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이 돈을 숨김-60화 (60/175)

60화 아흐메디 왕세자 1

현성그룹은 재계서열 15위권의 대기업 집단이었다.

허나, 그들은 회사 창립이래 이렇다할 본사빌딩이 전무했다.

창업주인 오승태 회장의 자린고비 경영철학 때문이었다.

그런 오승태가 별세하자 그룹의 대권을 물려받은 오정수는 서울 시내 요지에 본사 빌딩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빌딩을 건설하는 것 보다는 기존의 업무용 빌딩을 매입할 계획이었다.

그 편이 시간도 단축되고 재정적으로 이익이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런 오정수의 레이더망에 서울 중구에 위치한 45층 규모의 태성 빌딩이 포착됐다.

그는 곧바로 태성 빌딩을 관리하는 히말라야 리츠 관계자에게 건물을 매입하고 싶다는 의중을 전달했다.

하지만 한달이 지났음에도 히말라야 리츠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히말라야 리츠의 사무실이 있는 논현동 인근의 카이저 빌딩을 직접 방문했다.

그는 히말라야 리츠의 책임자인 장동현의 사무실에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태성빌딩을 매입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매각 희망가를 제시해 주십시오."

동현이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히말라야 리츠의 관리인에 불과합니다. 정확한 매각가는 제가 모시는 대표님이 정할 문젭니다."

"그럼 그 분을 만나게 해주시죠?"

"죄송하지만 대표님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동현이 딱 부러지게 말하자, 오정수가 애가 타는 얼굴로 매입 희망가를 제시했다.

"2,900억까지 배팅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대표님에게 제 말을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

카이저 빌딩.

회사에 출근하자 장동현 법무실장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에게 긴히 보고할 사안이 있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오십시오."

"네. 대표님."

그는 나를 따라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긴급 현안을 보고했다.

"현성그룹의 오정수 회장이 사무실에 직접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이 곳에 나타난 이유가 뭐죠?"

"현성그룹이 태영빌딩을 매입하겠다고, 얼마전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우리가 태영빌딩을 얼마에 매입했죠?"

"2400억입니다."

"오정수 회장이 제시한 가격을 말해보세요."

"2900억입니다."

그들은 택도 없는 가격을 원하고 있었다.

"6천억 이하로는 빌딩을 매각할 생각이 없다고 전하세요."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

현성그룹 광화문 사옥.

오정수는 회장실의 고풍스런 책상에 좌정한 채 본부장의 구두 보고를 듣고 있었다.

"히말라야 리츠에서 답변이 왔습니다."

"그들이 뭐라던가?"

"태영빌딩을 매입하려면 최소 6천억 이상의 가격을 제시하라고..."

본부장은 오정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오 회장의 입에서 거친 억양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돈독이 잔뜩 올랐구나!"

하지만 오정수는 태영빌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위치도 좋았고, 건설된지 5년 밖에 안된 탓에 내구연한이 앞으로도 수십년 이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심이 역력한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 뒤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영빌딩을 6천억에 매입하는 방안에 대해서 검토해봐."

본부장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들의 장단에 춤출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회장님."

"누가 그걸 몰라! 그렇지만 태영빌딩은 위치가 너무 좋다고! 그러니까 내가 말한대로 일을 추진해!"

결국 본부장이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회장님."

***

점심 무렵.

사무실 밖으로 나서자 박은영과 이수경이 보이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박종태의 사무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복도 끝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종태가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대표님이 제 사무실에는 갑자기 왜...?"

내 갑작스러운 방문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당연히 할 말이 있어서 왔죠."

그리 말하자 종태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에게 너그러운 어조로 말했다.

"드시던 커피나 마저 드시죠."

그리 말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질 찰나, 등뒤에서 종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실 말씀이 뭔지요?"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에게 말했다.

"대영그룹의 이사진 중에서 20명 정도를 솎아낼 생각입니다."

"그들의 비위를 조사하라는 말씀입니까?"

"네."

짤막하게 대꾸하자 종태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 혼자서 그들을 조사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감사직원들을 확충해 달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대표님."

"호텔에 있는 감사 직원들을 활용하시죠?"

"그들은 거의 모두 민간인 출신이라 조사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몇명이나 필요하시죠?"

"전직 형사들 위주로 최소 5명 이상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일주일 안으로 전직 형사들을 스카웃하세요."

"연봉은 얼마나 제시해야 할까요?"

"억대 연봉과 400%에 달하는 보너스를 약속하십시오."

***

내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입에 담배를 물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뒤로 이태강과 이성모의 욕심많은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들은 이용가치가 아주 많은 종놈들이었다.

물론 나에게 항명할 경우, 즉각적인 보복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

여름방학이 시작됐지만 나는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태산그룹의 경영정상화에 발벗고 나선 까닭이다.

태산그룹의 핵심은 태산조선이었다.

태산조선은 중국 조선업체의 무자비한 저가 수주 때문에 곤경에 처한 형편이었다.

