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아흐메디 왕세자 2
아흐메디와 1차 면담을 끝마친 뒤 쿠웨이트 시내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이정석과 늦은 저녁을 함께하며 LNG 선박 발주의 전권을 갖고 있는 아흐메디 왕세자에 대해 물었다.
"아흐메디의 권력이 어느 정도죠?"
정석이 즉답했다.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환에 시달리는 부왕을 대신해서 거의 모든 국정을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사실상의 통치자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사님."
아흐메디에 대해 재차 물었다.
"그가 원하는 리베이트 규모를 파악하셨나요?"
"선박 1척당 최소 600억이 넘는 리베이트를 요구할거라는 소문이 돌더군요."
"LNG 선박의 척당 수주 가격이 얼마죠?"
"대략 6천억 안팎입니다."
아흐메디는 LNG 선박 판매 가격의 10% 정도를 리베이트로 원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사실을 다른 조선업체도 알고 있나요?"
"거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현도중공업에 버금가는 LNG 선박 건조기술이 있습니다. 그걸 제대로 어필하면 충분히 수주가 가능할 겁니다."
"그렇지만 리베이트 액수도 무시할 수 없어요."
"10%에 달하는 리베이트를 그에게 약속하실 계획입니까?"
"10%는 힘들거 같고, 20% 정도로 합의를 볼 생각입니다."
이정석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리베이트를 제공하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지금 급한 건 태산그룹의 자금 경색을 일거에 해소하는 일입니다. 그 방법으로 제일 좋은 건 LNG 선박 수주고."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 태산조선이 LNG 선박을 수주했다는 뉴스가 국내에 전해진다면 금융권의 신규대출은 물론이고, 기존 대출의 만기연장도 얼마든지 가능해 질거라는 뜻입니다."
그제야 정석이 납득한 얼굴로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시키는 일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단단히 못을 박은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미 답은 나왔다.
이제 실행만 남았다.
***
다음날.
시내 모처에서 아흐메디 왕세자와 또 다시 만남을 가졌다.
그에게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왕세자 전하를 다시 뵙게 되어 진정으로 영광입니다."
그리 말하며 아흐메디에게 악수를 청하자 그가 환한 웃음을 내비치며 내 손을 마주잡았다.
우리는 소파에 자리를 잡은 뒤 차를 음미하며 본론에 돌입했다.
그에게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태산조선은 전 세계 최고의 LNG 선박 건조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흐메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주 월요일 오전 10시에 공개 입찰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합리적인 가격으로 입찰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흐메디는 형식적인 언사를 앵무새처럼 내뱉었다.
그에게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현도중공업은 무려 35척에 달하는 LNG 선을 수주한 덕분에, 귀국의 LNG 선박을 납기일 안에 건조할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대유조선과 히타치조선은 LNG 선박 건조 능력이 매우 일천한 수준입니다."
그리 말하자 아흐메디가 은근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말씀을 저에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번거로운 공개 입찰 대신 수의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수의계약이라...?"
"왕세자 전하에겐 그럴 만한 권한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선박 가격의 20%를 전하에게 리베이트로 제공하겠습니다."
아흐메디가 신중한 얼굴로 물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물담배를 연신 흡입하며 내 제안을 곰곰이 되새기는 눈치였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결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귀하가 원하는대로 태산조선에 20척에 달하는 LNG 선박을 발주하겠소. 대신 약속대로 내가 지정하는 계좌에 판매가격의 20%를 곧바로 리베이트로 제공해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발주 계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선박대금의 60%를 일시불로 지불하십시오. 그래야 저희도 전하에게 리베이트를 원활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아흐메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60%는 힘들고, 계약금과 중도금 명목으로 선박 가격의 40%를 집행해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닙니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금융권의 추가 대출과 기존 대출의 만기 연장이었다.
"좋습니다. 왕세자 전하."
그리 말하며 아흐메디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와 힘찬 악수를 교환한 뒤 시내 호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이정석에게 지시를 내렸다.
"태산조선이 12조원에 달하는 LNG 선박을 수주했다는 소식을, 내일 오후 2시에 국내외 언론사에 전달하세요."
정석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복명했다.
"예. 이사님!"
LNG 선박 뉴스가 국내외에 전해지면, 태산그룹은 그 즉시 자금난이 해소될 운명이었다.
금융권 대출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기존 채무 역시 연장되는 탓이다.
***
다음날 오전.
호텔 조식으로 배를 채운 뒤 국내 증권회사 관계자에게 전화를 돌렸다.
"히말라야 사모펀드 증권 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죠?"
-2,740억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그 돈을 모두 태산조선 주식을 매입하는데 사용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표님.
통화를 끝마치자마자 장동현에게 국제전화를 돌렸다.
"현성그룹과 태영빌딩 매각 계약을 체결하셨습니까?"
-이번주 금요일에 매각계약을 체결하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장변이 책임지고 태영빌딩 매각작업을 신속정확하게 처리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
태산그룹의 최동명 회장은 자택의 거실에서 TV 뉴스를 홀린 듯이 시청하고 있었다.
-태산조선이 쿠웨이트 조달청이 발주한 LNG 선박 20대를 전량 수주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태산조선이 12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수주물량을 확보한 덕분에, 태산그룹 전체의 자금난이 일거에 해소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중략...
