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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66화 (66/175)

66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대영그룹의 서초동 본사로 들어서자 이성준의 비서진이 나를 맞이했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탑층에 위치한 회장실로 올라갔다.

회장실에 들어선 뒤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흡연을 오롯이 즐기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이성준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대영전자의 사내유보금이 94조원 수준이고, 대영자동차는 16조원 안팎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는 본사 빌딩이 없더군요."

"하실 말씀이 뭡니까?"

성준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 입을 쳐다봤다.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저는 서울 요지에 69개에 달하는 업무용 빌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중단한 뒤 자욱한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 후, 입 밖으로 훅 내뿜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데영물산에 내가 보유한 빌딩을 적절한 가격에 매각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경영진도 내 사람으로 교체할 생각이니까 회장님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순간 성준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룹의 핵심계열사를 대표님 마음대로 하시려는 겁니까?"

"계약서에 나온대로 실천에 옮기는 거 뿐이니까 너무 열내지 마십시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슬며시 말했다.

"모든 절차는 이사회를 통해서 처리할 생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회장실을 유유히 벗어났다.

나름의 선전포고였다.

***

이성준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가 김한빈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성을 낸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탓일까, 정치권과 검찰의 힘을 빌어 한빈의 약점을 캐기로 작심했다.

그 방법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뒤, 오종덕 총괄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밤.

이성준은 한남동 접견실에서 오종덕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성준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읍소했다.

"김한빈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상태로 시간이 지나면 대영그룹 전체가 그놈에게 넘어갈 겁니다."

오종덕이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 보유한 대영물산의 지분 12%는 김한빈의 소유나 마찬가집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자와 공동 의결권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죠. 그 말인즉슨 대영그룹은 이미 김한빈의 손 안에 있는 것과 진배없다는 말입니다."

종덕은 생수로 목을 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김한빈의 뒤에는 월가의 거물들이 다수 포진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성준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오종덕의 입에서 스산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리 말하며 목덜미를 손으로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성준이 움찔하는 얼굴로 물었다.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자는 말씀입니까?"

"법적인 방법으로는 그놈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미국 자본을 등에 엎은 탓이죠."

성준이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부회장님은 그자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잘 모르시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성모가 죽은 게, 우연인거 같습니까?"

성준이 그리 되묻자, 종덕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그자가...?"

"이제서야 눈치를 채시는군요. 그놈이 성모를 청부살인한 겁니다!"

성준은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은 뒤, 불안한 얼굴로 재차 말을 이었다.

"함부로 움직이면 저 역시 성모 형처럼 비명횡사를 당할 겁니다. 그러니 놈의 약점을 조용히 수집하는데 집중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성준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뇌리에 떠올렸다.

그는 일본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한 남자였다.

도꾸가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무려 50년 동안 신하로서 굴종한 뒤, 그들이 죽자마자 일본 열도를 하루아침에 정복했다.

그 역시 도꾸가와 이에야스처럼 끈질기게 버티기로 결심했다.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탓이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호텔 한식당에서 얼큰한 돼지김치찌개로 배를 채우는 한편, 이성준에 대해 생각했다.

녀석은 나를 그룹에서 몰아내고 싶어 환장한 상태였다.

허나, 당분간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성모와 달리 침착한 성격을 타고난 친구였다.

게다가 나름 머리도 좋았다.

나에게 함부로 들이대면 성모처럼 하루아침에 요단강을 건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준에게 쓸데없이 칼을 들이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름 쓸모가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영그룹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국민과 정치권의 여론 때문이었다.

대영그룹은 이철성 회장 집안의 사유물이란 인식이 매우 강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대영그룹의 전면에 나선다면 시민들과 정치인들은 내 정체를 의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나를 대상으로 한 치열한 공격이 시작될 것이 불보듯 훤했다.

나에게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탓으로 이성준을 대타로 내세웠다.

나를 대신할 얼굴마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녀석이 성모처럼 주제모르고 나선다면, 단호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전까지는 성준에게 어느 정도 입지를 허용할 계획이었다.

***

점심 식사를 끝마친 뒤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카이저 빌딩으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뒤 장동현 법무실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눈 앞에 나타난 장변이 구두로 보고를 올렸다.

"최종연 전무가 시세보다 매우 저렴한 가격에 회사 토지를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정확한 가격을 말씀해 보십시오."

"시세의 3분의 1 정도의 가격으로 매입한거 같습니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장변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예. 대표님."

