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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50화 (50/175)

50화 태산그룹 1

워싱턴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에바가 나홀로 사용하는 다운타운 인근의 단독주택으로 직행했다.

집에 들어서자 에바가 내 품에 뜨겁게 안겨들었다.

우리는 곧바로 격정적인 사랑놀음에 몰입했다.

그날 새벽.

에바는 내 품에 안긴 채 사랑스러운 얼굴로 조곤조곤한 어조를 흘려보냈다.

"자기랑 워싱턴에서 같이 살고 싶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우리 모두 각자 하는 일이 있잖아. 너는 이 곳에서 정치를 해야 하고, 나는 한국에서 비지니스를 해야 하잖아."

"그래도 자기랑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니까,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라구."

그리 하소연하며 내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그녀는 내 초콜릿 복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꿈꾸는 듯한 눈망울로 입을 열었다.

"다음주에 콜로라도에 있는 아스펜 리조트로 놀러갈 예정인데, 자기도 같이 갈래?"

"거기서 뭐할건데?"

"콜로라도 산맥 밑에 위치한 리조트거든. 그 덕분에 스키랑 온천을 동시에 즐길 수 있어."

나는 여자에게 안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일주일 이상 한 여자와 같이 있으면 극심한 권태기에 젖어들었다.

에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좋아했지만 오랜 시간 같이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며, 이 위기를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뉴욕 맨해튼에서 중요한 비지니스 파트너와 연쇄미팅이 있거든. 그리고 다다음주도 마찬가지고."

넌지시 운을 떼자 그녀가 실망한 눈길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여행은 다음에 같이하는 걸로 하자. 미안해. 에바."

그녀의 앵두같은 입술에 위로의 키스를 선사했다.

***

이철성 회장에게 근신처분을 받은 이성모는 재벌가 후계자들과 손잡고 주식 시장에서 주가조작에 전념했다.

특히 코스닥에 상장된 주식들을 집중적으로 자전거래하며, 주가를 대대적으로 띄우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도와줄 대리인을 내세웠다.

그는 바로 진성증권의 유창선 대표였다.

유창선은 증권사 직원들의 명의를 이용해 전방위적인 시세조작에 나섰다.

그 덕분에, 단기간에 천억대의 차익을 실현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반드시 잡힌다는 속담처럼, 대검 특수부는 그들의 주가조작 행위를 암중에서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진성증권의 직원이 검찰에 주가조작 증거를 제보한 탓이다.

결국 대검 특수부는 이성모를 비롯한 재벌가 후계자들과 진성증권의 유창선 대표를 대검 특수부로 전격적으로 소환했다.

***

이철성 회장 일행이 성북동 고급 주택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인근에 위치한 대저택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철성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보필하는 노집사에게 넌지시 말했다.

"김상무는 제대로 처리했나?"

"공장 소각장에서 흔적 없이 처리 했습니다."

"놈의 가족들이 쓸데없이 경찰에 신고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는 본관 건물 내실로 들어선 뒤, 김현수 본부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이철성의 입에서 창노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당분간 이곳에서 거처할 생각이니까 경호원들을 집주변에 물샐틈없이 깔아놔."

"예. 회장님."

그는 보안이 허술한 한남동 자택을 당분간 비울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한빈에게 치욕적인 망신을 당한 탓이다.

김현수가 조심스런 태도로 보고를 올렸다.

"둘째 도련님이 대검 특수부에 소환됐습니다."

"왜?"

"주가조작 혐의를 받는 것 같습니다."

이철성은 이성모를 잡아죽이고 싶었다.

그 정도로 분노했다.

그의 입장에서 성모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암덩어리였다.

그런 탓일까, 이 회장의 입에서 냉정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그놈이 죽든지 말든지 관심 없으니까, 내 앞에서 그 놈 얘기는 절대 하지말게."

그러자 김현수가 곤혹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둘째 도련님이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된다면 대영그룹의 이미지가 땅바닥으로 추락할 겁니다. 구속만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회장님."

"끄응..."

철성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허나, 그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 그놈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마라."

"알겠습니다. 회장님."

***

이태강은 이철성 회장이 부탁하지 않아도 제스스로 이성모를 구명해주기로 결정했다.

큰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후 무렵.

대검 특수부 총괄 부장실에, 특수부 소속의 이동민 부장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태강은 면전에 나타난 이동민에게 넌지시 물었다.

