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유언장
시티은행에 도착한 뒤 200억 상당의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CD)를 인출했다.
그 후, 시내 모처로 향했다.
약속장소에 들어서자 이철성 회장의 고문 변호사가 나를 맞이했다.
그에게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저는 이성모 형님의 심부름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형님이 그러더군요. 변호사님에게 200억 상당의 CD를 전달하라고."
그리 말하며 테이블 위에 CD를 올려놓았다.
그러자 변호사의 얼굴 가득 숨길 수 없는 탐욕이 그려졌다.
그때, 성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곧바로 핸드폰을 변호사에게 내밀었다.
"형님의 연락입니다. 받으시죠."
변호사가 못 이기는 척 폰을 받아서 귓가로 가져갔다.
그는 성모와 통화를 나누는 한편, 테이블 위에 덩그라니 놓여진 200억 상당의 무기명 양도증서를 홀린 듯이 힐끔거렸다.
돈 앞에 약해지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통화를 끊자마자 내가 원하는 답변을 해왔다.
"내일 밤 9시에 한강시민공원 망원 주차장으로 오십시오."
그에게 목례를 취한 뒤 장내를 유유히 벗어났다.
다음날.
한강 망원공원 주차장에 들어서자 저 멀리 주차된 세단 차량의 전방 헤드라이트가 연신 껌벅거렸다.
그 쪽으로 다가가자 운전석에 앉아 있는 고문 변호사가 보였다.
그는 차창을 연 후, 노란 봉투를 내 손에 건넸다.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주차장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
부가티 베이론의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박종태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대필 전문가를 아십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럴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대필 전문가를 섭외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를 좀 해주세요."
-네. 대표님.
전화를 끊은 뒤 운전석의 김태구에게 지시를 내렸다.
"해장국 집으로 차를 돌리세요. 얼큰한 육개장으로 배나 채웁시다."
그가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네. 대표님."
직후 우리를 태운 부가티가 해장국 전문점을 향해 부드럽게 출발했다.
***
그날 밤.
종태를 도산공원으로 호출했다.
우리는 공원을 거닐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 뒤,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이철성 회장의 유언장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유언장을 받아든 그가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이 유언장을 누구에게 입수한 겁니까?"
"그건 묻지 마시고, 쓸만한 대필 전문가에게 부탁해서 유언장의 내용을 위조해 주십시오."
"흐으음..."
종태의 입에서 침중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일이 잘못되면 대표님의 신상이 위태로워질 겁니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니 실장님이 저 대신 작업을 해주세요."
그가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에게 목례를 취한 뒤, 유언장에 기입할 내용을 나직한 어조로 구술(口述)했다.
"나, 이철성이 죽을 경우 대영그룹의 총지주회사인 대영물산의 지분 전량과 해외 은행에 은닉한 비자금 전액을 사실상의 큰아들인, 둘째아들 이성모에게 상속한다."
내 구술내용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죽더라도 그룹의 경영진은 둘째아들 이성모를 중심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대영그룹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자녀들에겐 모두 균등하게 500억 상당의 부동산 혹은 현금을 상속하고, 사위와 며느리에겐 2백억 상당의 현금 혹은 부동산을 상속한다. 그외의 모든 재산은 둘째 아들인 성모에게 상속할 것이다."
내 구술 내용을 수첩에 받아적은 종태가 우려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내가 걱정되십니까?"
"솔직히 많이 걱정됩니다. 대표님."
종태는 나를 위하는 마음이 강했다.
나름의 의리였다.
"모두 내 뜻대로 잘 될테니 실장님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하하..."
여유넘치는 웃음을 흘려보내자 그제야 종태가 다소 편해진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인사동 고서화 거리에 박종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주변을 휘 둘러본 뒤 허름한 뒷골목에 위치한 고서화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종태는 대필 전문가에게 한장의 유언장을 건넸다.
유언장을 살핀 대필 전문가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건...? 대영그룹의..."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종태의 굴강한 오른손에 목덜미를 저당잡힌 탓이다.
"함부로 입을 놀린다면, 네놈을 사문서 위조혐의로 빵에 쳐넣어주마!"
그가 성난 얼굴로 으르렁거리자, 대필 전문가가 공포에 질린 채 머리를 위아래로 맹렬히 끄덕거렸다.
1시간 후.
종태는 유언장 위조 작업이 끝나자마자 고서화 전문점을 바람처럼 빠져나왔다.
***
타팰 펜트하우스.
이성모와 홈바에서 가벼운 칵테일을 음미할 무렵, 종태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이철성의 유언장을 내밀었다.
그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이자, 허리를 깊숙이 숙인 뒤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성모에게 유언장을 건네자, 그의 시선이 유언장에 못박힌 듯 고정됐다.
성모의 눈빛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세상을 다가진 듯한 얼굴이 되었다.
녀석의 입에서 우렁찬 광소가 흘러나왔다.
"우하하하하하...!"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성모는 떠들석한 광소를 길게 내뱉은 뒤, 내 손을 두손으로 마주잡으며 간사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동생은 정말 내 구세주다!"
녀석의 입에 발린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냉정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습니다. 그 일은 언제 하실 겁니까?"
순간 녀석이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서, 투명한 액체가 들어찬 새끼손가락 크기 만한 캡슐을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아나?"