그런 탓으로 태산조선은 LNG선 수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중국 조선업체의 주력 업종인 정크선 수주 경쟁에서 탈피하기 위함이었다.

태산조선은 중동의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 아라비아를 상대로 LNG 선박 수주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8월의 무더운 어느날.

태산조선의 이정석 사장을 카이저빌딩 사무실로 호출했다.

LNG 선박 수주현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면전에 나타난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반응이 있나요?"

그가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가격만 적당하다면, 수주가 가능할거 같습니다."

"경쟁업체가 어디죠?"

"한국의 현도중공업과 대유조선, 일본의 히타치조선 등입니다."

"그들과 태산조선의 LNG 건조능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주십시오."

이정석이 자부심 그득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 태산조선의 LNG 건조능력은 전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입찰가격만 적절하다면 반드시 수주를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의 믿음직한 확언이었다.

그때, 벽면을 장식한 대화면 TV에서 긴급 경제 속보가 흘러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가 발주한 LNG 선박 35척을 현도중공업이 전량 수주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략...

이정석의 얼굴이 짙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공교로운 순간이었다.

그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쿠웨이트 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다른 회사에 LNG 선박 수주를 뺏긴다면, 태산그룹은 하루아침에 도산할 겁니다."

바람 한점 불지않는 실내임에도 정석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 정도로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쿠웨이트 왕복 항공편을 예약하세요. 내가 직접 쿠웨이트에서 담당자를 만나볼 생각이니까."

그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복명했다.

"예. 대표님."

***

다음날,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에 이정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쿠웨이트 LNG 선박의 발주 전권을 갖고 있는 아흐메디 왕세자에 대해서 구두 보고를 올렸다.

"아흐메디 왕세자는 비자금을 조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희 태산조선과 타 경쟁업체에게 직간접으로 리베이트를 타진하고 있습니다."

"대놓고 뒷돈을 달라는 건가요?"

"원래 중동지역은 그런 식으로 모든 거래가 돌아갑니다."

돈질이라면 자신있었다.

내 전문분야였다.

"아흐메디 왕세자와 자리를 만들어 보세요. 내가 직접 그자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니까."

이정석이 걱정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왕세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경우, 거래 자체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나이는 어려도 사람 다루는 재주는 나름 있는 편이니까."

그리 말하며 나가라는 손짓을 보내자, 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이정석을 내보낸 뒤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줄담배를 말아올리며 태산조선에 집중했다.

내 의도대로 쿠웨이트가 발주한 LNG 선박을 수주할 경우, 태산조선의 주가는 최소 3일 이상 상한가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았다.

태산그룹의 흑자도산 우려를 말끔히 걷어낼 수 있는 엄청난 호재였기 때문이다.

LNG 선은 한척에 수천억을 호가하는 고부가가치 선박이었다.

더구나 쿠웨이트는 그런 선박을 무려 20척이나 발주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넋놓고 있을 시간 따위가 없었다.

짭잘한 돈벌이 기회가 눈 앞에 다가온 탓이다.

곧바로 응접실 책상에 좌정한 채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기를 얼마 뒤, 스위스와 케이맨제도, 버진 아일랜드 등에서 설립한 30개의 사모펀드 명의로 태산조선의 주식을 각각 200억씩 미친 듯이 매집했다.

총액 6천억에 달하는 액수였다.

모든 작업을 끝마친 뒤 최동명 회장에게 전화를 돌렸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에게 내 의중을 획실히 밝혔다.

"내가 직접 쿠웨이트로 날아가서 담판을 지을 생각이니까, 회장님은 반대하지 마십시오."

수화기에서 최 회장의 은근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최전무에게 맡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죄송하지만 최종연 전무에게 일을 맡기는 바람에, 현도중공업에게 LNG 선박 수주를 뺏겼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직접 전면에 나서겠습니다."

내 말은 계속 됐다.

"쿠웨이트가 발주하는 LNG 선박마저 다른 회사에 뺏긴다면, 태산그룹은 그날부로 공중분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내 피같은 돈 7천억을 날로 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제야 수화기에서 최 회장의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에게 재차 따금하게 일갈했다.

"자기 처지를 잘 분간하십시오. 그럼 이만."

통화를 끊자마자 장동현에게 전화를 돌렸다.

"며칠 동안 쿠웨이트로 출장을 떠날 계획이니까, 태성빌딩 매각은 장변이 알아서 하십시오."

-현성그룹이 오늘 태성빌딩을 6천억에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장변이 책임지고 매각 계약을 체결하세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

이정석과 함께 쿠웨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 후, LNG 선박 발주의 전권을 갖고 있는 아흐메디 왕세자와 시내 모처에서 만남을 가졌다.

아흐메디 왕세자에게 유창한 영국식 영어로 말했다.

"우리 태산조선은 전 세계 최고의 LNG 선박 건조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흐메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냉정한 어조로 답했다.

"그 사실은 저희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가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말하며 노회한 시선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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