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성모
대영그룹 서초동 사옥에 그룹의 총수로 등극한 이성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붉은 레드카펫을 위풍당당하게 거닐며 카페트 주변에 양열로 도열한 채,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임직원들을 오만한 시선으로 휘 둘러보았다.
성모는 회장실과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천천히 몸을 실으며 수행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 부회장을 회장실로 호출해."
"예. 회장님."
그는 회장실의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에 두발을 올려놓은 채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성모가 나른한 얼굴로 흡연을 즐길 찰나, 오종덕 총괄 부회장이 장내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오종덕에게 슬며시 물었다.
"이태강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오종덕이 즉답했다.
"법무부장관과 민정수석, 검찰총장이 3인 회동에서 이태강을 지방 고검장으로 발령내기로, 합의를 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모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내걸렸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
제퍼슨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원하는 소식이었다.
그런 탓으로 갑작스럽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주커버그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16시간의 비행 끝에 실리콘벨리의 관문으로 통하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약속장소인 그롬바일 빌딩으로 향했다.
빌딩 6층에 위치한 개인 사무실에 들어서자 20대 초반의 주커버그가 나를 반겼다.
"미스터 킴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당신에 대해서 많은 소문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리 말하며 주커버그와 악수를 교환했다.
우리는 곧바로 본론에 돌입했다.
주커버그가 말했다.
"10억불(1조2천억)을 일시불로 투자해 주신다면, 페이스북의 지분을 25% 가량 양도할 의향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최소 30% 이상의 지분을 원하고 있습니다."
"흐으음..."
그의 입에서 깊숙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분 30%를 넘겨주신다면, 지분양도 계약이 체결되는 즉시 10억 달러를 귀하가 지정한 계좌로 이체해 드리겠습니다."
결국 그는 내 요구를 수용했다.
그 정도로 자금사정이 급박한 처지였다.
주커버그의 입에서 결연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내일 오전 9시에 이곳에서 변호사 입회하에, 페이스북의 지분양도 계약을 체결합시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악수를 교환했다.
그 후, 인근의 호텔로 직행했다.
스위트룸에 여장을 푼 뒤 제퍼슨 회장에게 전화를 돌렸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내 요구를 전달했다.
"변호사를 섭외해 주십시오."
-지분인수 계약을 체결할 생각인가?
"예. 말이 잘 통하더군요. 그래서 속전속결로 일을 마무리 짓기로 합의했습니다."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일처리가 화끈하군. 부러울 지경이야.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내일 오전 중으로 변호사를 보내주지.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위치한 그롬바일 빌딩 704호로 내일 오전 9시까지 변호사를 보내주십시오."
-알겠네. 언제 시간되면 저녁식사나 같이하자고.
"예. 회장님."
***
다음날.
그롬바일 빌딩에서 페이스북의 지분양도 계약을 체결한 뒤 주커버그가 지정한 계좌로 총액 10억불을 이체했다.
그 후, 워싱턴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워싱턴 DC의 다운타운에 도착한 뒤 에바가 거처하는 단독주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남편을 뉴욕 월가에 남겨둔 채 워싱턴에서 혼자 거주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미니 드레스를 걸친 에바가 내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그녀는 나를 애타게 갈구했다.
그런 탓일까, 내 입술에 열정적인 키스를 거침없이 선사하며 사랑의 세레나데를 쉼 없이 읇조렸다.
우리는 뜨거운 시간을 만끽한 뒤, 침대에서 이러전런 대화를 길게 이어나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녀의 입에서 뜻 밖의 언사가 흘러나왔다.
"미국 대통령은 억만장자들의 꼭두각시야. 그들의 스폰을 받으면서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나중에는 대통령이 되는거지."
에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 집안은 원래 유력 정치인들을 스폰하는 가문 중의 하나야.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결심하셨어."
"너희 집안도 억만장자라는 말이냐?"
그녀가 순순히 인정했다.
"우리 가문은 석유와 군수업체를 보유하고 있어. 석유회사인 악손모빌과 군수업체인 락히드마틴, 내츄럴 일렉트릭이 우리 집안이 소유지."
악손모빌은 전 세계 최고 최대의 석유개발 회사였다.
그리고 락히드마틴과 내츄럴 일렉트릭 역시 전 세계 최고의 군수업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바의 가문은 내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찰나, 그녀가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자기가 수백억 달러 상당의 자산을 운용하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어."
"그런 말을 누구한테 들은거야?"
"아빠."
"상원의원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아빠랑 칼야이칸의 제퍼슨 회장이랑 막역한 사이거든.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
에바의 말은 계속 됐다.
"아빠가 자기랑 만나고 싶어하셔. 뭔가 제안하고 싶은 일이 있나봐?"
아담 상원의원은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언제 시간나면 아빠랑 만나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사랑스러운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
워싱턴 다운타운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아담 페런 상원의원이 따스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우리는 악수를 교환한 뒤 곧바로 저녁만찬에 돌입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아담이 본론을 꺼냈다.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차세대 전투기 개발 사업 규모가 200억불(24조원)에 육박하는 걸 알고 있나?"
"뉴스에서 얼핏 본거 같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자네에 대해 알아보니 한국 정관계에 나름 영향력을 갖고 있더군."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러자 아담이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영그룹의 이성모 회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 아닌가?"
아담은 나에 대해서 많은 걸 조사한 모양이었다.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있을까요?"
그가 솔직히 답했다.
"락히드마틴은 우리 가문이 소유한 군수업체일세. 당연히 한국이 추진하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 입찰할 예정이지."
