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전부 때려잡는다 1
학교 캠퍼스에 들어서자 주변을 오가는 여학생들의 시선이 내 일신에 집중됐다.
그녀들은 내 잘생긴 얼굴과 늘씬한 기럭지, 근육질의 바디에 한눈에 반한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이 발산하는 흠모의 눈빛을 모르쇠로 일관한 채 의대 건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본과 강의실에 들어서자 여자 동기들의 애틋한 눈빛이 내 일신에 모아졌다.
반면 남자 동기 녀석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질투와 시샘이 가득했다.
내가 너무 잘난 탓이었다.
미안하다. 동기 녀석들아.
4시간 동안 이어진 강의가 끝나자마자 구내 식당으로 직행했다.
얼큰한 김치찌개로 늦은 점심을 해결할 무렵, 박종태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님에게 긴급하게 보고해야 하는 사안이 있습니다.
"1시간 뒤에 회사로 들어갈테니까, 그때 봅시다."
-예. 대표님."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대송빌딩으로 직행했다.
***
타지마할 사무실.
박종태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보고서류를 제출했다.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그에게 물었다.
"이게 뭐죠?"
"박호연 전무와 이상조 상무가 거액의 리베이트를 수수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구두로 보고하세요."
종태가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박호연 전무는 대영호텔 소공동 지점의 인테리어를 전면적으로 리뉴얼 한다는 명목으로 업자에게 12억원에 달하는 금품을 수수했으며, 이상조 상무는 호텔 조리실에 반입되는 고급 식재료를 납품업자에게 웃돈을 주고 구입하는 대가로, 7억원에 육박하는 금품을 상납받았습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중범죄였다.
곧바로 장동현 법무실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눈 앞에 나타난 장동현에게 단호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박호연 전무와 이상조 상무를 배임 횡령혐의로 경찰에 고발하세요. 그리고 민사를 걸어서 놈들이 그동안 해쳐먹은 돈을 모두 토해내게 만드세요."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장동현과 박종태를 내보낸 뒤 박은영에게 인터폰을 넣었다.
"달달한 커피 한잔 내오세요."
"네. 대표님."
***
사무실에서 커피를 음미할 무렵, 갑자기 국세청 직원들이 장내에 벌떼처럼 난입했다.
그들은 압수수색 영장을 들이밀며 사무실의 서류와 컴퓨터 하드를 제멋대로 뒤집어 엎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모양새였다.
그들의 압수수색은 밤 8시가 지나서야 종료됐다.
국세청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사라지자마자 박은영 비서실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청와대 경제수석실로 전화를 돌리세요."
"예. 대표님."
잠시 뒤, 경제수석실에 전화가 연결됐다.
곧바로 내 의중을 전달했다.
"저는 타지마할과 킬리만자로 인베스트먼트의 한국 지사 대표인 크리스 킴이라고 합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 타지마할과 킬리만자로는 한국의 자본 자유화법에 의거해 정당한 투자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귀국의 국세청에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것은 외국자본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탄압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수화기에서 중년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뭔가 오해가 있는거 같습니다. 제가 자세히 알아본 뒤 대표님에게 연락을 직접 드리겠습니다.
"만약 근거 없는 징벌적인 과세를 부과한다면, 국제 사법재판소에 한국 정부를 제소하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그에게 확실히 못을 박은 뒤 전화를 끊었다.
***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이용문 국세청장이 나타났다.
강천우 경제수석은 면전에 나타난 이용문을 격하게 질타했다.
"외국자본을 잘못 건드리면 큰 사단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저도 알지만, 그들은 수천, 수조원대의 투자수익을 얻었음에도, 세금을 거의 한푼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건 내 알 바 아닙니다. 하여튼 지금 당장 타지마할 사모펀드의 한국측 대표인 크리스 킴에게 진중한 사과를 하십시오!"
강천우가 버럭하자 이용문이 곤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뒤, 이용문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다시 한번 말하는데, 외국계 자본을 절대 건드리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마음 속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이용문은 그리 복명한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
대송빌딩.
사무실에서 커피를 음미하며 줄담배를 말아올릴 무렵, 50대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조곤조곤한 어조로 사죄의 변을 쏟아냈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대표님."
