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앞만 보고 달려간다
"김한빈의 주변에 30명이 넘는 경호원들이 배치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게다가 거의 모두 전직 경찰특공대 출신인 관계로..."
김본부장은 말끝을 흐리며 철성의 눈치를 살핀 뒤 재차 입을 열었다.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할 경우, 저번과 마찬가지로 도리어 회장님이 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철성의 미간에 깊은 내천자가 그려졌다.
김현수의 말대로 한빈을 잘못 건드릴 경우, 도리어 자신이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철성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의 주변에 배치한 친구들을 모두 철수시키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회장님."
철성은 김현수를 내보낸 뒤 둘째 아들인 이성모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입장에서 성모는 용납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
가족과 상관없는 김한빈과 손 잡고 1조원이 넘는 회사 자금을 횡령한 것이다.
그런 탓일까, 철성은 성모를 후계구도에서 제외함과 동시에 셋째 아들인 성준을 차기 후계자로 낙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자마자 미국에 있는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후.
성북동에 이성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부친인 이철성 회장에게 인사한 뒤, 면전에 공손히 시립했다.
이 회장이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너에게 대영그룹을 물려줄 계획이다."
성준이 기쁨과 놀라움이 범벆된 얼굴로 은근히 물었다.
"둘째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 회장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놈은 신경쓰지마라. 아비가 알아서 처리할 생각이니까."
이 회장은 그리 말한 뒤, 장내에 김현수 본부장을 불러들였다.
그는 눈 앞에 나타난 김현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대영물산의 지분을, 성준이에게 50% 정도 증여할 생각이니까 지분양도 작업에 착수해."
김본이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이 회장과 성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우려하는 얼굴로 말했다.
"둘째 도련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집안에 큰 분란이 발생할 소지가 있습니다. 회장님."
김본은 이성모와 나름 좋은 관계를 구축한 상태였다.
그런 때문인지, 시종일관 성모의 편을 들고 나섰다.
당연히 이 회장 입장에서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김본을 향해 날선 언사를 내뱉었다.
"둘째놈에게 뒷돈이라도 받아먹은 건가?"
"절대 아닙니다. 회장님. 믿어주십시오!"
"그럼 왜, 내 명령에 대해서 이렇게 토를 다는 건가?
그제야 김본이 체념한 얼굴로 순순히 복명했다.
"말씀대로 증여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그는 장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이성모에게 전화를 돌렸다.
***
늦은 밤.
박종태의 사무실에 김태구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노란 봉투가 들려있었다.
종태는 태구가 건넨 노란봉투 안에서 고화질 사진을 꺼낸 뒤, 사진 속 인물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태구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대표님을 노리는 놈들 같습니다."
종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표님에게 내가 따로 보고할 생각이니까, 김팀장은 이만 가봐."
"네. 실장님."
***
카이저 빌딩 1층 로비에 들어서자 대영호텔 본사 임직원 150명이 나를 향해 허리를 절반으로 접었다.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일장훈시를 내뱉었다.
"항상 애사심을 갖고 행동하십시오. 회사 물품을 자기 물건처럼 아끼라는 뜻입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46층에 사무실을 마련해 드릴테니까 그 곳에서 업무를 보십시오. 앞으로 임원과 평직원 모두 한공간에서 일하셔야 합니다."
"임원이랍시고, 독자적인 사무실 공간에서 탱자탱자 노는 꼬라지를 저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 발언이 끝나자 임직원들이 군기가 바짝 들어간 얼굴로 이구동성으로 화답했다.
"예. 대표님!"
내 뒤에 공손히 서 있는 관리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분들을 46층으로 안내하세요."
그러자 관리인이 절도있는 자세로 경례를 올려부쳤다.
"충성!"
관리인은 경례를 끝마치자마자 대영호텔 본사 임직원들을 46층으로 안내했다.
나 역시 탑층과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
***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그 후, 국내 증시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오늘따라 외인 자본은 매도 공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거의 5조원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물론 저 가운데 3조원 정도는 검은머리 외국계 자본이었다.
한국 증시에 투자한 외인들 중의 60% 가량은 실제로는 한국인들이 운용하는 자금이었다. 그 정도로 해외에 자본을 유출한 한국인들이 많다는 방증이었다.
한국 자본의 해외 유출 역사는 생각외로 오래됐다.
1960년대 군사정권 시절부터 본격적인 외환 유출이 시작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전문가들은 해외에 유출한 자본 규모를 최소 1,500조에서 최대 2,000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한국에는 도둑놈들이 많았다.
나라가 가난한 게 아니었다.
그저 도둑놈들이 많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지배할 무렵, 최동명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밤에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를 자욱이 말아올릴 찰나, 박종태가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인 뒤, 여러장의 고화질 사진을 건넸다.
사진 속에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다수 드러난 상태였다.
"이놈들이 누구죠?"
그가 심각한 얼굴로 즉답했다.
"이철성 회장이 보낸 놈들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와 같았다.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할거 같습니다."
"그건 실장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예. 대표님."
