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전부 때려잡는다 3
새벽 무렵.
8명의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이철성의 한남동으로 향했다.
이철성의 자택 주변에 도착한 뒤 집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나는 한남동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다.
20년 동안 이성택의 수행기사로 일하며 그 곳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한남동 대저택의 뒤편에는 저택의 일꾼들이 출입할 수 있는 자그마한 철문이 있었다.
철문에는 디지털 도어락이 달려있었으며 석달 주기로 4자리 숫자의 비밀번호가 변경되었다.
예전 시절을 떠올리며 4자리 숫자의 비번을 차분히 입력했다.
딩동댕!
철문을 잡아당기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곧바로 경호원들과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이라 그런지 저택의 정원에는 대여섯명의 경호원들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연신 하품을 하며 꾸역꾸역 졸고 있었다.
다른 경호원들은 별관 사무실에서 CCTV나 들여다보면서 편히 휴식을 취하는거 같았다.
김태구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정원에 있는 경호원들을 신속하게 제압하세요."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8명의 용사들이 이 회장의 집지키는 개들을 향해 벼락처럼 짓쳐들어갔다.
그들이 휘두르는 호신봉이 놈들의 정수리를 정통으로 직격하자 녀석들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크헉! 으헉! 으악! 끄악! 아악! 쿠악!"
이철성의 집지키는 개들은 경찰 특공대 출신의 전사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별관 CCTV 관리실에 웅크리고 있는 놈들마저 삽시간에 제압한 뒤 본관 건물로 전속력으로 뛰어들어갔다.
2층 서재를 벼락처럼 들이치자, 이철성이 경악한 얼굴로 우리 일행을 쳐다봤다.
김태구에게 지시를 내렸다.
"영감님을 발밑에 무릎 끓리세요."
"네. 대표님."
용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 회장을 내 발밑에 무릎 끓렸다.
김영수의 육성녹음을 들려주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짙은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살인교사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청와대와 검찰, 언론에 알려드릴까요?"
이 회장이 겁먹은 얼굴로 내 바지 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평소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던, 이철성의 초라한 민낯이었다.
"제발! 나를 용서해주게.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미친 짓을 했네. 그러니 이 정도에서 멈춰주시게."
"앞으로 나에게 1조원을 되돌려 달라고, 땡깡을 안부리실 겁니까?"
그리 말하자 이철성의 머리가 위아래로 힘차게 끄덕여졌다.
"죄송하지만, 저는 사람 말을 믿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의 입은 간사하거든요."
"자네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겠네."
그가 간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내 뜻대로 판이 돌아가고 있었다.
"변호사가 작성한 계약서에 인감 도장을 찍으세요."
그리 말하자 이철성이 재빨리 고문 변호사에게 전화를 돌렸다.
40분 후.
이 회장의 고문 변호사가 서재에 나타났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내 발밑에 무릎 끓은 이철성을 쳐다봤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우리 영감님이 지은 죄가 많아서 저에게 무릎을 끓었을 뿐인데. 후후..."
비릿한 조소를 내뱉자, 고문 변호사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변호사에게 내가 원하는 내용을 구술(口述)했다.
"나, 이철성은 셋째아들 이성준이 대영전자의 공금을 타지마할 인베스트먼트의, 중국 펀드에 투자한 사실에 대해서 일체 문제삼지 않는다."
"또한 투자 손실을 보더라도 모든 책임은 나, 이철성에게 있다. 고로, 타지마할 사모펀드에 어떤 투자책임도 묻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는 바이다."
고문 변호사가 놀란 얼굴로 이 회장을 쳐다봤다.
"이 회장도 합의한 사항이니까, 변호사님은 내 구술 내용을 계약서에 그대로 기입하십시오."
그가 체념한 얼굴로 만년필을 손에 든 채, A4 용지에 내가 구술한 내용을 그대로 적어내려갔다.
10분 후, 작업을 끝마친 변호사가 나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는 내가 원하는 내용이 한가득 적혀있었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를 이철성에게 건넸다.
