 교환한 뒤 맞은편에 앉았다.
영국식 악센트가 섞인 유창한 영어로 내 용건을 밝혔다.
"귀하가 운영하는 사모펀드가 대영전자의 지분을 4.0% 안팎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할 말이 뭐요?"
"시세보다 5% 높은 가격에 대영전자의 지분을 전량 매입하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최소 10% 이상의 프리미엄을 보장해 주십시오."
남자는 내가 제시한 프리미엄보다 두배 이상의 가격을 원하고 있었다.
대영전자의 시가총액은 150조원 내외였다.
4%에 달하는 지분을 시세대로 구입할 경우 6조원만 지불하면 된다.
허나, 10%에 육박하는 프리미엄을 보장할 경우, 최소 6조6천억에 달하는 자금이 필요했다.
나는 쓸데없이 거래를 질질 끄는 걸, 제일 싫어했다.
뭐든지 속전속결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그런 탓에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좋습니다. 원하시는대로 10%에 육박하는 프리미엄을 제공하겠습니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내일 오후 2시까지, 칼야이칸 사모펀드 빌딩으로 변호사를 대동하고 찾아오십시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장내를 재빨리 빠져나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벗어나자마자 또 다시 택시에 몸을 실었다.
"맨해튼으로 가주십시오."
"네. 손님."
나를 태운 택시가 블랙스톤의 맨해튼 본사 빌딩 앞에 멈춰섰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몽고메리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 후, 1층 로비로 들어갔다.
몽고메리가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크라우드 사모펀드 관계자가 내 사무실에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달하자, 그가 만족한 얼굴로 나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했다.
우리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36층에 멈췄다.
몽고메리의 사무실이 있는 층이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백인 남자가 보였다.
몽고메리가 그를 소개했다.
"크라우드 펀드의 조쉬 회장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크리스 킴이라고 합니다."
조쉬와 악수를 교환한 뒤 곧바로 용건을 밝혔다.
"회장님이 보유하신 대영자동차의 지분 3.8%를 저에게 전량 매도해 주십시오."
그가 노회한 눈빛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최소 13% 이상의 프리미엄을 제공해 주셔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10%를 한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호하게 그리 답하자, 조쉬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머리를 끄덕거리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좋소. 원하는대로 10%에 달하는 프리미엄으로 합의를 봅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