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페이스북
새벽 1시경.
저명한 필적감정가인 김재민 교수가 한남동 접견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장내에 배석한 유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이철성 회장의 유언장을 감정하기 시작했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김재민이 돋보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감정결과 회장님의 유언장은 진품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순간 이성모의 얼굴 가득 득의양양한 표정이 그려졌다.
반면, 이성준을 비롯한 형제자매들의 얼굴에는 낙담한 표정이 역력해졌다.
게임 오버였다.
***
이성모는 필적 감정이 끝나자마자 한남동에서 동생들을 모조리 내쫒았다.
그 후, 경호원들을 동원해 집안의 내외부를 철통같이 경계했다.
성모는 부친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 곳에 있는 비밀 금고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서가 뒷면에 은밀히 숨어 있는 금고를 욕망에 불타는 눈으로 한참 동안 주시한 뒤, 금고의 디지털 제어판에 고문 변호사가 알려준 비번을 입력했다.
순간 금고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그의 눈 앞에서 영롱한 자태를 아낌없이 드러냈다.
금고 안에는 각종 귀금속과 유가증권, 스위스 은행에서 발행한 CD(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 등이 가득 들어있었다.
성모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채, 스위스 은행에서 발행한 CD를 두손에 한웅큼 들어올렸다.
CD는 장당 1억불에 상당하는 가치를 갖고 있었다.
총액 200억불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한화로 무려 24조원이었다.
그는 하늘에 오를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룹의 대권과 24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한방에 쟁취한 까닭이다.
그때, 노크 소리와 동시에 노집사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똑똑똑!
"김한빈씨가 도련님을 찾아왔습니다."
성모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허나, 그런 표정은 나타남과 동시에 금세 사라졌다.
직후 그의 입에서 사무적인 어조가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예. 도련님."
***
서재로 들어가자 이성모의 간사한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애써 표정관리를 하는 모양새였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그를 향해 훅 내뿜으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약속한 대로 대영물산의 지분 40%를 나에게 매각하십시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설마 계약을 불이행 할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원래 사람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 아닙니까? 후후..."
비릿한 조소를 내뱉으며 그의 야비한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녀식이 내 시선을 회피하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녀석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자, 그가 싫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며 고개를 뒤로 격하게 휘저었다.
내 앞에서 설설기던 예전의 이성모가 아니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담배 꽁초를 서재 바닥에 내던지며 그에게 말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이 곳에서 대영물산의 지분양도 매매계약을 체결 합시다."
"너무 서두르는거 아닐까?"
고개를 저으며 재차 말했다.
"시간을 질질 끌어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그럼 8시간 후에 이곳에서 다시 뵙죠."
그리 말하며 서재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
오전 10시.
장동현과 한남동 서재로 들어서자 이성모와 고문 변호사가 보였다.
그들에게 목례를 취한 뒤, 성모에게 말했다.
"대영물산의 지분 40%를 히말라야 인베스트먼트에 양도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합시다."
내 말이 떨어지자 장동현이 책상 위에 계약서 2부를 꺼내놓았다.
그러자 이성모와 고문 변호사가 계약서 하단에 자필서명과 인감도장을 차례로 날인했다.
대영물산의 지분 40%를 취득하는 순간이었다.
성모가 건네준 메모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스위스 은행의 후베르트에게 전화를 돌렸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그에게 용건을 밝혔다.
"히말라야 인베스트먼트 계좌에서 4억2천만불을 인출한 뒤, 내가 전송한 팩스에 나와있는 은행의 계좌로 전액 이체해 주십시오."
-팩스를 보내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리 말하며 메모지를 장동현에게 넘겼다.
메모지를 넘겨받은 장변은 서재에 있는 팩스를 이용해서 UPS 은행에 팩스를 발송했다.
이체 작업을 끝마친 뒤 성모에게 물었다.
"회장님 조문은 언제부터 할 생각이죠?"
그가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저녁 6시부터 조문이 시작될거다."
"그럼 저녁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장변과 서재를 빠져나왔다.
***
저녁 무렵.
상지원에 들어서자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거물들이 총집결한 채 이철성을 애도하는 광경이 시야에 포착됐다.
그들은 맏상주 역할을 맡고 있는 이성모에게 잘보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가 그룹의 대권을 장악했다는 소문이 시중에 파다하게 나돈 탓이다.
그 중에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로 전락한 이태강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최대 스폰인 이철성이 죽어서 그런지, 얼굴 가득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때문일까, 대한민국 최고 재벌로 등극한 이성모에게 잘보이기 위해 시종일관 온갖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자신과 영면한 이철성 회장과의 인연을 유난히 강조한 것이다.
내 입꼬리가 절로 비릿하게 말려올라갔다.
이태강의 추잡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목도한 탓이었다.
조문실에서 나오는 태강을 지나칠 무렵, 그가 놀란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김한빈! 네놈이 여길 왜 온거냐?"
그는 여전히 나를 김소영을 꼬여낸 제비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대검 특수부를 총괄하는 양반이 정보에 너무 어두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검사님."
그가 인상을 잔뜩 쓰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 후,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 곳은 너처럼 천박한 놈이 올 곳이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여기에서 나가!"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저도 초대를 받았거든요."
그리 말하자 태강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말이 진짜냐?"
"속고만 사셨습니까?"
그가 내 위아래를 유심히 살폈다.
