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시위를 떠난 화살
우리는 상지원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성모가 넌지시 말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LA 비버리힐스에 있는 별장으로 휴가를 떠날 생각인데, 너도 올래?"
"그 전에 락히드마틴의 전투기 로비는 어떻게 되가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녀석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요즘 엄마랑 회사 일 때문에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미안해."
"할수 없네요. 그럼 형님이 차세대 전투기 선정 사업에 권한이 있는 담당자랑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가 머리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볼게. 대신 LA 별장으로 같이 휴가를 떠나는거다. 알았지?"
녀석이 핏발선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개자식이 나를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눈빛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안 그래도 저도 휴가를 떠날 생각이었거든요."
"잘 생각했다. LA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라스베가스 카지노로 원정 도박이나 즐기자구."
"좋습니다. 형님. 하하..."
***
이서연은 오르세 미술관의 전시장을 서성이며 한빈의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체격을 애절하게 반추했다.
그는 서연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홀가분한 처지였다.
그런 탓일까, 한빈의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서연은 소극적인 성격을 타고난 여성이었다.
결국 그녀는 한빈에게 연락하기를 포기한 채 자신의 사무실로 도망치듯 걸어갔다.
***
서울 모처에서 김종창 국가안보수석과 만남을 가졌다.
그에게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전투기 가격과 부품 수급 문제를 종합적으로 감안할 경우, 락히드마틴의 전투기가 프랑스와 러시아 전투기보다 가격도 더 싸고 성능도 월등하게 좋습니다."
"흐으음..."
김종창의 입에서 침중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역시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잘 아는 눈치였다.
"더구나 한국의 전투기는 거의 모두 락히드마틴이 제작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투기를 도입한다면, 공군의 전력에 도리어 마이너스로 작용할 겁니다."
그리 확언하자 김종창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는 차세대 전투기 기술이전에 매우 적극적입니다. 반면 락히드마틴은 기술이전에 대해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그의 말은 계속 됐다.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저는 락히드마틴의 전투기 도입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대통령님에게 언제든지 피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정확이 어떤 분야의 기술이전을 원하는지 저에게 확실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가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차세대 전투기의 엔진 혹은 스텔스 기술 두가지 중의 하나를 반드시 이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락히드마틴 측에 문의를 넣어보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영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미국에 있는 아담 페런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돌렸다.
***
며칠 후.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 테라스에서 강남의 빌딩 숲에 시선을 고정한 채 흡연에 열중할 무렵, 박영록 경호팀장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담 페런 상원의원님이 응접실에 계십니다."
담배를 재떨이에 내던진 뒤, 응접실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아담 페런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저간의 사정을 솔직히 밝혔다.
아담이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국 정부가 원하는 기술이전이 전투기 엔진과 스텔스 기능에 관련된 것인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걸 원하는군."
"락히드마틴은 이미 차세대 전투기의 엔진과 스텔스 기술을 일본에 이전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일본은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이지. 그들은 한국보다 무려 2배 이상의 전투기를 구입했네!"
"그 말씀은 한국도 일본 수준의 규모로 락히드마틴의 전투기를 도입할 경우, 엔진과 스텔스 기능의 기술이전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아담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락히드마틴의 실소유주인 아담 페런의 요구를 김종창 안보수석에게 가감없이 전달했다.
그 후, 워싱턴행 비행기에 홀가분하게 몸을 실었다.
***
청와대 집무실.
노우현 대통령은 김종창 국가안보수석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김종창이 말했다.
"락히드마틴사에서 일본 수준으로 차세대 전투기를 구입할 경우, 엔진과 스텔스 기술 이전이 가능하다는 방침을 전달해 왔습니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김종창이 손에 들고 있는 서류철을 노우현에게 전달했다.
노우현은 서류철에 들어있는 각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각서는 락히드마틴의 대표이사 명의로 작성된 것이었다.
각서에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 규모를 2배 이상으로 증액할 경우, 락히드마틴의 엔진과 스텔스 기술을 일본 수준으로 이전한다는 조항이 적혀있었다.
노우현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국산 전투기 수준을 급상승 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 결연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차세대 전투기 사업 규모를 2배 이상으로 증액하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하십시오."
"예. 대통령님."
***
LA 비버리힐스 인근의 고급 저택.
성모는 저택의 아름다운 풀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한편, 수행비서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김한빈이 방금전 워싱턴행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경호원은?"
"자기 혼자 탑승한거 같습니다."
성모의 얼굴 가득 잔인한 미소가 급격하게 번져갔다.
***
워싱턴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주변을 배회하는 현지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가 다운타운 인근에 접근할 무렵, 흑인 택시 기사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기 보이는 핸드폰 판매점 앞에서 세워주십시오."
"네. 손님."
택시가 핸드폰 판매점 앞에서 정차했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지갑에서 백달러 수표 10장을 꺼내서 기사에게 내밀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돈이 너무 많은데요?"
"저 대신 핸드폰 가게에서 선불폰을 구입해 주십시오. 선불폰을 저에게 갖고 오시면 천달러를 더 드리겠습니다."