최동명의 얼굴에 기쁨과 걱정이 번갈아 교차됐다.
그룹의 재정난이 일시에 해소된 점은 당연히 기뻐할 일이었지만, LNG 선박 수주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한빈이 커다란 걱정거리로 다가온 탓이다.
최 회장은 불안한 심경에 휩싸였다.
그의 뛰어난 사업수완에 겁을 잔뜩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태산그룹의 사옥으로 직행했다.
1시간 후.
태산그룹 사옥에 들어서자마자 이정석과 함께 34층에 위치한 구조조정 위원장실로 들어갔다.
이 곳은 태산그룹이 나에게 내어준 개인 사무실이었다.
복도 책상에 앉아 있는 여비서에게 목례를 취한 뒤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재무회계실장을 호출하세요."
"예. 대표님."
곧바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서 이정석과 사이좋게 흡연을 즐길 찰나, 김연성 재무실장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게 물었다.
"쿠웨이트에서 돈이 왔습니까?"
그가 즉답했다.
"오늘 오전에, LNG 선박의 계약금과 중도금에 해당하는 4조8천억에 달하는 외화가 태산그룹의 공식계좌로 입금됐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뒤 그에게 메모지 한장을 건넸다.
"메모지에 적힌 은행의 계좌로 20억불(2조4천억)을 곧바로 이체하십시오."
그러자 녀석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쿠웨이트의 아흐메디 왕세자와 이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선박 수주 대금의 20%를 리베이트로 제공하기로."
"그런 사실을 회장님도 아시나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재차 독촉했다.
"지금 당장 이체작업을 진행하세요. 돈이 늦게 입금되면 아흐메디 왕세자가 난리 칠수 있으니까."
재무실장이 긴장한 얼굴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이체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이체작업이 완료되는 즉시 나에게 보고를 올리세요."
"예. 이사님."
그를 내보낸 뒤 이정석에게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태산조선에서 집행하는 자금이 100억이 넘을 경우, 나에게 빼놓지 말고 보고하세요."
정석은 내가 태산그룹의 최고 실세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내 명령에 순순히 복명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네. 이사님."
정석을 내보낸 뒤 국내 주식시황에 이목을 집중했다.
예상대로 태산조선은 상한가를 친 상황이었다.
나는 5일 만에, 무려 3천억에 육박하는 시세차익을 얻었다.
모두 내가 잘난 덕분이었다.
***
대영병원 VIP 병실에 이성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초췌한 안색으로 병상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모친을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 동안 주시했다.
성모는 자신을 낳아준 모친에게 별다른 정이 없었다.
그는 갓난 아기 시절부터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반면 모친은 해외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숱한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본처의 견제와 이철성의 홀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모는 그런 속사정을 모두 핑계로 생각했다.
그런 탓일까, 내심 모친이 하루 빨리 죽기를 소원했다.
그녀가 소유한 수천억대의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할 욕심이었다.
성모는 20조원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비자금과 수조원대의 개인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돈욕심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다.
그는 VIP 병실을 나선 뒤 병원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성모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의 병환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병원장이 고심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래부터 폐기능이 나빴는데, 급성 폐렴이 겹치는 바람에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수술이 불가능한 상황인가요?"
"워낙 신체기능이 떨어진 탓에 수술이 불가한 형편입니다. 회장님."
성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허나, 병원장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바람에 미처 그런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통증이라도 덜어주는 차원에서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해 주십시오. 그리고 어머님에게 일이 생기면, 저에게 곧바로 연락하시고."
"예. 회장님."
***
한남동 자택에 도착한 이성모는 서재를 거닐며 김한빈에 대해서 생각했다.
성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빈이 심복지대환(心腹之大患)으로 느껴졌다.
더구나 그는 대영그룹의 총지주회사인 대영물산의 지분을 40%나 보유하고 있었다.
성모의 심중에 한빈의 잘생긴 얼굴이 짙게 드리워졌다.
동시에 극심한 공포심이 전신에 팽배해졌다.
한빈은 범인(凡人)의 상상을 초월하는 독심(毒心)을 지니고 있었다.
성모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탓일까, 바람 한점 불지 않음에도 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더불어 성모의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돋아났다.
그는 어금니를 피가 날 정도로 앙다물며 두 주먹을 거세게 말아쥐었다.
성모는 이성택 살인사건의 진범이 한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성택 살해사건의 공범이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한빈에게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탓이다.
검경에 고발자체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살인청부업자를 동원해서 한빈을 제거하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잠시 후, 그의 면전에 노집사 이영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모의 입에서 스산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박사장에게 일을 맡기세요!"
노집사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람 잡는 백정을 함부로 사용하시면 안됩니다. 회장님."
"다 필요가 있어서 그런거니까, 내 말대로 하십시오."
노집사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성모의 음험한 목소리가 장내에 재차 울려퍼졌다.
"목표물은 말 안해도, 누군지 잘 아실 겁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선금조로 3억을 건네세요. 그리고 일이 성공할 경우 10억을 더 주겠다고 약을 치세요."
"알겠습니다."
노집사는 그 말을 끝으로 서재를 조심스럽게 물러나왔다.
다음날 밤.
노집사 이영택은 한남동을 빠져나온 뒤 고즈넉한 공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후, 박사장이란 남자에게 현찰 3억을 전달한 뒤 장내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영택은 살인청부를 끝마친 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