그자는 계약서를 확인한 뒤 책상 서랍에서 인감도장을 꺼내들었다.
그 후, 계약서 2부에 차례로 인감도장을 날인했다.
담배 연기를 자욱이 말아올리며 김영수에 대해서 말했다.
"김영수씨가 보기보다 입이 아주 가볍더군요. 회장님에게 내어드릴테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한남동 집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이제 더 이상 이철성은 나를 귀찮게 못하는 처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수를 멈출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기회를 봐서 이철성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계획이었다.
***
이철성의 한남동 집을 빠져나온 뒤,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내곡동에 위치한 요정으로 향했다.
그들에게 그럴듯한 축하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내곡동 요정에 들어서자 마담이 나를 반겼다.
내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손짓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분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십시오."
"네. 사장님."
마담은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친 뒤 경호원들을 안채로 이끌었다.
요정의 아담한 정원에서 줄담배를 만끽할 무렵, 이성모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박종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1시간 후.
박종태가 내곡동 요정에 도착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 곳이 어딥니까?"
"고급 룸살롱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지갑에서 1천만원짜리 수표 열장을 꺼내서 그에게 전달했다.
"경호원들의 술값으로 사용하세요. 그리고 남은 돈은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요정을 유유히 벗어났다.
***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 이철성 회장 일행은 근교에 위치한 고급 별장으로 향했다.
이철성은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김현수 본부장에게 단호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성준이 놈에게 증여했던 대영전자와 자동차 지분을 전량 회수조치해. 그리고, 그 녀석을 대영자동차의 미주 지사장으로 보내!"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이 회장의 입에서 재차 날 선 언사가 흘러나왔다.
"성모도 내 눈에 안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려."
"1년 정도 정직 처분을 내리시는 게, 어떨런지요?"
"김본이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
2004년의 새 해가 밝아왔다.
그런 탓으로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에서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노우현 대통령은 경제회생과 민생 안정에 역점을 두는 한편, 대통령 공약인 수도권 이전 본격화에 착수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반면 야당과 서울시의회는 수도이전은 헌법에 위배되는 사항이라며, 헌번 소원을 불사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년초부터 수도권 이전 문제가 정치권의 최대 현안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중략...
국회는 조만간 수도권 이전 문제를 연결고리로, 노우현 대통령을 대상으로 탄핵을 가결할 예정이었다.
노우현의 탄핵가결은 여당의원들의 협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우현은 집권초 야당이 제기한 대북송금 문제에 대해서, 여당의 반대를 무릎쓰고 특검을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그 덕분에 전임 대통령이었던 김대종과 대북송금 문제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여당 거물 정치인들이 상당한 곤욕을 치뤘다.
그 결과 노우현은 김대종을 지지하는 여당 의원들에게, 야당과 영합한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런 때문일까, 김대종을 지지하는 여당의원 대다수는 야당이 상정한 대통령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 입장에서 노우현은 김대종을 배신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미래는 그랬다.
물론 미래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나를 두번이나 죽인 이성택을 내 손으로 직접 죽였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마음 속으로 품었다.
미래가 변할 가능성에 일말의 희망을 품은 탓이다.
***
TV를 끈 뒤, 이성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만에 포커를 즐기고 싶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성모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는 좀 풀렸어?
"형님한테 서운한 감정은 오래전에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포커 멤버들을 데리고 타팰 펜트하우스로 오십시오."
-좋아. 안 그래도 손이 근질근질했는데.
"오늘 판돈은 50억으로 합시다. 삥당 백만원이니까, 백만원 짜리 수표로 준비하라고 전하세요."
-오케이. 애들을 모아서 타팰로 갈게.
"그리고 여자애들도 데리고 오십시오. 남자들만 있으면 좀 그렇잖아요."
-그럼 뷔페랑 술은 동생이 알아서 해결해. 여자는 내가 준비할테니까.
"네. 그럽시다."