종태는 그리 답한 뒤 사무실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철성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 역시 내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선제타격이 상책이었다.
내가 먼저 이철성을 들이치는 게 최선이었다.
마음을 정하자마자 성모에게 전화를 돌렸다.
***
태산그룹의 최동명 회장은 착잡한 얼굴로 자택의 정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맨손으로 태산그룹을 일궈낸 장본인이었다.
당연히 그룹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태산은 이번달과 다음달 말에 돌아오는 총 7천억 상당의 단기 어음을 막지못하면 그룹 자체가 도산할 위기였다.
그런 탓일까, 과반수 지분을 넘겨달라는 한빈의 제안에 응하기로 결심했다.
급한 불부터 먼저 끄는 게 순리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최동명은 다음달에 만기가 도래하는 단기어음 3천억과 경영권에 관련된 특약 사항을 윤광사 지분양도 계약서에 삽입하기로 작심했다.
나름의 승부수였다.
***
대영호텔 소공동 지점의 로비에 도착하자 점장과 호텔 직원들이 양열로 도열한 채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그들을 무표정한 시선으로 둘러본 뒤, 허리를 숙이고 있는 점장에게 용건을 밝혔다.
"잠시 뒤, 태산그룹 최동명 회장이 찾아올 겁니다. 그분을 펜트하우스로 안내하세요."
점장이 허리를 굽힌 자세로 복명했다.
"예. 대표님."
고개를 끄덕인 뒤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펜트하우스와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몸을 실었다.
펜트하우스의 테라스에서 고층 빌딩숲에 시선을 고정할 무렵, 나를 밀착경호하는 김태구 팀장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최동명 회장이 도착했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하세요."
"예. 대표님."
응접실로 들어서자 소파 앞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최동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목례를 취한 뒤 맞은 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앉으시죠. 회장님."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최동명에게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저의 제안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의 머리가 천천히 숙여졌다.
"결론을 내리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대표님."
최 회장이 결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원하시는 대로 윤광사의 지분 50.1%를 넘겨드리겠습니다. 대신 저를 비롯한 최씨 일가의 경영권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지분양도 계약서에 삽입해 주십시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죠."
그리 화답하자 최 회장이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너무 쉽게 그의 요구를 수용하자, 도리어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런 탓인지 연신 고개를 갸웃하며 내 얼굴을 살피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때문일까, 체념한 얼굴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세부논의에 돌입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는 고사성어처럼 내일 오전 10시에 지분양도 계약을 체결합시다. 당연히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태산그룹의 공식 계좌로 4천억을 일시불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최동명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럼 내일 봅시다."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그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달에 만기가 도래하는 단기어음 3천억을 대표님이 막아주십시오."
"윤광사의 과반수 지분을 총액 7천억에 넘기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대표님."
최동명은 그리 말하며 내 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의 목소리가 장내에 재차 울려퍼졌다.
"저희 태산그룹은 다음달에 도래하는 만기어음 3천억을 막을 방법이 전무합니다."
최동명에게 넌지시 말했다.
"다음달 만기어음을 막지 못하면, 그룹이 도산하는 겁니까?"
"예. 대표님."
"태산그룹의 자금 사정이 그 정도로 안좋은 건가요?"
그가 솔직한 얼굴로 답변했다.
"저희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대다수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어요. 흔히 말하는 흑자도산으로 내몰리는 형국입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부동산에 많은 투자를 한 상태였다.
태산그룹도 그런 케이스였다.
그 바람에 단기어음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에 현금이 태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태산의 그런 말못할 속사정이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창가로 걸어갔다.
그 후, 최동명에게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윤광사의 지분 50.1%를 7천억에 매입하는 대가로 2가지 조건을 들어주십시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태산에 요구하실 사항이 있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요구조건을 소상히 밝혔다.
"태산그룹의 현 경영진이 추천한 사내이사 1인과 제가 추천한 사외이사 2인, 총 3명으로 구성된 구조조정위원회를 즉각 설치해 주십시오. 더불어 구조조정위원회의 전권을 저에게 주십시오."
내 요구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태산조선의 선박수주 전권 역시 저에게 일임해 주십시오."
"이렇게 2가지 요구를 수용해 주시면, 원하시는 대로 윤광사의 지분 50.1%를 7천억에 매입해 드리겠습니다."
최동명이 고심이 역력한 얼굴로 내 제안을 심사숙고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허탈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원하시는대로 2가지 조건을 수용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 10시에 정식으로 윤광사의 지분양도 계약서를 체결합시다."
그리 말하며 최 회장에게 오른손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그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두손으로 공손히 마주잡았다.
최동명이 장내에서 사라지자마자 장동현 법무실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눈 앞에 나타난 장변에게 지시를 내렸다.
"K2 인베스트먼트 사모펀드 명의로 윤광사의 지분 50.1%를 7천억에 인수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내 지시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계약서 상에 최동명 회장과 최씨 일가의 경영권을 보장한다는 특약 조항과 내가 요구한 2가지 조건을 모두 삽입해 주십시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장변은 그리 복명한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