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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58화 (58/175)

58화 욕망의 화신

퍼스트 클래스의 푹신한 좌석에 온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창 밖을 스치는 푸른 하늘과 짙은 운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무렵, 아름다운 백인 여승무원이 내 곁에 다가왔다.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입을 열었다.

"술과 디저트를 가져다 드릴까요?"

그녀에게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샴페인과 캐비어를 가져다 주십시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승무원은 아찔한 뒷태와 우아한 걸음걸이를 동시에 과시하며 퍼스트 클래스의 주방 쪽으로 이동했다.

잠시 뒤, 그녀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여승무원이 가져다준 샴페인과 캐비어를 차분히 음미할 즈음, 뒷좌석에서 한국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김한빈 대표님 아닌가요?"

그리 말하며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톱 여배우인 채수연이었다.

우리는 나름의 썸씽이 있었다.

이성모의 생일 파티에서 즐거운 추억을 함께한 사이였다.

그녀는 나를 확인하자마자 내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수연은 나를 조금 귀찮게 했다.

내가 어마어마한 재력가라는 사실을 잘 아는 탓이었다.

이성모가 나에게 설설 기는 장면을 여러차례 목도한 까닭이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연을 대동한 채 인근의 호텔로 직행했다.

오붓한 시간을 만끽하기 위함이었다.

***

카이저빌딩 로비에 들어서자 관리인과 경비원들이 나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경례를 올려부쳤다.

"충성!"

그들의 경례를 본체만체하며 탑층과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 쪽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런 탓일까, 카이저 빌딩을 드나드는 샐러리맨과 오피스걸의 시선이 내 일신에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내 신분이 극귀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들의 흠모하는 시선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천천히 닫았다.

대표실 책상에 앉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그 후, 국내외 증시에 이목을 집중했다.

내가 투자한 국내 증시의 주식 평가잔액은 4조원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뉴욕증시의 평가잔액은 거의 26조원 내외였다.

또한 해외와 국내 은행에 예치된 현금 자산은 2조원 안팎이었다.

모두 합할 경우 32조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70개의 업무용 빌딩과 대영호텔, 그리고 태산과 대영그룹의 총지주회사 지분을 각각 50.1% 40% 가량 손에 들고 있었다.

내 모든 자산을 미래의 현금 가치로 환산할 경우, 최소 100조원 이상이었다.

그런 탓일까, 흡족한 충일감이 전신에 팽배해졌다.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 부에 만족하지 않았다.

내 목표는 전 세계 최고의 억만장자였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오후 3시경.

장동현을 대동한 채 태산그룹 회장실로 들어갔다.

최동명 회장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우리는 수원과 용인, 이천의 공장부지를 시세의 5분1로 매입하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각자 35만평에 달하는 토지를 700억원에 매입하는 꼴이었다.

당연히 최 회장의 입은 계약을 체결하는 내내 귓가에 내걸렸다.

수천억대의 시세차익을 날로 먹은 탓이다.

우리는 계약을 끝마친 뒤 힘찬 악수를 교환했다.

"회사 부지를 저가에 매각했다는 소문이 나돌면 좋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임직원들의 철저한 입단속을 부탁드립니다."

최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임직원들에게 입을 조심하라고 단단히 주의시켰으니까."

"그럼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장동현과 회장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서울대학교 의대 본과 강의실에서 학기말 시험을 치룬 뒤 곧바로 회사로 직행했다.

탑층 사무실로 올라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에어컨 설정 온도가 높은거 같았다.

그래서 박은영에게 지시를 내렸다.

"에어컨 설정 온도를 17도 전후로 맞추세요."

그녀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17도로 설정하면 엄청 추워요. 대표님."

은영은 추위를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녀의 입장을 고려해 에어컨 설정 온도를 21도로 맞추라고 지시했다.

그제야 은영이 화사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대표님."

은영을 뒤로한 채 법무실장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독서에 여념이 없는 장동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장동현에게 목례를 취한 뒤 책상 위에 놓여진 서적으로 시선을 모았다.

