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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46화 (46/175)

46화 이이제이(以夷制夷) 1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올블랙으로 도배한 채 한남동에 위치한 상지원을 방문했다.

이 곳은 대영그룹의 귀빈들을 접대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오늘 이 장소는 이성택의 조문실로 활용되고 있었다.

1층에 위치한 조문실로 들어서자 정재계와 관계의 내노라하는 거물들이 운집한 채, 이성택에게 차례로 조문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장면을 유심히 주시할 찰나, 검은 상복 차림의 그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서연이었다.

그녀는 슬픈 얼굴로 조문객들을 일일이 접대하고 있었다.

그런 탓일까, 갑자기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은 야만스런 욕망에 불타올랐다.

빌어먹을 이성택을 위해, 눈물 흘리는 이서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검은 양복 차림의 이성모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해맑은 얼굴로 말을 걸었다.

"와줘서 고맙다. 하하..."

표정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위인이었다.

나직한 어조로 그에게 충고했다.

"웃지 마십시오. 형님."

순간 그가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성모와 조문실 안으로 들어갔다.

위패 옆에 서 있는 이서연과 성택의 이복형제들을 상대로 맞절을 올린 뒤, 지옥행 특급 열차에 올라탄 개자식에게 분향을 올렸다.

조문실 옆에 위치한 식당에서 얼큰한 육개장을 안주삼아 소주를 연신 입가에 가져갈 무렵, 성모와 그의 지인들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교환한 뒤 본격적인 술판을 이어갔다.

그날 밤.

거나한 취기에 휩싸인 채 상지원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나를 발견한 차동연 대리가 부가티의 조수석을 정중히 열어주었다.

그에게 목례를 한 뒤 조수석에 올라탔다.

직후 나를 태운 부가티가 강남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

학교갈 채비를 하는 한편, 아침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강남과 분당, 목동, 과천 등지의 아파트 가격이 평당 4천만원을 돌파했습니다. 사상유래없는 부동산 폭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다주택자와 고가 주택 보유자에게 징벌적인 종합부동산세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공급 확대없는 규제 일변도 조치로는, 강남과 목동의 아파트 가격이 절대 잡히지 않을거라고 입을 모아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략...

전문가들의 말처럼 정부는 신규 아파트 공급을 꽁꽁 틀어막은 채, 규제일변도의 부동산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는 것이다.

허나, 정부의 부동산 정책 담당자들은 서울과 먼 수도권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아파트 가격을 잡으려 하였다.

낙후된 강북 지역을 뉴타운으로 지정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할 경우, 강남과 서울 아파트 가격이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을 거라는 사실을 자기들만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나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이었디.

당연히 내 관심은 온통 오피스 빌딩의 가격 상승폭에 쏠려 있었다.

강남과 목동 아파트로 재미를 본 거대 투기세력들은, 서울 요지의 업무용 빌딩으로 관심을 옮겨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내가 소유한 오피스 빌딩의 매입 문의가 날마다 빗발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업무용 빌딩을 처분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업무용 빌딩의 가치가 급등하는 2006년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

청바지와 티셔츠를 걸쳐 입은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1층 로비를 이용하고 싶었지만, 호텔 임직원들과 손님들에게 불편함을 초래하는 관계로, 부득이하게 지하 주차장을 이용했다.

나름의 배려지심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자 주차 관리원이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나를 향해 절도있게 경례를 올려부친 뒤, 애마들이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에게 목례를 취한 뒤 부가티 베이론에 몸을 실었다.

나는 이제 운전공포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 탓에 차동연 대리를 원래 보직으로 원상복귀시켰다.

쓸데없이 폐를 끼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부가티의 운전석에 착석한 뒤 엑셀을 힘차게 내리밟았다.

직후 나를 태운 부가티가 전방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서울대학교에 도착한 뒤 주차장에 부가티를 파킹시켰다.

그 후, 의대 건물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늘은 학기말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선 후 학기말 시험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학기말 시험을 끝마친 뒤 타팰 펜트하우스로 직행했다.

펜트하우스에 홈바에서 나홀로 칵테일을 즐기며 이성모 일행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이성모와 그의 지인들이 내 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곧바로 홀덤 포커에 돌입했다.

1인당 10억원의 판돈을 걸고 하는 게임이었다.

그런 탓인지 테이블 위에는 금세 돈다발이 수북이 쌓였다.

***

오늘의 최종 승자는 재계서열 20위권인, 태산그룹의 후계자인 최종연이었다.

녀석은 60억에 달하는 현금을 모조리 싹쓸이했다.

종연은 입이 귓가에 내걸린 채, 좋아죽는 얼굴로 커다란 가죽 가방에 돈다발을 쓸어담았다.

그런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시하던 이성모가 퉁명스런 어조로 핀잔을 날렸다.

"씨발놈아. 선수가 왜 아마추어 판데기에 낀거냐? 이 좆같은 자식아!"

그러자 종연이 어색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냥 오늘 운이 좋았을 뿐이라니까. 성모야. 나 정말 선수 아니다. 믿어주라. 제발!"

허나, 그는 이미 성모의 눈 밖에 난지 오래였다.

"좆같은 헛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꺼져! 개자식아!"

그리 말하며 종연을 내 집에서 강제로 내쫒았다.

성모는 누가 자기 돈을 따먹는 걸, 당최 용납 못하는 성격이었다.

졸장부의 표본이었다.

그는 종연을 내쫒은 뒤 나를 테라스로 이끌었다.

