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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44화 (44/175)

44화 거침없이 내달린다 3

대송빌딩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운전석의 차동연 대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디 대학을 나오셨죠?"

그가 공손히 즉답했다.

"한국외국어대를 나왔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셨군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호텔에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 거죠?"

"영업파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영어를 잘하시나요?"

"조금 합니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남자 같았다.

그 무렵, 차창 밖으로 대송빌딩의 전경이 들어왔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금세 도착한 모양이었다.

차에서 내린 뒤 그에게 말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대기하십시오."

"예. 대표님."

차동연을 뒤로한 채 1층 로비로 들어갔다.

탑층에 올라가자 장동현과 박은영, 이수경이 분주하게 일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70개에 달하는 업무용 빌딩과 호텔을 관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들과 인사를 교환한 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고풍스런 책상에 좌정한 채 벽면을 장식한 대화면 TV에 이목을 집중했다.

뉴스에서는 수십여 건에 달하는 살인교사 혐의를 받는 이성택의 동정을 쉴 새 없이 내보내고 있었다.

-이성택의 살인교사 혐의를 수사 중인 대검 특수부는 공범인 정강호에게서 주요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반면 이성택 측 변호인은 살인교사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정강호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검 관계자는 거의 모든 증거를 확보했다며, 이성택에게 중형을 선고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중략...

알수 없는 불안감이 내면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검찰에는 이철성의 장학생들이 부지기수로 널려있었다.

대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심 그 점이 우려됐다.

불안한 심경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뒤 이수경에게 인터폰을 넣었다.

인터폰에서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수경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장동현 법무실장을 호출하세요."

-네. 대표님."

잠시 뒤 장동현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70여개 업무용 빌딩의 임대 수익과 제반 경비 항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 놓은 뒤,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임대수익을 예치하는 은행이 어디죠?"

그가 즉답했다.

"동아은행과 한일은행 두군데에 분산 예치하고 있습니다."

"두 은행의 계좌에 예치된 잔액을 말씀해 보십시오."

"모두 합해 2,300억원 안팎입니다."

"두 은행에 예치된 자금을 오늘 중으로, 시티은행 강남점의 히말라야 인베스트먼트 계좌로 전액 이체하세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를 내보낸 뒤, 시티은행 강남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히말라야 계좌에 예치된 잔액이 얼마죠?"

-총 3,700억 가량입니다.

"오늘 중으로 2,300억 정도가 추가로 이체될 예정이니까, 이체가 완료되는 즉시 5,800억원을 히말라야의 증권계좌로 옮겨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표님.

통화를 끊은 뒤 사무실을 유유히 벗어났다.

***

이철성은 한남동의 서재를 서성이며, 이성택을 구해낼 방법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그는 성택을 결코 포기 할 수 없었다.

뿌리깊은 유교사상을 갖고 있는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집안의 장손인 성택을 구하려는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때, 철성의 뇌리에 특수부의 실권자인 이태강의 욕심 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 뒤, 그는 태강에게 한통의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한남동에 이태강이 나타났다.

연미복 차림의 집사가 그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이철성 회장은 접견실에 나타난 이태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정강호의 입을 막아준다면, 검찰총장을 능가하는 화려한 미래를 책임지고 보장해 드리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태강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이 회장의 입에서 결연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당신을 대권주자로 키워주겠다는 뜻이오."

태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다음날.

태강은 거구의 대검 수사관인 김찬성을 시내 일식당으로 호출했다.

그는 면전에 마주앉은 김찬성에게 거액의 돈봉투를 내밀었다.

"자녀들의 학자금에 보태 써."

찬성이 감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잠시 후, 그들은 본격적으로 술자리를 즐겼다.

태강은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정강호 한놈 때문에 국가경제가 말이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 대영그룹은 한국 경제를 책임진 것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저 역시 부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찬성이 그리 화답하자 태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전에 대검에서 취조를 받던 기업인이 창문에서 뛰어내린 사건을 기억하나?"

"네. 기억납니다."

태강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직후, 그의 입에서 서늘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정강호도 그런 식으로 자살해주면 좀 좋아. 안그런가?"

순간 찬성이 흠칫한 얼굴로 술잔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 태강의 냉정한 목소리가 장내에 재차 울려퍼졌다.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해 준다면, 자네의 앞길을 내가 보장하지. 잘 생각해 보라고."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박영조는 인사동의 사무실에서 대필 전문가인 유성엽과 만남을 가졌다.

그는 유성엽에게 정강호의 친필이 적혀있는 수첩을 내밀었다.

잠시 뒤, 본격적인 유서대필 작업이 시작됐다.

대필작업이 끝나자, 박영조가 유성엽에게 돈봉투를 건넸다.

"당분간 동남아에서 휴가나 즐기라고."

그리 말하며 사무실을 바람처럼 빠져나왔다.

그날 밤.

이철성은 한남동의 서재를 서성이며, 초조한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박영조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조는 그에게 A4 용지 한장을 공손한 자세로 전달했다.

이 회장은 A4 용지를 자세히 살핀 뒤, 흡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태강에게 정강호의 유서를 전달하게."

"예. 회장님."