흑인 택시 기사의 입이 귓가에 내걸렸다.
동시에 머리를 맹렬히 끄덕이며 내 돈을 재빨리 받아챙겼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흑인 기사가 택시에 나타났다.
그는 선불폰을 나에게 건네며 두 손을 노골적으로 벌렸다.
돈에 환장한 인물이었다.
소문대로 흑인들은 돈되는 일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약속대로 천달러를 전달하자 좋아죽는 얼굴로 '땡큐, 원더풀, 뷰티풀 데이'등의 단어를 쉴 틈 없이 내뱉었다.
***
에바의 집 앞에서 흑인이 구해다준 선불폰을 이용해, LA에 있는 이성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녀석의 엿같은 목소리가 폰에서 울려퍼졌다.
-언제 LA로 올거야?
"워싱턴에서 일 좀 보고 LA로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아가씨들이나 준비해 두십시오."
-걱정말라구. LA에서 제일 잘나가는 미녀들을 섭외해 놓을테니까.
"그럼 일을 끝마치는 즉시 LA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래 어서 와라. 동생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미쳐 죽을 지경이라니까. 하하..
"예. 형님. 그럼 나중에 봅시다."
놈은 LA 별장에서 나를 죽일 계획이었다.
***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의 에바가 내 품에 뜨겁게 안겨들었다.
우리는 곧바로 격정적인 시간을 만끽했다.
그날 새벽.
내 품에 사랑스럽게 안겨있는 그녀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한국에서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른 범죄자를 미국에서 소리소문 없이 처리하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에바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위협하는거야?"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거 같아."
"그 사람이 누군데?"
"에바가 알아서 좋을 게 없어."
그리 말하며 2층 테라스로 올라갔다.
테라스에서 나 홀로 흡연에 열중할 무렵,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등에서 느껴졌다.
에바는 곧게 뻗은 양팔을 내 목덜미에 벵어처럼 둘러친 채, 사랑스러운 백허그를 선사했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아빠한테 부탁해볼게."
"고맙다. 에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고혹적인 눈빛으로 내 입술에 애틋한 키스를 해왔다.
***
뉴욕 모처.
아담은 에바의 연락을 받은 뒤 신중한 태도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의 집안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상위 10대 가문에 속해 있었다.
그런 탓으로 가문의 가주들은 집안의 굳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위험한 인물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런 가문의 7대 가주였기 때문이다.
아담은 한빈을 마음에 들어했다.
자신의 여식인 에바의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능력을 일신에 구비한 탓이었다.
그런 때문일까, 그는 한빈을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그와 오랜 시간 동안 인연을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
아담의 뉴욕 사무실에 검은 양복 차림의 백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아담에게 목례를 취한 뒤 면전에 공손히 시립했다.
아담이 사진 한장을 건네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 친구의 부탁을 책임지고 해결해. 사진 뒷면에 주소가 있으니까 그 곳으로 찾아가면 될거다."
남자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 친구한테 말하면, 알아서 챙겨줄거니까 돈 걱정은 하지마라."
남자는 절도있게 목례를 취한 뒤 장내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
워싱턴 시내에 위치한 시티뱅크를 찾았다.
그 후, 현금 100만불(12억)을 인출한 뒤 은행문을 유유히 나섰다.
그날 밤.
에바의 자택에서 오붓한 시간을 즐길 무렵, 초인종 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잠시 후, 검은 양복 차림의 미국인이 집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와 에바를 번갈아 살핀 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자 에바가 나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에바에게 말했다.
"2층에 올라가 있어. 이분과 할 말이 있으니까."
에바는 조신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2층으로 조용히 올라갔다.
남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합당한 수고비를 드릴테니까, 한국에서 온 범죄자를 깔끔하게 처리해 주십시오."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는 걸 원하십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그가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현찰 선불로 30만불을 주십시오. 그리고 일이 해결되면 이 곳으로 성공사례비 30만불을 추가로 이체하십시오."
남자는 그리 말하며 메모지 한장을 나에게 건넸다.
"좋습니다."
그리 화답한 뒤 서류가방에서 100달러 뭉치 30개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내가 건넨 30만불을 007 가방 안에 수납한 뒤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목표물의 거처와 인상착의를 알려주십시오."
지갑에서 이성모의 얼굴이 드러난 사진 한장과 LA 별장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남자는 내가 건넨 성모의 사진과 별장 주소를 유심히 살핀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건 해결은 뉴스를 보시면 알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바의 집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에바와 워싱턴 근교의 공원을 산책할 무렵, 이성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어디냐?
"워싱턴에 볼 일이 있어서 잠시 체류하는 중입니다."
-LA는 언제 올거야?
"워싱턴에서 일을 끝마친 뒤 LA로 가겠습니다."
-공항으로 사람을 보내줄 테니까, LA에 도착하면 연락하라구."
"예. 형님."
녀석은 나를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었다.
한심한 놈이었다.
속편하게 내 종노릇을 했으면,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을텐데.
허나, 녀석은 한사코 종노릇을 거부한 채 감히 나를 제거하려 했다.
주제파악이 시급한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