"주가조작 수사는 어떻게 되가고 있나?"

"주가조작에 사용된 하드와 휴대폰, 이메일 내역 등을 모조리 확보했습니다. 구속영장 청구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을 겁니다."

태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한 어조로 재차 물었다.

"이성모도 포함된 건가?"

"그렇습니다. 선배님."

"이성모를 불구속으로 처리하고 싶은데, 이프로의 생각은 어때?"

이동민은 태강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직계라인이었다.

그런 탓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선배님이 원하시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자 태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내걸렸다.

"역시 우리 이프로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님."

동민은 그리 화답하며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태강은 곧바로 이 회장의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를 돌렸다.

그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제 직권으로 이성모씨를 불구속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철성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구만.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이리 신경을 써주다니.

"그래서 말인데, 특수부 검사들한테 용돈이라도 줘야 할거 같습니다. 이성모씨를 구명하는데 그 친구들이 많은 도움이 됐거든요."

-알겠네. 내가 인편으로 사과박스를 보내지.

이 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통화를 끊었다.

태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회장의 반응이 심드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현찰이 가득 들어찬 사과박스에 눈이 먼 까닭에,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후.

이태강의 자택에 사과박스 2상자가 배달됐다.

사과박스를 개봉한 태강은 내심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겨우 4억 내외의 현금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이미 이성모를 석방한지 오래였다.

그런 때문일까, 이 회장에 대한 섭섭함이 마음 속 깊숙이 뿌리내렸다.

그가 기대한 대가보다 한참이나 적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

에바와 오붓한 시간을 만끽한 뒤 홀가분하게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공항 입국장 게이트를 통과하자 김태구와 경호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대동한 채 공항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를 태운 부가티가 논현동에 위치한 카이저 빌딩 정문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서자 관리인과 경비원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거수경례를 올려부쳤다.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빌딩 로비로 들어갔다.

주변을 지나치는 샐러리맨과 오피스걸을 뒤로한 채 경호원들과 탑층으로 곧바로 올라갔다.

탑층에 도착하자 박종태와 박은영, 이수경 등이 나를 맞이했다.

장동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은영에게 물었다.

"장변은 어디 있죠?"

"외근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뒤, 수경에게 지시를 내렸다.

"달달한 커피 한잔 부탁합니다."

"예. 대표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데스크탑을 켰다.

그 후, 업무용 빌딩의 임대료를 관리하는 시중은행 계좌를 확인했다.

은행 계좌에는 550억 정도의 임대료가 이체된 상태였다.

그때, 수경이 쟁반에 커피잔을 받쳐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에게 목례를 취하며 커피잔을 받아들었다.

커피 한모금을 입안으로 들이킨 뒤, 면전에 조신하게 서 있는 수경에게 말했다.

"임대료를 관리하는 은행계좌에서, 1천만원 짜리 수표로 총 50억을 인출하세요."

"네. 대표님."

수경은 그리 화답한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1시간 후.

그녀가 다시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경은 나에게 수표다발을 전달한 뒤, 조신하게 사라졌다.

그녀가 건넨 수표다발을 서류 가방 속에 수납한 뒤 포커 멤버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돌렸다.

***

늦은 밤.

타팰 펜트하우스에 포커 멤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재벌가 로열패밀리였다.

거의 후계자와 근접한 위치였다.

그런 탓으로 수십억이 오가는 포커판에 거리낌없이 참가했다.

우리는 캔맥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포커에 집중했다.

오늘 나는 끗발이 좋았다.

첫판부터 백억이 넘는 돈을 따먹은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되는 날이었다.

2시간 후.

우리는 게임의 룰을 홀덤 포커로 변경했다.

홀덤 포커는 수중에 든 2장의 카드와 다섯장의 공유카드로 승부를 보는 방식이었다.

공유카드에는 K투페어가 뜬 상태였다.

운좋게도 내가 보유한 두장의 카드 중의 한장이 K 카드였다.

흔히 말하는 K풀하우스를 완성한 상태였다.

더구나 A 풀하우스의 가능성마저 전무한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이 판데기의 절대강자였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는 민영기는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녀석은 시종일관 하프를 내지르며 뻥카를 치고 있었다.

나 역시 지지않고, 맞하프를 미친듯이 때렸다.

그 결과 테이블 위에는 200억이 넘는 판돈이 수북이 쌓여갔다.

녀석의 수중에 돈이 전부 사라졌다.