"나이깨나 잡수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앞뒤를 분간 못하시는 겁니까? IMF가 우스워 보이세요?"
"거듭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용문은 그리 말하며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마음에 드는 작자였다.
책상 서랍에서 액면가 10억원짜리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를 꺼냈다.
그 후,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에게 은근슬쩍 내밀었다.
"10억입니다. 거부하지 말고 받으세요. 깨끗한 돈이니까."
그러자 이용문이 허리를 숙인 자세로, 양도성 예금증서를 공손히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앞으로 종종 만납시다."
이용문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나를 향해 재차 허리를 숙인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사라졌다.
국세청과의 신경전을 일단락 지은 탓인지, 갑자기 맹렬한 식욕에 불타올랐다.
곧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그 뒤, 은영에게 명령을 내렸다.
"짬뽕과 짜장면, 군만두가 먹고 싶으니까 중화요리집에 배달을 시키세요."
"예. 대표님."
얼마 후, 중화요리로 배를 채운 뒤 사무실을 나섰다.
***
대영전자 미래전략실에 이성준이 나타났다.
그는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성준은 미래전략실 직원들을 동원해, 크리스 킴에 대해서 면밀한 조사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그가 투자하는 종목마다 초대박을 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그런 탓일까, 성준은 자신의 비자금 2천억과 미래전략실이 관리하는 조단위의 자금을 이용해 개인 자산을 불리기로 마음먹었다.
성준은 결심한 얼굴로,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
한남동 인근의 라운지 바에서 칵테일을 음미할 무렵, 이성모와 이성준이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칵테일을 음미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성모가 급한 볼 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모가 장내에서 사라지자마자 성준이 기다렸다는 듯 용건을 꺼냈다.
"크리스 씨에게 제 돈을 맡기고 싶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철수씨라고 불러주십시오. 그게 편하니까."
"알겠습니다. 철수씨."
그리 화답한 뒤 재차 말을 이었다.
"제가 관리하는 돈이 1조7천억 안팎입니다. 그 돈을 석달안에 2조원 이상으로 불려주시면 섭섭치 않게 사례를 해드리죠."
그에게 원론적인 답변을 했다.
"투자는 손실을 볼때도 있고, 차익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감안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빈씨를 믿습니다. 그 동안 손대는 종목마다 백전백승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에 대해서 나름 상세한 조사를 끝마친 모양이었다.
그의 말이 계속 됐다.
"석달 안에 2조원 이상으로 불려주시면 300억을 성공사례금으로 지불하겠습니다."
이성준은 그물에 걸린 애처로운 물고기 신세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돈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흐려진 탓이다.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뒤로 한발 빼는 듯한 언사를 흘리자, 그가 다급한 얼굴로 재차 읍소했다.
"제발 저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나중에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대표님!"
결국 못 이기는 척 그의 청을 수락했다.
***
다음날.
오늘도 시내 모처의 사무실에서 성준과 만남을 가졌다.
우리는 캔맥을 음미하며 진지한 담소를 이어나갔다.
그에게 말했다.
"제가 요즘 중국 펀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륙은 스케일이 워낙 큰 탓에 하루에도 수백프로에 달하는 차익을 얻을 수 있거든요."
"저도 그런 얘기를 여러차례 들었습니다."
성준이 돈독이 잔뜩 오른 얼굴로 머리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그래서 재차 말했다.
"중국 증시에는 중국 공산당의 위장 회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회사들 중심으로 주식 매집에 나서는 중입니다."
"중국 고위층의 위장 회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런 주식들은 대다수 열배 이상의 시세차익을 보장하거든요. 저는 중국 요직에 인맥들이 많은 탓에 공산당과 연관된 주식들을 다수 파악하고 있습니다."
녀석은 홀린 듯한 얼굴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운용하는 중국 펀드에 1조7천억을 입금해 주시면 석달 안에 2조 3천억 이상으로 불려드리겠습니다."
그리 호언장담하자 성준의 입에 귓가에 내걸렸다.
게임오버였다.
다음날.
히말라야 사모펀드 계좌에 1조7천억이 입금됐다.
성준의 돈이었다.
***
늦은 밤.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에 이성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1조7천억에 달하는 꽁돈을 날로 먹은 탓이다.
