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림자정부
한강 공원 벤치에 자리한 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노집사 이영택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인 뒤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영택의 입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성모가 박승학 상무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박승학이 누구죠?"
"주류도매상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실제로 하는 일은 납치와 살인청부로 알고 있습니다."
서류 가방에서 액면가 1억원 짜리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 10장을 꺼내서 그에게 전달했다.
"시중은행에서 언제든지 현금화가 가능합니다. 요긴하게 쓰십시오."
이영택이 감격한 얼굴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노집사는 그리 말하며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곧바로 박종태에게 전화를 돌렸다.
"주류도매 업체를 운영하는 박승학의 주변에 경호원들을 배치하십시오."
-그가 누구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살인청부업자로 알고 있습니다."
수화기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졌다.
직후 종태의 은근한 어조가 들려왔다.
-이성모가 대표님을 노리는 겁니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테니까 내 말대로 조치를 취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
태산그룹 사옥으로 들어선 뒤 이사회장이 있는 24층으로 곧바로 올라갔다.
경호원들을 출입구에 배치시킨 뒤 당당한 걸음걸이로, 이사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30명에 달하는 이사진들이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 중에는 최동명 회장도 포함되었다.
내 덕분에 그룹이 기사회생한 탓이었다.
쿠웨이트에서 수주한 LNG 선박은 태산그룹의 자금난을 일거에 해소하는 일대쾌거였다.
금융권 대출이 하루아침에 재개되었으며 채무상환도 연기된 탓이다.
최동명 회장의 옆에 앉은 뒤 이사진들을 향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우리가 이 곳에 모인 이유는 적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룹의 계열사들을 속전속결로 매각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적자 계열사 매각 안건을 신속하게 통과시켜 주십시오."
그리 말하자 이사진들이 일제히 머리를 끄덕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태산그룹의 실권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두 눈치챈거 같았다.
잠시 후.
태산택배와 태산패션, 태산카드, 태산화학, 태산홈쇼핑, 태산리조트의 매각 안건이 이사회에 상정되었다.
그 결과 만장일치의 찬성 속에 태산의 적자 계열사 매각 안건이 이사회를 순조롭게 통과됐다.
***
이사회장을 나온 뒤 탑층에 위치한 회장실로 최동명과 나란히 올라갔다.
우리는 회장실에 들어선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성오 미래전략본부장을 호출했다.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줄담배를 말아올릴 무렵, 진성오 본부장이 회장실에 나타났다.
그는 책상에 앉아 있는 최동명과 나를 향해 차례로 허리를 숙인 뒤 장내에 공손히 시립했다.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미래전략본부 산하에 태산패션, 태산카드, 태산화학, 태산홈쇼핑, 태산리조트, 태산택배, 태산패션의 매각을 전담하는 태스크포스팀을 조직하십시오."
그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복명했다.
"네. 이사님."
"중요한 건, 매각 속도니까 푼 돈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4달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십시오. 만약 그 기간 동안 가시적인 매각 성과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당신은 그날부로 해고조치될 겁니다."
진성오가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복명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 갖고는 부족합니다. 반드시 매각 성과를 달성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진성오를 내보낸 뒤 최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집안의 친인척들이 그룹 계열사에 고위 간부로 이름만 올려놓은 채, 고액의 연봉을 타먹는 사례가 부지기수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움찔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며 변명 조의 언사를 내뱉었다.
"그게, 말입니다. 피치못할... 사정이..."
"변명은 그만두시죠."
냉랭하게 대꾸하며 최동명을 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최 회장은 내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게 재차 날 선 어조를 내뱉었다.
"한달 안에 친인척들을 그룹에서 모두 정리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회장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대흥동에 위치한 주류도매상에 전직 경찰특공대 출신의 용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눈치 빠른 박승학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살인청부를 맡자마자 범상치 않은 남자들이 주변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창문 너머로 주변을 서성이는 10명 남짓한 남자들을 예의주시했다.
그들 모두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그리고 눈빛이 하나같이 강렬했다.
승학은 그런 모습을 확인하자, 두려운 감정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격투기에 능한 실전파였다.
뒤룩뒤룩 살만 찌운 양아치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스타일이었다.
그는 한눈에 그런 사실을 꿰뚫어봤다.
승학은 자신이 커다란 실수를 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목표물의 정확한 신상도 파악하지 않고 덥석 청부를 받은 결과, 도리어 자기 신변에 커다란 위험이 발생한 탓이다.
목표물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물임이 확실했다.
자신이 끼어들 판이 아니었다.
승학은 모종의 결심을 굳힌 뒤 중간 연결고리인 노집사 이영택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
늦은밤.
이영택은 한남동에 도착한 이성모에게 조심스런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김한빈의 실체를 확인한 박사장이 지레 겁을 먹었는지, 이번 일에서 빠지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순간 성모의 입에서 거친 억양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개자식한테 돈을 더 준다고 말해!"
"그런 말을 해봤지만, 한사코 청부를 거부하더군요."
이영택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김한빈의 주변에는 최소 30명 이상의 경호인력이 항상 진을 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국내에서 그를 처리하는 건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가 뜨악한 얼굴로 반문하자, 영택의 입에서 은근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총기 사용이 자유로운 미국으로 김한빈을 유인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
순간 성모가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며 머리를 미친 듯이 끄덕거렸다.