***

김찬성은 전직 유도국가대표 출신이었다.

태강은 일선 지검에 있던 그를 대검으로 불러올렸다.

쓸모가 많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런 탓일까, 찬성은 태강의 오더를 거부할 수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수십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연쇄살인마였다.

그런 이유로, 기회를 봐서 정강호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후.

찬성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태강은 그에게 정강호의 신병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겼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찬성은 취조실에서 조사를 끝마친 정강호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그 후, CCTV 사각지대에 위치한 창가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찬성은 담배곽에서 담배 한개피를 꺼내서 정강호에게 내밀었다.

"담배나 한대 펴라."

미칠 듯한 흡연 욕구에 시달리던 강호 입장에서는 가뭄 끝에 만난 단비와 같았다.

그런 탓에, 별다른 의심 없이 담배를 재빨리 입가에 물었다.

바로 그때, 그의 등뒤에 서 있던 찬성이 허리에 매어진 포승줄을 강하게 조이며, 들어매치기 방식으로 강호를 눈 깜짝할 새에 창문쪽으로 내던졌다.

전직 유도 국가대표 출신인 찬성의 강력한 들어매치기였다.

당연히 강호는 변변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한 채, 곧바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

대송빌딩 사무실에서 국내 IT와 바이오 업종의 주식을 무차별적으로 매집할 무렵, 벽면을 장식한 TV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대검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 정강호가,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검 관계자는 정강호가 7층 복도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그가 대검에 오기전 작성한 자필 유서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중략...

작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뉴스 속보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철성과 이태강이 암중에서 비열한 수작을 부렸음을.

검찰은 모든 죄를 정강호에게 뒤집어 씌울 속셈이었다.

그 후, 이성택을 불기속 기소할 것이 불보듯 훤했다.

그런 탓일까, 전신에 허탈한 심경이 급속도로 번져갔다.

내 모든 노력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곧바로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차동연이 나를 반겼다.

그는 부가티 베이론의 조수석을 정중한 자세로 연 뒤, 내 심기를 살폈다.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운전석의 차동연에게 지시를 내렸다.

"신사동 쪽에 있는 정글짐 체육관으로 갑시다."

"네. 대표님."

30분 뒤.

정글짐 체육관에 도착하자마자 차동연을 뒤로한 채 탈의실로 들어갔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환복한 뒤 곧바로 샌드백 쪽으로 다가갔다.

그 후, 성난 주먹과 발길질을 샌드백에 폭풍처럼 박아넣었다.

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펑...!!

3시간 연속으로 샌드백을 학대하자, 그제서야 어느 정도 울분이 가라앉았다.

땀을 비오듯 쏟으며 매트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웠다.

체육관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성택을 때려잡을 묘안을 쉼 없이 궁리했다.

하지만, 이렇다할 아이디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정공법'이란 단어가 뇌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정공법은 말그대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였다.

나는 그 동안 법과 해결사의 도움을 받아서, 이성택을 처리하려고 했다.

물론 그런 내 노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상태였다.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직접 이성택을 때려죽이는 게 최선이었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나만큼 이성택을 싫어하는 이성모가 생각났다.

놈의 도움을 받는다면 내 목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거 같았다.

***

나는 지난 3일 동안, 학교와 회사를 모두 거른 채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에서 두문불출했다.

오늘도 삼시세끼를 호텔음식으로 때우며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밤 10시 무렵, TV 속보가 방영되었다.

-수십여 건에 달하는 살인 교사 혐의로 대검에서 강도높은 조사를 받던, 이성택 대영그룹 부회장이 방금전 자택으로 귀가했습니다.

-대검은 주요 용의자인 정강호가 자살했고, 그의 유서에서 자신이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한 점을 들어, 이번 사건을 종결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이성택 대영그룹 부회장의 살인교사도 혐의없음으로 종결했다고 전했습니다. 중략...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미 예상한 일이라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 무렵, 이성모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 앞에 나타난 그를 홈바로 이끌었다.

우리는 캔맥을 즐기며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성모에게 내 진심을 솔직히 밝혔다.

"저는 이성택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냐?"

"네. 그래서 형님에게 일부러 접근했습니다. 이성택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형님도 이성택에게 원한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모가 흠칫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개자식이 형님의 어머님을 창녀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님 역시 더러운 창녀아들이라고..."

"그만!"

그가 분노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직후 나를 맹렬히 노려보며 버럭했다.

"아무리 동생이라해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두번 다시 입에 담지마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성택을 죽일 생각입니다. 그러니 형님이 도움을 주십시오."

태연히 그리 말하자, 성모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형님도 이성택을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거 아닙니까?"

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성모는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조만간 이성택은 해외로 도피성 외유를 떠날 겁니다. 저는 그때를 노릴 계획입니다."

그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놈을 해외에서 죽일 생각인가?"

"네."

짤막하게 대꾸하자, 그가 언제 화를 냈냐는듯 기대만발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진심으로 놈을 죽일 계획이냐?"

"몇번을 말해야 합니까? 반드시 이성택을 내 손으로 죽여버릴 겁니다. 그러니까 형님은 놈의 동선이나 파악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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