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얼굴마담 1
에반스는 네이비씰 출신의 초특급 저격수였다.
그는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요인 암살 작전에 다수 참여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에반스는 군대를 제대한 후, CIA와 군사기업에서 요인 암살 업무를 계속 이어갔다.
현역 미군을 투입하기 힘든 작전에 은밀히 참가하며, 자신의 주특기를 꾸준히 이어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페런 가문 소유의 군수업체인 내셔널 일렉트릭이 그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사적인 살인청부를 맡겼다.
그 일을 시작으로 에반스는 페런 가문의 청부해결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뛰어난 실력과 무거운 입 덕분에, 아담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아담은 비밀스런 일에, 언제나 에반스를 동원했다.
이번 청부 역시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
늦은 밤.
에반스의 육중한 픽업 트럭이 LA 비버리힐즈 고급 주택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동양인 경호원들이 경계근무를 펼치는 고급 저택을 유심히 살핀 뒤, 차를 언덕으로 몰아갔다.
에반스는 저택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지에 담요를 깐 뒤 곧바로 저격 준비에 돌입했다.
에반스는 M200 체이탁 저격소총을 세팅한 뒤 엎드려 쏴 자세로, 적외선 야간 스코프에 시선을 집중했다.
전방 1.4KM 부근에 위치한 고급 저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수영장에서 백인 미녀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성모의 얼굴이 적외선 스코프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됐다.
순간 그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체이탁 저격소총의 방아쇠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탕!
한발의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성모의 양미간에서 선홍빛 핏물이 폭포수처럼 치솟았다.
***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블룸버그 통신에 이목을 집중했다.
-대영그룹의 이성모 회장이 LA 별장에서 피격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LA 경찰당국은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 중에 있다며, 자세한 사항은 아직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10분 뒤, 블룸버그 통신의 긴급 속보가 또 다시 이어졌다.
-대영그룹의 이성모 회장이 LA 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LA 경시청은 이성모 회장에게 총격을 가한 괴한을 뒤쫒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중략...
생각 외로 일이 너무 쉽게 해결됐다.
미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담 페런 상원의원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아무리 날고 뛰어봤자, 미국 거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이제 대영그룹의 경영권을 획득하는 방안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염두를 굴릴 차례였다.
창 밖으로 시선으로 돌리자, 뇌리에 이성준의 순진한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녀석은 다른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대영물산의 지분 12%를 상속받을 예정이었다.
내 도움을 받을 경우 그룹 회장직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물론 나는 전면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영그룹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최고의 재벌 그룹이었다.
당연히 전국민의 시선이 대영그룹의 차기 총수에 집중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영그룹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가 그룹 총수직에 깜짝 등극한다면, 정재계와 관계, 법조계는 물론이고 전국민이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 불보듯 훤했다.
이철성 회장의 자녀들 중에서 한명을 낙점해, 대영그룹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는 편이 내 입장에서는 더욱 효율적이었다.
이성준은 그런 얼굴마담으로 아주 제격이었다.
나는 그날, 성준을 내 말에 절대복종하는 종놈으로 육성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
인천국제공항 출구로 나가자 장동현 법무실장과 박종태 경호실장, 그리고 30명에 달하는 경호원들이 나를 맞이했다.
그들에게 목례를 취한 뒤 장동현, 박종태 등과 롤스로이스 팬텀에 몸을 실었다.
직후 우리를 태운 롤스로이스가 논현동 카이저 빌딩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카이저 빌딩으로 향하는 중에, 옆에 동승한 장동현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성준 씨에게 만나자는 전언을 넣으세요."
"이성준이라면 이성모의 배다른 동생 아닙니까?"
"네."
짤막하게 대꾸한 뒤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 내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핀 장변이 공손히 화답했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
LA 경시청.
프라도 총경은 책상 위에 놓여진 이성모의 휴대폰을 힐끔 쳐다본 뒤, 면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드락셀 형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휴대폰 통화기록을 조사했나?"
"사건이 발생하기 24시간 전과 7시간 전, 이렇게 두차례에 걸쳐 워싱턴에 있는 누군가와 통화를 나눈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신원은?"
"선불폰으로 통화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정확한 장소는?"
"워싱턴 다운타운과 스퀘어 공원 일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통화를 나눈 시간대에 다운타운과 스퀘어 공원을 드나든 사람들이 누군지 조사해봐! 그리고 선불폰을 구입한 판매점도 파악해!"
"CCTV도 거의 없고 밤 시간대라, 신원을 확인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총경님."
드락셀이 난색을 표명하자, 프라도가 버럭했다.
"앞뒤 쟤지말고 시키는대로 움직이라고!"
드락셀이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네. 총경님."
프라도는 이번 사건이 미궁에 빠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외국인을 대상으로한 청부살인 사건은 해결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오랜 경찰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론이었다.
하지만 프라도는 뼛속 깊이 경찰이었다.
그런 탓으로 나름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
한남동 서재에 이성모의 고문 변호사와 형제자매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변호사는 성모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모두 모이자, 유산상속 절차를 개시했다.
"회장님은 생전에 유서를 작성해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한국의 상속법에 의거해 회장님의 동생분들인 여러분들에게 균등하게 유산 상속을 집행하겠습니다."
그러자 성모의 동생들이 일제히 기대만발한 얼굴로 변호사의 입을 주시했다.