아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경쟁이 만만치 않네. 프랑스와 러시아가 저렴한 가격과 기술이전을 무기로 한국 정부에 유혹적인 제안을 할거 같단 말이지."
"락히드마틴도 프랑스와 러시아에 버금가는 호조건을 한국 정부에 제시하면 될 일 아닙니까?"
"말은 쉽지만 여러가지 걸림돌이 많아. 미국 정부는 기술이전에 부정적이거든."
그리 말한 뒤, 두눈을 반짝이며 은근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락히드마틴의 로비스트로 일해주면 고맙겠군.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네."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에바와 아담은 나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그리 화답하자 아담이 환한 미소를 내보이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 딸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아직도 잊지 않았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하하..."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레스토랑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에바는 베이컨 샌드위치와 우유, 갓우려낸 진한 커피로 아침을 차려냈다.
아침 식사를 끝마친 뒤, 에바에게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청와대 인사들을 커버해줘."
"그들을 설득하라는 말이냐?"
그녀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한국의 무기체계는 미국 전투기에 최적화된 상태거든. 그 점을 자기가 어필해줘."
에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가격적인 측면에서도 프랑스와 러시아보다 결코 비싼게 아니라는 점을 확실해 홍보해줘."
"그렇지만 실제로 락히드마틴의 전투기가 프랑스와 러시아보다 30% 이상 비싼 게 현실이잖아?"
"그건 부품 수급을 감안 안했을때 얘기고, 실제 부품 수급을 고려할 경우 도리어 락히드마틴의 전투기가 운용비용이 더 저렴해."
그리 말하며 서류봉투를 내 손에 내밀었다.
"락히드마틴과 프랑스, 러시아 전투기들의 부품 수급 단가를 세밀하게 분석한 자료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에게 작별키스를 선사했다.
"나중에 보자."
그녀는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내 품에 고운 얼굴을 파묻었다.
"다음달에 워싱턴에 와줄 수 있지?"
"시간 봐서 올게. 너무 보채지 말고."
"자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라구!"
에바는 그리 말하며 내 품에서 당최 떨어질 기미를 안보였다.
나를 너무 사랑하는 탓이었다.
결국 가까스로 에바를 떼어놓은 채, 그녀의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 후, 워싱턴 공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서초동 일식당에 송경수 검찰 총장과 박종일 민정수석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박종일 민정수석이 넌지시 운을 뗐다.
"이태강 특수부 총괄 부장이 그동안 일을 많이 했으니까, 휴식을 주는 차원에서 제주도 고검장으로 영전시키는게 어떻습니까?"
"저 역시 제주도 고검장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그들은 나름 죽이 잘맞는 편이었다.
송경수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검 특수부 총괄 부장으로 조명훈을 임명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박종일이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문제는 청와대와 법무부에서 알아서 할 예정이니까, 총장님은 대검 특수부 인선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마십시오."
"끄응..."
송경수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막강한 파워를 지닌 대검 특수부에, 검찰 총장의 입김이 들어가는 걸 극력 경계하고 있었다.
송경수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감히 청와대의 의중을 거스를 수 없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총장님은 2년 임기를 채우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박종일은 냉정한 어조로 그리 말한 뒤,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강남 인근의 단독주택.
이태강은 분한 얼굴로 자택의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의 입에서 성난 어조가 흘러나왔다.
"육시랄 놈들! 감히 나를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고 잘 사나 보자!"
태강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을 수 없었다.
검찰의 정기 인사에서 제주도 고검장으로 좌천성 영전을 당한 탓이다.
직급은 검사장 급이었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는 보직이었다.
검찰 총장에 버금가는 막강한 실권을 휘둘렀던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명백한 토사구팽이었다.
그는 두가지 갈림길에 놓였다.
검찰 조직에서 명예롭게 퇴임하거나, 아니면 권토중래를 노리거나.
당연히 그는 후자를 택하기로 작심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총장직에 목숨을 걸었다.
대권은 나중 문제였다.
태강은 대한민국 정재계와 법조계, 언론계, 관계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영그룹의 총수 이성모에게 읍소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기댈 유일한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
한남동 접견실.
이성모는 거만한 자세로 육중한 책상에 좌정한 채 면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태강에게 심드렁한 언사를 내뱉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이태강이 애절한 얼굴로 읍소했다.
"이번 한번만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찾은 이유가 뭔지 그걸 말하라고요."
그제야 태강이 자초지종을 소상히 밝혔다.
그의 얘기를 무표정한 얼굴로 경청한 성모가 냉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청와대와 검찰에서 결정한 일을 나더러 어찌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태강이 머리를 완강히 저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청와대와 검찰에 구명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잘못된 검찰 인사를 되돌릴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어요. 미안하지만 내 집에서 이만 나가주시죠."
성모의 싸늘한 언사에 태강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직후 힘 없는 두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장내에서 쓸쓸히 사라졌다.
***
이성모는 자택의 서재를 서성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대영그룹의 대권을 장악했음에도 마음 한켠이 서늘했다.
김한빈이 보유한 대영물산의 지분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경영권에는 하등의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빈이 자신의 목을 강하게 옥죄는 듯한 위기감에 휩싸였다.
그 정도로 한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하루아침에 불귀의 객이 될 경우, 대영그룹이 통째로 한빈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날이 갈수록 극대화되었다.
그런 탓일까, 성모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지독한 살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최단 시일 내에 놈을 죽이는 게 최선이겠지? 그래야 내 속이 편해질거 같단 말이지."
성모는 한빈이 죽는 상상을 하자, 십년묵은 체증이 일거에 해소되는 듯한 통쾌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