전화를 끊은 뒤, 대영호텔의 강남 점장인 이종익을 면전에 호출했다.
눈 앞에 나타난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타펠 펜트하우스로 호텔 뷔페랑 샴페인을 보내세요."
"예. 대표님."
***
그날밤.
타팰 펜트하우스에 선남선녀들이 모여들었다.
남자는 재벌가 후계자였고, 여자들은 대다수 현직 연예인이었다.
배우도 있었고, 가수도 있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웃고 떠드는 한편, 맛깔나는 뷔페와 삼페인을 음미했다.
그러기를 얼마 뒤, 본격적인 포커판을 시작했다.
나는 2시간 만에 판돈 50억을 모두 날렸다.
포커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반면, 성모는 오늘 재신(財神)을 만났는지 뜨는 패마다 거의 모두 족보였다.
그 덕분에 녀석은 300억에 달하는 판돈을 모조리 쓸어담았다.
재수가 대통한 날이었다.
그런 탓일까, 녀석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성모는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처럼 여자들에게 10억이 넘는 돈을 팁으로 내던졌다.
포커 멤버와 여자들을 모두 내보낸 뒤, 성모와 진지한 자세로 대화를 이어갔다.
"정직 처분을 당한 겁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년 정도 집에서 쉬라더군."
"이성준은 어떻게 됐죠?"
"그놈은 진작에 끝장났지. 대영전자와 자동차 지분을 모두 회수당했거든."
"그럼 이제 형님을 위협할 만한 후계자가 없겠군요."
"그런 셈이지. 후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영전자의 지분을 사모펀드를 이용해서 늘려나가세요."
"안그래도 조금씩 모으는 중이야. 꼰대가 나중에 딴마음을 먹을 때를 대비해서."
그에게 넌지시 운을 뗐다.
"솔직히 회장님은 너무 건강해요. 형님 입장에서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꼰대가 하루 빨리 영면해주기를 손꼽아 기원할 정도지."
성모에게는 효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이철성은 언젠가는 반드시 극복해야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나중에 정 안되면 약을 써서라도 회장님을 처리해야 할 겁니다."
녀석이 두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약을 사용해서라도 꼰대의 수명을 단축시키라는 말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성모의 눈에 스산한 한기가 떠올랐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포커 멤버들을 규합해서 주가조작을 해보세요. 일이 터져도 회장님이 알아서 막아줄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 지금은 근신 중이라, 자유롭게 운신하기가 쉽지 않아."
"그냥 속편하게 행동하세요. 그게 형님한테 어울리니까."
성모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
"대한민국에서 형님을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그리 화답하자, 녀석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적나라하게 떠올랐다.
***
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국회에 상정된 대통령 탄핵안이 압도적인 찬성 속에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제 대통령의 운명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좌우될 예정입니다. 중략...
예전과 마찬가지로 국회의원들은 노우현을 탄핵했다.
물론 두달 후에 노우현은 기사회생할 운명이었지만.
허나,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탄핵 찬성 국회의원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승리의 환호를 노골적으로 표명했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
다음날.
대영호텔 강남 본점 피트니스 센터에서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고중량 스쿼트에 열중하는 한편, 벽면을 장식한 대화면 TV에서 흘러나오는 CNN뉴스 속보에 귀를 기울였다.
-민주당의 신진 여성 정치인 에바 페론이 원내총무 경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습니다.
-에바 페론은 원내총무 취임 일성으로,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 주둔 중인 미군의 전면적인 철수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일이킨 이유가, 부시 가문의 가업인 석유산업의 이권 때문이라며, 전방위적인 대통령 특검을 주장했습니다. 중략...
에바 페론은 2020년에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될 운명이었다.
내 입장에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여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미녀였다.
앞으로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헬스 3대운동을 끝내자마자 박은영에게 전화를 돌렸다.
"워싱턴행 왕복 항공권을 예매하세요."
-네. 대표님.
전화를 끊은 뒤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프랑스 현지에서 초빙한 주방장의 요리솜씨를 맛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