책의 겉표지에는 '미합중국 그림자정부'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본능적으로 내 호기심을 잡아끄는 제목이었다.

"그 책이 뭐죠?"

장변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국 음모론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집대성한 소설입니다."

"음모론에 관련된 책인가요?"

"대충 그렇죠."

"제가 한번 읽어봐도 될까요?"

그가 흔쾌히 머리를 끄덕이며 책을 나에게 내밀었다.

장변의 책을 손에 든 채 내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그 후, '미국 그림자정부'라는 책에 홀린듯이 빠져들었다.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 책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그림자 정부의 내용은 월가와 군산복합 업체의 거물들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암중에서 지배하며, 자기들 입맛에 맞는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더불어 자기들의 사익을 위해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활용한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책 내용의 진위 유무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미국을 암중에서 지배하는 대자본가 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름 현실적인 음모론이었다.

문득 한국의 경제, 정치, 군사 등의 모든 방면을 암중에서 지배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내 모습이 뇌리에 저절로 연상됐다.

나는 그날, 내 사익에 부합하는 그림자정부를 한국에 구축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지하 피트니스 센터에서 벤치프레스와 데드리프트, 고중량 스쿼트에 열중할 무렵, 경호원들이 장내에 벌떼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직후, 나와 마찬가지로 헬스 3대 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혼연일체로 화신한 채 근력 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런 탓인지 금세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2시간 동안 3대 운동에 매진한 뒤 경호원들과 옆쪽에 위치한 풀장으로 향했다.

우리는 수영으로 뭉친 근육을 푸는 한편, 이런저런 잡담을 길게 늘어놓았다.

다음날.

티셔츠와 청바지, 배낭을 등에 멘 채 호텔 1층으로 내려갔다.

정문으로 나가자 롤스로이스 팬텀이 내 옆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자리를 잡은 뒤 운전석의 박영록 경호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서울대학교로 갑시다."

"네. 대표님."

1시간 후.

박영록과 경호원들을 뒤로한 채 의대 강의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1학기 마지막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그런 탓인지 동기 녀석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대다수 해외 배낭 여행을 꿈꾸는 모양새였다.

강의가 끝난 뒤 학교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박영록이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문을 정중히 열어주었다.

그에게 목례를 취한 뒤 뒷자리에 몸을 실었다.

직후 나를 태운 롤스로이스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

대영그룹 서초동 사옥.

30명에 달하는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1층 로비로 들어갔다.

그런 탓일까, 대영그룹의 보안요원들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우리 일행을 막아섰다.

보안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완강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희 회사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들은 내가 대영그룹 총지주회사의 지분을 무려 40%나 보유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때, 이성모의 수행비서인 엄기훈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가리키며 보안팀장에게 날 선 언사를 내뱉었다.

"이 분은 대영그룹의 사외이사님일 뿐만 아니라, 회장님이 매우 아끼시는 분입니다. 지금 당장 사과하세요!"

수행비서가 목소리를 높이자, 보안팀장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됐습니다."

짤막하게 대꾸한 뒤 경호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층 로비에서 대기하세요."

"네. 대표님."

경호원들을 뒤로한 채 엄기훈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회장실이 있는 탑층에 도착하자 이성모의 비서진들이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그들에게 목례를 취한 뒤, 회장실 쪽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회장실에 들어서자 책상에 앉은 성모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결재서류에, 회장 직인을 날인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창가 쪽으로 몸을 옮겼다.

언제나 하는 생각이지만 고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인간들이 하찮게 느껴진다.

길거리를 분주히 왕래하는 사람들이 일개미처럼 보이는 탓이다.

반면 나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된 것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때문일까, 대한민국을 내 마음대로 요리하고 싶은 불같은 야망이 대뇌피질을 성난 야생마처럼 질주했다.

돈과 권력 모두 일신에 구비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성모의 조력이 절실했다.

녀석이 갖고 있는 대영그룹의 막강한 인맥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줄 예정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지배할 찰나, 성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연락도 없이, 회사에는 갑자기 왜 온거야?"