성모가 곤혹스런 얼굴로 속엣말을 꺼냈다.

"내 이복동생 중에 이성준이란 놈이 있거든."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놈한테 성택이 놈이 갖고 있던 대영전자와 자동차의 지분을 모두 넘겼다고 하더라."

대영그룹 후계자 구도에 새로운 복병이 출현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그놈에게 대영전자와 자동차를 물려주려는 것 같아. 사실상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눈치야."

이성준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다.

그는 이철성 회장의 자녀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인물이었다.

성준은 자기 힘으로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지금은 대영전자의 핵심 조직인 미래전략실을 책임지고 있었다.

당연히 이 회장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있었다.

반면, 이성모는 공부머리가 빵점 수준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돈만 주면 아무나 들어가는 무늬만 대학교를 졸업한 케이스였다.

성모가 애절한 얼굴로 말했다.

"동생이 나를 좀 도와줘야 할거 같다."

그가 울듯한 얼굴로 나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한심한 작자였다.

하지만 그는 이용가치가 많았다.

내 복수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악의 화신인 이철성 회장이 여전히 건재한 탓이다.

문득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고사성어가 뇌리를 스쳤다.

이이제이는 오랑캐를 이용하여, 또 다른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 이철성과 성모는 모두 오랑캐나 마찬가지였다.

성모가 자기 부친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 광경이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그런 탓일까,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나직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내일 밤에 대영호텔 강남점으로 오십시오. 그 곳에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봅시다."

그러자 성모가 감격한 얼굴로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

밤 10시 무렵.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에 이성모가 나타났다.

우리는 홈바에서 가벼운 칵테일을 즐기며 본론에 돌입했다.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요즘 강남 아파트로 재미를 많이 보셨다면서요?"

"모두 동생 덕분이지. 나중에 크게 한 턱 쏠게."

"말로만 그러시지 마시고, 뭔가 확실한 보답을 해주십시오."

"원하는 게 뭔데? 저번처럼 톱 여배우를 붙여줄까?"

"여배우는 됐고, 이서연한테 조금 관심이 있습니다."

순간 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서연을 사적으로 아는 거야?"

"그건 아니고, 조문 갔을 때 봤는데 비쥬얼이 마음에 들더군요. 내 스타일이었습니다."

성모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여자한테 쓸데없이 눈독 들이지마라. 아버지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여자니까."

"그래봤자, 골키퍼 없는 과부 신세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흐렸다.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킨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모습에 성모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동생이 원한다면, 내가 자리를 한번 만들어볼게."

"아니, 됐습니다. 내가 뭐가 아쉽다고 과부를 만납니까? 그냥 해본 소리니까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성모가 반색하는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동생처럼 잘난 남자는 20대 초반의 미녀를 만나는 게 제격이라구."

그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내 친여동생과 한번 만나볼래?"

그에게는 20대 초반의 여동생이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성모의 여동생은 싸가지없는 왕재수 덩어리였다.

그런 기억을 상기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됐습니다. 여자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니까 형님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러자 녀석이 많이 아쉬워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를 매제로 삼고 싶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우리는 곧바로 대영그룹의 경영권 장악을 화두로 진지한 담소를 이어갔다.

"녀석의 약점을 아십니까?"

내 물음에 성모가 즉답했다.

"돈을 무진장 좋아한다는 게, 약점이라면 약점이지."

그는 뻔한 답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여자 혹은 약물과 관련된 사건사고는 없습니까?"

"녀석은 대학교 시절에 일찌감치 결혼한 이후, 바람 한번 피운적이 없어. 그래서 아버지가 좋아하는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이성준의 비자금 규모를 아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2천억 정도는 손에 쥐고 있을거야."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대영전자에서 미래전략실장으로 일하고 있으니까, 알게 모르게 많은 돈을 취급하겠지."

"미래전략실이 취급하는 자금이 어느 정도죠?"

"대영전자의 투자금을 조성하고 집행하는 부서니까, 아무리 못해도 조단위는 넘을거야."

쓸만한 그림이 머리속에 절로 그려졌다.

"녀석에게 내 존재를 넌지시 흘리세요."

"그말이 무슨 뜻이지?"

"형님이 저 때문에 떼돈을 번 사실을 솔직히 말하라고요."

그제야 성모가 납득한 얼굴로 머리를 정신없이 끄덕거렸다.

직후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녀석의 비자금을 털자는 말인가?"

"네. 그런 식으로 이 회장의 신임을 잃게 만드는 겁니다."

"우와! 역시 우리 동생 밖에 없구나. 우하하...!"

그가 감탄한 얼굴로 특유의 광소를 길게 흘려보냈다.

***

경기도 인근의 골프장에 이성모와 이성준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골프를 즐기는 한편 이런저런 잡담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성모가 은근한 얼굴로 운을 뗐다.

"내 지인 중에 투자의 신이 있거든. 그 친구 때문에 내가 8천억이 넘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성준이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그래. 임마. 내가 너한테 할 일 없이 구라를 치겠냐?"

그리 말하며 주머니에서 명함 한장을 꺼내서 성준에게 내밀었다.

"관심 있으면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해봐.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알아서 돈을 불려줄거다. 우하하하..."

성모는 특유의 거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골프채를 힘차게 휘둘렀다.

딱!

***

이용문 국세청장은 외국계 사모펀드인 타지마할과 킬리만자로 인베스트먼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막대한 투자 이익을 취했음에도 세금을 거의 한푼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용문은 타지마할과 킬리만자로 인베스트먼트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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