드디어 변호사의 입에서 공식적인 발표가 흘러나왔다.
"이성모 회장님은 생전에 이철성 전 회장님에게 20조에 달하는 비자금과 3조원대의 유가증권, 부동산 등을 상속받으셨습니다. 당연히 이 모든 걸 여러분들에게 균등하게 5등분 할 예정입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회장님은 대영그룹의 지주사인 대영물산의 지분 60%를 보유하고 계셨습니다. 나머지 40%는 타지마할 인베스트먼트의 한국 측 관계자인 김한빈씨가 갖고 계십니다."
"이성모 회장님이 보유한 60%에 달하는 대영물산의 지분을 여러분들에게 균등하게 5등분 할 계획입니다."
순간 장내에 배석한 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찬란한 환희가 격하게 그려졌다. 동시에 그들 각자의 머리속에는 대영물산의 지분을 무려 40%나 보유한 김한빈의 잘생긴 얼굴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그와 손을 잡을 경우 대영그룹의 총수로 등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펜트하우스.
내가 사적으로 이용하는 핸드폰에 불이 났다.
이성모의 동생들이 내 지원을 받기 위해, 너도 나도 연락을 취한 탓이다.
하지만, 내 관심은 오로지 이성준에 모아졌다.
나머지 4명은 수준이하의 인성을 갖고 있는 개차반들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0년 동안 이성택의 수행기사 노릇을 하며 저절로 알게된 사실이었다.
펜트하우스 3층에 조성된 풀장으로 여유로이 수영을 즐길 무렵, 김태구 경호팀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이성준씨의 연락입니다. 대표님."
폰을 귓가에 가져가자 성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동현 법무실장님을 만났습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성모 형님의 조문은 언제부터 받으실 생각입니까?"
의례적인 질문을 던지자, 수화기에서 녀석의 실망한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퍼졌다.
-고작 그런 얘기나 하자고 장변을 보내신 겁니까?
"사람된 도리로 친하게 지냈던 성모 형님이 죽었는데, 벌써부터 경영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게 좀 그렇지 않습니까?"
-김한빈씨는 돈이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않는 냉혈한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군요.
"뭔가 오해를 하시나본데, 저는 돈에 매우 담백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돈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좌우명을 신조로 삼ㅗ 있습니다."
-후후... 믿기지는 않지만, 오늘 만큼은 믿어주기로 하죠.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여튼 그건 그렇고, 성모 형님 조문 일정이나 알려주십시오."
-내일 오후 3시부터 상지원에서 조문을 할 예정입니다. 마음이 있으시면 찾아오십시오.
"그럼 내일 상지원에서 뵙겠습니다."
***
전신을 올블랙으로 도배한 채 한남동에 위치한 상지원을 찾았다.
이성모의 조문실이 차려진 탓인지 상지원 주변에는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화환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아무 쓸모 없는 화한에 시선을 집중할 찰나, 눈 앞에 이성준이 나타났다.
나를 오래전부터 기다린 기색이 역력했다.
녀석은 내 주변에 진을 친 경호원들을 힐끔 살핀 뒤, 조곤조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에게 긴히 드릴 말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리 화답하자 녀석이 상지원 옆에 위치한 공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고즈넉한 벤치에 자리를 잡은 뒤 담소를 이어나갔다.
녀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를 지원해 주십시오."
"대영그룹의 회장이 되고 싶은가요?"
그가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가능한 모든 편의를 대표님에게 제공하겠습니다."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그 후,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훅 하고 내뿜었다.
아느 정도 흡연 욕구를 충족한 뒤 성준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대영물산의 지분을 무려 40%나 손에 들고 있습니다. 내 의지에 따라서 대영그룹의 회장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녀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미 성준씨를 대영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나름 합리적인 경영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구나 예전에 성준씨에게 본의아니게 투자사기를 친 과거도 있고."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말했다.
"저는 이미 예전 일을 잊은지 오랩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두번 다시 하지 말아주십시오."
성준은 1조원에 달하는 투자사기를 당한 과거를 깨끗이 털어낸 모양새였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죠. 성준씨와 손을 잡는 대가로 나름의 축하금을 건네기로."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성준씨가 상속받은 대영물산의 지분 12%에 대해서, 저와 공동의결권 계약을 체결합시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1조원을 고스란히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녀석이 혼란스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에게 재차 말했다.
"그리고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대영물산의 전권을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물론 나머지 60개 계열사의 경영권은 성준씨가 전권을 행사하시고."
"그룹 핵심계열사의 경영권을 독차지하려는 겁니까?"
성준의 입에서 격앙된 언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을의 입장이었다.
"물론 성준씨가 저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넷째 동생인 이성호씨와 담판을 지을 계획입니다."
순간 녀석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끄응..."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성준씨 아니라도 나와 손을 잡으려는 사람은 많아요. 물론 성준씨가 동생분들과 일치단결로 뜻을 모아, 자체적으로 그룹 회장을 추대할 수도 있겠죠."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지만 과연 욕심 많은 성준씨의 동생들이 일치단결로 뜻을 모을 수 있을까요? 내 말 한마디면 그날부로 동맹이 깨질거 같은데...?"
녀석의 몸에 잔떨림이 일어났다.
"내 제안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장내를 유유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