그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형님이 지정하는 계좌로 7천억을 쏴드리겠습니다."
성모가 좋아죽는 얼굴로 화답했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우하하하..."
녀석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캔맥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성준은 내 진실한 정체를 전혀 몰랐다.
그저 외국계 사모펀드의 한국 지사 대표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의 돈을 떼먹는다 해도, 뒷탈이 날 우려가 전혀없었다.
이성모가 잇었기 때문이다.
이철성 회장과 이성택은 나에게 큰 빚을 졌다.
나는 그것을 1조원 정도로 퉁칠 생각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
대송빌딩.
탑층에 올라가자마자 복도에 직원들을 집합시켰다.
"오늘 중으로 사무실을 이사할 계획이니까 필요한 서류와 컴퓨터, 장비 등을 챙기세요."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타지마할 사모펀드의 사무실을 논현동에 있는 카이저 빌딩으로 이전했다.
카이저 빌딩 역시 내가 소유한 업무용 빌딩 중의 하나였다.
***
이성준은 초조한 심경에 휩싸였다.
며칠 전부터 크리스 킴과 연락이 두절된 탓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상황이 심삼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이복형인 이성모의 집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성모는 자기 집에 나타난 성준에게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그 친구 연락처를 왜 나에게 묻는거야?"
"형님이 소개해준 친구 아닙니까?"
"이제 나랑은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 쓸데없이 짜증나게 하지마라."
그리 말하며 얼굴 가득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
성모의 집을 나선 성준은 검사로 재직 중인 대학 동창에게 전화를 돌렸다.
크리스 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다음날.
시내 모처에서 성준과 채종현 검사가 만남을 가졌다.
채종현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출입국 관리소에도 알아봤는데, 크리스 킴이라는 인물이 한국에 입국한 흔적이 전혀 없더라."
"그 사람이 가명을 쓴거라는 말이냐?"
"아마 그럴거다."
"타지마할 사모펀드도 조사해봤어?"
"외국계 사모펀드는 함부로 건드리면 골치 아파져.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거야?"
채종현의 물음에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준의 얼굴이 점점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반도체 공장 증설에 투자해야 하는 돈을 크리스에게 모두 넘긴 탓이다.
"내 생각에는 너의 이복형인 이성모와 크리스 킴이라는 놈이 짜고 이런 일을 벌인거 같거든. 그러니까 회장님에게 모든 사실을 낱낱이 털어놔라. 그게 최선같다."
종현은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모습을 감췄다.
혼자 남겨진 성준의 얼굴에 극심한 갈등이 번갈아 표출됐다.
결국 그는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작심했다.
자신을 사지로 내몬 이성모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늦은 밤.
한남동 서재에 이성모가 나타났다.
우두커니 서 있던 이철성은 성모가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골프채를 손에 들었다.
그 후, 불문곡직하고 성모를 향해 골프채를 휘둘렀다.
성모의 입에서 애처로운 비명이 쉴 새 없이 울려퍼졌다.
"으아악! 제발 그만요! 아버지! 끄아악...!"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한정식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을 음미할 무렵, 이철성 회장 일행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철성은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맞은편 의자에 착석했다.
그 후, 나를 빤히 직시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해먹은 1조를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려 주시게."
그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성준이 자식이 자네에게 투자한 돈은 대영전자의 공금일세. 그러니 잔말 말고 고스란히 토해내시게."
"저는 이성준 씨에게 받은 투자금 1조7천억 중에서, 1조원을 중국 펀드에 투자한 상탭니다. 그리고 나머지 7천억은 소개비 조로 이성모 씨에게 건넸습니다."
"다 아니까, 좋은 말로 할때, 1조원을 돌려주시게."
"요즘 중국의 주식 시장이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중국 펀드도 덩달아 망했다고요. 당연히 1조원도 모두 허공으로 증발했죠."
순간 이철성이 분노한 얼굴로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허나, 게임은 어차피 내 승리로 귀결될 운명이었다.
그에게 투자계약서를 내밀었다.
"읽어보세요. 투자조건을."
철성은 내가 건넨 투자계약서를 꼼꼼히 읽었다.
그런 탓일까, 허탈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후, 온다간다 말도 없이 장내에서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