나 역시 비슷한 형편이었다.

우리는 서로 합의하에 패를 오픈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먼저 패를 깠다.

K 풀하우스였다.

녀석도 패를 깠다.

순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녀석은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완성한 상태였다.

실카에서 거의 나오기 힘든 희귀한 족보였다.

뒷통수를 뾰족한 망치로 거세게 두둘겨 맞은 듯한 충격파가 전해져왔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민영기는 300억에 달하는 판돈을 서류가방에 재빨리 수납한 뒤, 승자의 미소를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미안하다. 크리스. 우하하하..."

녀석의 입에서 호탕한 광소가 쏟아져 나왔다.

씁쓸한 순간이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포커 멤버들에게 말했다.

"기분도 굴꿀한데 룸빵에서 술이나 마십시다."

그러자 녀석들이 좋아죽는 얼굴로 환성을 내질렀다.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논현동에 위치한 룸빵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연히 오늘의 술값은 민영기의 독차지였다.

판돈을 뭉테기로 따먹은 탓이다.

우리는 질펀한 술자리를 즐기는 한편, 아가씨들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내 옆에 앉아 있던 민영기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동생한테 할 말이 있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그는 나보다 열살 이상 나이가 많았다.

이성모와 비슷한 연배였다.

"이 곳에서 편하게 말하시죠?"

"여기는 좀 그렇고,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그렇고, 내일 회사로 오십시오."

"그럼 내일 오후 3시 무렵에 회사로 찾아갈게."

"편할대로 하십시오."

***

다음날.

카이저 빌딩 사무실에서 업무에 열중할 무렵, 민영기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커피를 음미하며 진솔한 담소를 이어나갔다.

"나에게 할 말이 뭡니까?"

그가 즉답했다.

"내가 1천억 정도 여유자금이 있거든. 그 돈을 동생이 불려주면 안될까?"

그에게 딱 잘라 말했다.

"저는 형님과 돈 문제로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죠."

그러자 영기가 애절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동안 주식이랑 선물옵션으로 까먹은 돈이 2천억이 넘는다고. 그래서 동생한테 이렇게 부탁을 하는거야. 하도 믿을 놈들이 없어서."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는데, 저는 형님 돈을 관리하기가 싫다고요."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힌 뒤, 그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녀석이 축쳐진 어깨를 뒤로한 채, 사무실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포커 멤버들과 사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포커와 술을 즐기는 유흥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재계서열 20위권인 태산그룹은 자금유동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조선과 중공업 경기의 전 세계적인 불황 여파로 그룹에 현금이 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만기 어음은 나날이 급증하는 추세였다.

더군다나 금융권의 자금조달마저 중단된 상태였다.

그들은 이번달 말에 돌아오는 4천억 상당의 만기어음을 막지 못할 경우, 회사가 도산할 위기에 처했다.

그런 탓일까, 태산그룹의 최동명 회장은 명동 사채시장을 돌며 급전을 땡기기 위해 연일 동분서주했다.

허나, 그 누구도 최동명을 만나주지 않았다.

금융권의 대출자금 회수조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탓이다.

더구나 만기어음 규모도 4천억에 달한 까닭에, 사채시장에서도 철저히 외면을 받았다.

결국 그는 회사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 큰아들인 최종연 전무에게 솔직하게 토로했다.

아버지의 고심을 전해들은 종연은 그 길로 한빈을 찾아나섰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에서 여유로이 휴식을 취할 무렵, 최종연이 내 앞에 나타났다.

녀석이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딱 3달만 쓰고 줄테니까 돈 좀 빌려줘라."

그 역시 나보다 열살 이상 많은 나이였다.

그런 탓으로 편하게 말을 놨다.

내 입장에서도 그 편이 나았다.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그가 즉답했다.

"4천억 정도가 필요해."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종연이 자초지종을 소상히 밝혔다.

태산그룹은 조선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그룹이었다.

나름 견실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대기업 집단이었다.

조선 부문의 불황 여파로 단기적인 자금 경색이 발생한 모양새였다.

조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종연에게 긍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녀석이 반색하는 얼굴로 내 오른손을 두손으로 정성스럽게 마주잡았다.

"고맙다. 동생. 이 은혜를 절대 잊지않을게."

그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보기보다 순진한 녀석이었다.

그런 탓일까, 내 입꼬리가 절로 비릿하게 말려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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