노집사의 묘안이 그럴듯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한빈은 해외에서 대규모 경호인력을 가동하지 못할 겁니다. 총기허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따라 노집사는 성모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귀한 조언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
올림픽 공원의 구릉지에 위치한 몽촌 토성의 벤치로 다가가자 이영택이 나를 반겼다.
그의 옆에 자리를 잡자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조만간 이성모는 대표님에게 미국 여행을 제안할 겁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대표님을 총으로 처리하겠죠."
내 입가에 절로 쓴 웃음이 그려졌다.
성모는 선을 넘었다.
종놈처럼 부리려고 했지만, 녀석은 종놈이기를 거부하는 모양새였다.
그에게 준비해온 10억원 상당의 CD(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를 넘긴 뒤 장내를 유유히 벗어났다.
***
서울의 밤거리를 장중하게 질주하는 롤스로이스 팬텀 안에서, 성모에게 전화를 돌렸다.
통화가 연결되자 녀석에게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다.
"어머님이 많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형님."
-어쩔수 없는 노환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야.
"시간이 나면 어머님 문병이라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됐어. 동생이 올 필요는 없어. 그리고 어차피 중환자실이라 면회도 안될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시간되면 포커라도 같이 합시다."
-포커보다는 해외 여행이나 같이 하자.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시간되면 일정을 짜보자고.
"그럽시다."
통화를 끊은 뒤,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 성모의 야비한 얼굴이 떠올랐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정문에 도착하자, 운전석의 김태구가 재빨리 차에서 내린 후 뒷문을 공손히 열었다.
그에게 목례를 취한 뒤 차 밖으로 내려섰다.
호텔 정문 입구에는 정종현 점장과 호텔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직원들을 지나쳐 로비로 들어서자 호텔 이용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호텔 직원들이 나를 극진히 대하는 광경을 호기심에 그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 정체가 궁금한 눈치였다.
그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펜트하우스와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로 천천히 걸어갔다.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뒤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남의 빌딩 숲을 조망하며 향후 계획을 면밀히 구상했다.
뇌리에 '그림자 정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한국을 암중에서 지배하는 그림자 정부의 수장이 될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국회와 언론, 검찰, 법원, 청와대 등을 모두 장악해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고의 선이었다.
그 말인즉슨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돈으로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에 합당한 막대한 로비자금이 필요했다.
국회의원과 고위 검사, 조중동을 가장 먼저 접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검사와 정치인을 포섭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 던져주면 알아서 말 잘듣는 강아지로 전락하는 탓이다.
하지만 조중동은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기관이었다.
조중동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면 그들이 원하는 먹잇감을 끊임없이 제공해야 한다.
문득 '대영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서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재벌이 언론을 길들이는 방법은 당연히 광고였다.
그리고 대영그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광고를 집행하는 재계서열 1위 그룹이었다.
대영의 경영권을 장악할 경우, 조중동 역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대영그룹의 총지주회사인 대영물산의 지분을 무려 40%나 갖고 있었다.
나머지 60%는 이성모가 보유하고 있었다.
대영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성모를 제거할 필요성이 있었다.
안 그래도 녀석은 내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주제 모르고, 나에게 칼을 들이댄 대가였다.
성모는 이혼남에 자녀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모친은 오늘 내일 하고 있었다.
그가 죽을 경우 모든 재산은 동생들에게 균등하게 상속될 것이 불보듯 훤했다.
성모에게는 공식적으로 2명의 남동생과 3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 말인즉슨, 대영물산의 지분 60%를 그들 5명이 각각 12% 씩 분할 상속받게 된다는 의미였다.
내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들 중의 한명과 손을 잡거나, 그들이 보유한 지분을 매입할 경우 대영그룹 총지주회사의 과반수 지분을 손쉽게 확보하는 탓이다.
***
예상대로 오늘 내일 하던 이성모의 모친이 결국 숨을 거두었다.
성모는 한남동의 상지원에서 모친의 조문실을 차렸다.
늦은 밤.
상지원에 들어서자 청와대와 각계 각층에서 보내온 값비싼 조화가 지천에 널려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조화를 무심한 시선으로 일별한 뒤 조문실 안으로 들어갔다.
성모와 그의 남동생, 여동생 등과 맞절을 한 뒤 분향을 올렸다.
그 후, 옆에 마련된 식당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자 검은 상복 차림의 이서연이 육개장과 소주를 쟁반에 받쳐든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고귀한 아름다움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서연을 갖고 싶은 욕망에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절로 끓어올랐다.
그녀는 테이블에 육개장과 밥, 소주병, 소주잔, 젓가락, 수저, 술잔 등을 세팅한 뒤 내 곁에서 떠나가려 했다.
그때, 서연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한남동에 위치한 오르세 미술관의 이서연 관장님 이신가요?"
그녀가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조신하게 쳐다봤다.
"저를 아시나요?"
"조금 알고 있습니다. 형수님."
서연이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죽은 남편을 아시나요?"
"성택 형님과 나름 친한 관계였죠."
그리 말한 뒤 명함 한장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서연은 내 명함을 잠시 살핀 뒤 우아한 걸음걸이로 저 멀리 사라져갔다.
육개장을 안주 삼아 소주를 음미할 무렵, 성모가 내 앞에 나타났다.
빈잔에 소주를 따라서 그에게 넘겨주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술은 됐고,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잠깐만 나 좀 보자."
"그럽시다."
그리 화답하며 성모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