"땅콩 추출물 인가요?"
"맞아. 내일 있을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마시는 물에, 이 땅콩 엑기스를 몰래 집어넣을 생각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방법이 있습니까?"
"가장 빨리 식당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물컵에 땅콩 엑기스를 타넣으면 게임 오버라고."
나름 그럴듯한 계책이었다.
"회장님 심폐 기능은 어떤 편이죠?"
"몇년 전에 심혈관계 쪽으로 수술한 전력이 있어. 땅콩 엑기스가 들어있는 물을 마시면, 십중팔구 저승으로 가시겠지."
그는 살부계에 깊숙이 발을 들인 상태였다.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룹의 대권을 장악하시면, 약속대로 대영물산의 지분을 저에게 40% 가량 매각해 주십시오. 물론 적절한 대가로 지불하겠습니다."
성모에 얼굴에 흠칫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에게 재차 말했다.
"저에게 40% 가량의 지분을 넘기더라도, 형님이 대영물산의 절대지배주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마시고 저에게 지분을 매각해 주십시오."
그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내가 각서를 파기하면 어쩔 생각이냐?"
녀석에게 솔직히 말했다.
"지금 당장, 이 회장에게 모든 사실을 낱낱이 고할 생각입니다."
딱부러지게 답하자 성모가 곤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이미 선을 넘은지 오래였다.
약속을 지키든가, 아니면 이 회장에게 맞아죽든가,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성모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동생 말대로 할테니까, 산통깨는 얘기는 절대 하지마라. 부탁이다."
"이 회장이 제거된다 해도, 저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저는 약속을 파기하는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리 말하며 성모의 겁 많은 두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그러자 녀석이 움찔하는 얼굴로 내 시선을 회피했다.
잠시 후, 장동현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날 밤, 이성모는 대영물산의 지분 40%를 히말라야 사모펀드에 5천억에 매각한다는 비밀 계약서를 추가로 작성했다.
***
한남동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성모는 어금니를 피가 날정도로 앙다물었다.
그는 모친을 창녀취급하며 자기를 노골적으로 푸대접하는 이철성을 오래전부터 증오했다.
그런 탓일까, 부친을 죽인다는 사실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성모는 이 회장을 죽이고, 자신이 대영그룹의 총수로 등극하는 찬란한 앞날에만 오롯이 집중했다.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캡슐의 서늘한 감촉이 손끝에서 전해져왔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희미하게 그려졌다.
'살만큼 사셨으니까,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겁니다. 아버지.'
성모의 눈에 스산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40분 후.
그는 한남동에 도착하자마자 식당으로 직행했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온 탓에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철성의 자리에 놓여진 물컵에 준비해온 땅콩 엑기스를 재빨리 투약했다.
그 후, 1층 응접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
벽면을 장식한 대화면 TV에서 긴급 속보가 전해졌다.
-대영그룹의 이철성 회장이 자택에서 오늘 저녁 7시경에 돌연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의료진들은 이 회장이 지병인 심혈관계 질환 때문에, 갑작스런 심정지가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경제에 커다란 이바지를 해온 것으로 평가받는 이철성 회장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정치권과 재계, 시민사회단체 등은, 지금 이 시각 현재 유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명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중략...
약육강식의 생존본능에 온몸을 내맡겼던 인물이 지옥으로 떠나는 소식이었다.
이철성 역시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소시오패스였다.
이성택을 능가하는 악인이었다.
그런 탓일까, 뿌듯한 성취감이 전신에 급속도로 번져갔다.
***
한남동 접견실에 이철성 회장의 유족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기다란 테이블에 착석한 채 이 회장의 고문 변호사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변호사가 이철성의 유언장을 큰 목소리로 대독했다.
잠시 후.
변호사의 유언장 발표가 끝나자마자 장내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성모에게 그룹의 대권과 이 회장의 막대한 재산 대부분이 상속된 탓이다.
그런 때문일까, 성모의 얼굴에 찬란한 환희가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반면 그의 동생들은 격앙된 얼굴로 거친 언사를 토해냈다.
"이건 말도 안되는 거야! 생전에 아버지가 둘째 형을 얼마나 병신취급 했는데!"
"맞아. 아버지는 둘째 형을 인간말종으로 취급했다고!"
"내 말이 그말이라고. 둘째 오빠는 대가리도 나쁘고 여자 관계도 막장이라서. 아빠가 짐승처럼 생각했다니까!"
"이건 유언장이 조작됐다고 밖에는 볼수 없어! 필적 감정이 필요하다구!"
"지금 당장 필적 전문가를 초빙해서 유언장의 진위를 가리자고!"
동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들고 일어났지만, 성모는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도리어 그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그들의 요구를 흔쾌히 수용했다.
"너희들이 정 원한다면, 필적 전문가를 초빙해서 유언장을 검사하는 문제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으마."
성모가 나름 통 큰 언사를 내뱉자, 이성준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내가 아는 필적 감정가가 있으니까 그 사람을 초빙하는게, 어때?"
그러자 나머지 동생들이 한가닥 기대를 품은 얼굴로 일제히 호응했다.
"셋째형이 그 사람을 지금 당장 불러와!"
"맞아. 셋째 오빠가 그 사람을 데리고 와줘!"
"셋째형만 믿을테니까 지금 바로 데리고 오라고!"
성준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장내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