"이태강을 만났다면서?"

"응. 내 집에 찾아와서는, 구명을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더라고."

그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내년에 놈을 검찰총장으로 끌어올릴 생각이야."

그러자 성모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1년 정도 묵혀놨다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써먹자고."

"너무 빠른거 아닐까?"

"물론 그 전에 충성맹세를 받아야지."

"충성맹세?"

"절대적인 충성을 약속하는 서약서에, 놈의 인감도장과 열손가락의 지장을 찍게 만들어야지."

녀석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너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는거냐? 정말 놀랄 노자다!"

그의 오버스런 언사에 별다른 반응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담배 연기를 자욱이 말아올리며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미국을 암중에서 지배하는 그림자 정부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

성모가 은근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런 뜬소문을 믿는거야?"

"나름 합리적인 음모론이라, 절로 마음이 가더라고."

"그런거 믿을 시간에 돈벌 궁리나 해라."

성모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나는 대한민국 전부를 내 손아귀에 쥐고 싶어."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정재계와 관계, 법조계를 완전히 지배하는 게 내 목표라고 할 수 있지. 물론 형과 같이."

그러자 녀석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며 머리를 미친 듯이 끄덕거렸다.

"이태강은 귀한 물건이야. 나중에 쓸모가 무궁무진하지. 우리는 그걸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동생이 하자는대로 다 할테니까, 절대 독자플레이는 하지마라. 부탁이다."

성모는 내가 독자적으로 행동할까봐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위대한 능력을 잘 아는 탓이다.

"그 전에 형이 한가지 해줄 일이 있어."

"그게 뭔데?"

"일단 이거를 받아."

그리 말하며 노란 봉투를 그의 손에 전달했다.

성모는 락히드마틴과 프랑스, 러시아 전투기의 운용비용이 낱낱이 드러난 보고서를 대충 훑은 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거지?"

"나 대신 청와대에 로비를 해줘. 락히드마틴 전투기의 우수성과 가성비를 제대로 전달해 달라고."

"설마, 락히드마틴의 로비스트로 일하기로 계약한거야?"

"그건 아니고, 사적으로 인연이 있어서 조금 도와주는 차원이야."

"그 말이 그거지. 뭐."

"하여튼 형만 믿을게."

성모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았다. 내가 한번 알아볼게."

"한미 우방차원에서 하는 일이니까, 그 점을 염두에 두라고."

그리 말하며 녀석의 사무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학교에서 강의를 끝마치자마자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김포공항으로 직행했다.

제주 고검장으로 좌천아닌 좌천을 당한 이태강을 위문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내 방문이 조롱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제주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태강의 제주도 관사로 직행했다.

관사 경비실에 신분을 밝히자, 수행비서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이태강의 거처로 정중히 안내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이태강이 창가에 우두커니 선 채 흡연을 즐기는 광경이 보였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냉랭한 어조로 나를 맞이했다.

"네놈이 여긴 웬 일이지?"

"아직도 나를 이놈 저놈으로 취급하시는군요. 후후..."

비릿한 조소를 흘려보내자 태강이 분노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호스트바에서 굴러먹던 놈이 감히 누구와 맞먹는 것이냐!"

"뭔가 착각을 하시나본데 저는 호빠에서 일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검사님."

"네놈이 제비 출신이라는 사실을 내가 모를줄 알아!"

그는 여전히 성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이래서 사람은 선입견이 참으로 무섭다.

그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자신의 여동생을 홀린 기생오라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갑에서 1억짜리 수표 5장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돈으로 용돈이나 하십시오. 나중에 검찰 총장으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 낚시나 다니시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세요."

그리 말하자 태강의 눈에 짙은 의혹이 떠올랐다.

직후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와 이성모 회장의 관계를 말해봐라."

"정말 알고 싶으십니까?"

그의 머리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이성모는 내 말이라면 껌벅 죽습니다. 그 정도만 알고 계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장내를 유유히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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