그제야 내가 걸친 명품 수트와 시계 등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태강에게 재차 말했다.
"내가 미쳤다고 특수부 검사님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사람 의심하지말고 가시던 길이나 어여 가십시오."
그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그때, 조문실 안에 있던 성모가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나와 태강을 차례로 쳐다본 뒤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아시는 사입니까?"
그러자 태강이 당치도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반면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성모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조금 아는 사이죠. 뭐 그렇다고 친한 관계는 아닙니다. 워낙 무서운 분이시라..."
성모가 태강을 향해 말했다.
"제가 아주 아끼는 동생입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태강이 경악한 얼굴로 나와 성모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정말 저 놈과 친분이 있는 겁니까?"
그는 여전히 나를 이놈 저놈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성모마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볼 정도였다.
그에게 따끔한 경고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탓으로 내 입에서 날 선 언사가 절로 쏟아져 나왔다.
"이태강씨. 입을 조심하십시오. 말씀을 가려서 하라는 말입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태강이 온몸을 부들거리며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러자 성모가 곧바로 그를 달랬다.
"제 얼굴을 봐서라도 화를 푸십시오. 검사님."
그제야 태강이 못 이기는 척 머리를 끄덕이며 장내에서 도망치듯 몸을 감췄다.
그가 사라지자 성모가 호기심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태강과 악연이냐?"
"조금 그런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물론 형님도 마찬가지고."
"그게 무슨 뜻이지?"
성모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이성택을 구명한 게 바로 저 인간입니다. 이 회장과 편먹고 우리를 엿먹인거죠."
"흐으음..."
그의 입에서 침중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성모에게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저 인간은 나름 쓸모가 많습니다. 형님과 저의 종놈으로 만들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저놈을 요리할 생각이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장내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자정 무렵이었지만, 지하 피트니스 센터에는 여전히 이용객들이 있었다.
나를 수행하는 호텔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용객들을 모두 내보내세요."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잠시 뒤, 호텔 이용객들이 장내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제 나 홀로 속편하게 피트니스센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곧바로 대형 거울 앞에서 쉐도우 복싱을 시전했다.
한시간 정도 쉐도우 복싱을 만끽한 뒤 샌드백 치기에 돌입했다.
두시간 가량 샌드백을 난타한 후 벤치프레스와 데드리프트, 고중량 스쿼트에 차례로 몰두했다.
새벽 5시까지 헬스 3대 운동을 즐긴 뒤 수영장으로 향했다.
풀장에서 뭉친 근육을 풀며 여유로이 수영을 즐길 무렵, 호텔 직원이 내 앞에 나타났다.
"아침 식사를 뭐로 준비할까요?"
그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순두부찌개로 정하세요."
"한정식 레스토랑에 순두부찌개를 조리하라고 말하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그리 말하자 호텔 직원이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를 열잔 이상 마신 후유증 같았다.
그렇지만 별로 피곤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체력이 철철 넘쳐 흘러서 탈이었다.
김한빈의 신체는 일반인들과 여러면에서 많이 달랐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당최 지치지를 않았다.
흔히 하는 말로, 에너자이저 같은 무쇠체력이었다.
또한 추위와 더위도 별로 타지 않았다.
그런 때문인지 감기 따위의 잔병치레를 전혀 하지 않았다.
타고난 강골이었다.
***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후 호텔 정문으로 내려갔다.
정문에 도착하자 김태구를 필두로 30명의 경호원들이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해왔다. 그들에게 목례를 취한 뒤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운전석의 김태구에게 지시를 내렸다.
"카이저 빌딩으로 갑시다."
"예. 대표님."
그는 무전기를 이용해 여섯대의 봉고차량에 탑승한 경호원들에게 지시를 전달했다.
"카이저 빌딩으로 갈 예정이니까 롤스로이스를 앞뒤로 호위해!"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3대의 경호차량이 카이저 빌딩 방향으로 먼저 출발했다.
직후 나를 태운 롤스로이스가 앞서 출발한 봉고차를 부드럽게 뒤따랐다.
동시에 롤스로이스 후미에 또 다른 봉고차 3대가 바짝 따라붙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사이좋게 카이저 빌딩에 도착했다.
김태구와 경호원들을 지하 주차장에 남겨둔 채 탑층으로 올라갔다.
탑층에는 총 5개의 사무실이 있었다.
대표실과 법무실, 감사실, 비서실, 경리실 이렇게 다섯개였다.
그리고 대표실의 출입구 책상에는 대영호텔 비서실에서 차출한 여비서가 앉아 있었다.
박은영이 며칠 전에 새롭게 배치한 여직원이었다.
조민희는 나를 발견하자 조신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동현 법무실장을 호출하세요."
"예. 대표님."
***
사무실에서 커피와 흡연을 즐길 찰나, 장동현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가 제출한 보고서를 살피자, 태산그룹이 수도권 요지에 보유한 부동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원하는 자료였다.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그에게 명을 내렸다.
"안나푸르나 사모펀드 명의로 태산그룹이 수도권에 보유한 토지를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매입하세요."
"말씀대로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장동현을 내보낸 뒤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이목을 고정했다.
내 시선은 실리콘벨리에서 최근에 창업한 페이스북에 모아졌다.
페이스북은 2021년 경에 시가총액 800조원을 달성하는 대기업이 된다.
나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만간 페이스북에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막대한 투자수익을 얻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