"대영물산과 전자, 자동차의 사내 이사진을 교체할 방침이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집중해 주십시오."

그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영물산과 전자, 자동차는 상무이사부터 등기임원 자격을 주는거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사진을 교체할 경우 상무보 직급에 있는 사람들을 새로운 등기임원으로 선출해야 할거 같습니다."

"사내 이사 숫자가 몇명이죠?"

장변이 시원하게 즉답했다.

"전자는 21명이고 자동차는 10명, 대영물산은 9명 수준입니다."

"상무보 직급인 사람들 중에서, 뒤가 깨끗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사 후보를 선출하세요."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

대영전자의 중구 사옥에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내 이사진이 대거 교체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탓이다.

그런 때문일까, 교체 대상자로 지목된 사내 이사들은 사무실 혹은 휴게실에서 삼삼오오 둘러앉은 채 그룹의 실세로 떠오른 김한빈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런 분위기는 대영자동차와 대영물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대영전자와 대영물산, 대영자동차의 상무보 타이틀을 달고 있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대영호텔 강남 본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지하 피트니스 센터에서 나 홀로 헬스 3대 운동에 열중할 무렵, 40명에 달하는 중년 남자들과 장동현 법무실장이 장내에 나타났다.

그들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내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헬스 기구를 한쪽으로 치운 뒤 그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면전에 공손히 시립한 남자들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저는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대영물산의 경영권을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영그룹 이성준 회장은 전자와 자동차, 물산에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순간 그들이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며 뭐라뭐라 수근거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다소 침착해진 얼굴로 내 입에 시선을 모았다.

"저는 조만간 기존의 이사진을 모두 해고조치할 겁니다. 여러분들을 등기임원에 등재하기 위함입니다."

통 큰 언사를 내뱉자 그들이 일제히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우러러보았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큰 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시한대로 일을 착실히 수행하는 걸 원할 뿐입니다. 흔히 말하는 예스맨이 필요하다 이말입니다."

그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여러분들은 저에게 절대충성을 다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하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당신들을 전자와 자동차, 물산의 등기임원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장동현 법무실장이 그들에게 각서를 차례로 돌렸다.

그들은 출세에 눈이 멀은 탓인지 충성 서약서에 빠짐없이 열손가락의 지장을 찍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었다.

***

카이저 빌딩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최동명과 최종연 부자에 대해 생각했다.

최종연은 최근, 태산그룹이 보유한 광명 인근의 토지를 시세의 3분의 1 가격으로 매입했다. 최동명 회장의 방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 부자는 나를 우습게 아는 눈치였다.

뭔가 따끔한 교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 탓일까, 지방 고검에서 와신상담 중인 이태강이 뇌리를 스쳤다.

놈을 이용하면 최 회장 부자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대검 특수부에 인맥이 많았다.

내 관심은 최종연의 교도소행에 집중됐다.

녀석의 모가지에 어떤 올가미를 걸어야 할까?

그럴듯한 죄목이 필요했다.

그때, 주가조작 혐의로 8년형을 선고받은 유창선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재벌가 후계자들에게 극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종범에 불과했음에도 주범을 능가하는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은 탓이다.

반면 주범이나 마찬가지인 재벌가 후계자들은 거의 모두 법망을 마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최종연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이태강과 유창선을 차례로 접촉하기로 마음먹었다.

***

다음날.

제주도 서귀포 인근의 낚시터로 들어서자 강태공으로 화신한 이태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제주도의 고요한 바닷가를 돌부처마냥 주시한 채 내면세계로 깊숙이 몰입한 상태였다.

경호원들을 뒤로 물린 뒤, 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 인기척을 느낀 태강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놈이 여긴 웬 일이냐?"

"당신한테 쓸만한 제안을 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일이지?"

"내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면 댁을 검찰 총장으로 만들어드리죠. 그리고 나중에는 청와대 권좌에도 앉혀드리겠습니다."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놈 따위가 무슨 힘이 있다고."

태강은 애써 나를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대영그룹의 실질적인 오너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시는 겁니까?"

그가 흠칫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저는 대영그룹의 지주회사인 대영물산의 지분을 무려 52%나 장악하고 있습니다."

서류가방에서 대영물산의 지분 증서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태강이 홀린 듯한 얼굴로 대영물산의 지분증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대영물산의 지분을 손에 넣은거냐?"

"내 제안에 응할건지 말건지, 그거나 답하십시오."

태강이 고심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다오."

"좋습니다. 24시간 내에 결정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경호원들과 장내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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