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쾌속질주
맨해튼 포시즌호텔 펜트하우스.
호텔 조식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애플 주식을 매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6조원 남짓한 가용자금 전액을 애플 주식을 매집하는데 전용한 것이다.
그 덕분에 내가 보유한 애플의 지분은 14%에 달할 지경이었다.
물론 수십여개의 사모펀드 명의로 매입한 탓에, 애플 측은 내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 편이 나았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릴 찰나, 오종덕 부회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인 뒤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종덕은 허리를 숙인 자세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성준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주시하십시오. 그게 내가 원하는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그의 왜소한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태강을 중앙지검장으로 끌어올리고 싶으니까, 부회장님이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이번 일만 제대로 해주시면 섭섭치 않게 사례를 해드리겠습니다."
종덕의 입에서 씩씩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제가 책임지고 이번 일을 완수해 보이겠습니다."
"역시 자신감이 철철 넘치시네요. 그럼 부회장님만 믿겠습니다. 하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려보낸 뒤 그에게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돈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지원해 드릴테니까, 필요하시면 그 즉시 말씀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대표님."
***
오종덕은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민정수석과 법무부장관, 검찰 총장 등과 연쇄적인 회동을 가졌다.
더불어 그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정치자금 명목으로 건넸다.
그런 덕분일까, 이태강은 단 10개월 만에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서울중앙지검 대회의실.
이태강이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를 과시하며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자, 중앙지검 소속 검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태강은 상석에 좌정한 뒤 검사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일장훈시를 내뱉었다.
"앞으로 우리 중앙지검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엄정함을 보여야 합니다. 특히 재벌과 정치인을 대상으로하는 수사에 있어,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행위를 매우 경계해야 할 것 입니다."
그의 모두발언이 끝나자마자, 전면에 위치한 화이트 스크린에 태산그룹 최동명 회장 일가의 각종 비리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태강의 목소리가 장내에 재차 울려퍼졌다.
"보시다시피 태산그룹 오너 일가는 회사가 보유한 사내유보금을 곶감 빼먹듯이 전횡했을 뿐만 아니라, 비자금 조성과 횡령 배임, 조세포탈 등의 온갖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산그룹 오너 일가를 본보기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사돈을 자기 마음대로 전용하는 재벌회장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함입니다."
"오늘부터 태산그룹 오너 일가를 전방위적으로 수사하십시오. 서울중앙지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라는 말입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날부터 최동명 회장 일가의 비리수사가 본격화되었다.
***
한국에 입국한 뒤 태산그룹으로 직행했다.
태산그룹 본사 빌딩 주변에는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압수수색에 돌입한 중앙지검 소속 검사와 수사관들, 회사 관계자들을 카메라에 담는 한편, 관계자들의 인터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경호원들을 회사 주변에 남겨둔 채, 구조조정 위원회 사무실로 몰래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간 뒤 여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진대현 미래전략본부장을 호출하세요."
"예. 이사님."
잠시 뒤, 진대현 본부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진대현은 최동명 회장의 수족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눈치가 빠른 덕분에, 나에게 알아서 기는 남자 중의 한명이었다.
대현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최 회장과 최종연 전무는 법의 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가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다시 말했다.
"태산그룹의 총수 자리가 공석이 될 경우, 저는 최 회장의 자녀 중에서 한명을 선택한 후, 그에게 경영권을 인계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대현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 자녀분들은 모두 5 명입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최종연 전무님의 동생들은 나이가 어리거나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중입니다."
"모두 본처 소생인가요?"
"아닙니다. 최종연 전무님만 그렇고, 나머지 분들은 모두..."
대현이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사생아 출신이라는 말인가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대표님."
답은 나왔다.
사생아 출신을 얼굴마담으로 삼으면 게임 끝이다.
그에게 적나라한 언사를 내뱉었다.
"배경이 제일 없는 사생아가 누구죠?"
대현이 즉답했다.
"미국 대학에서 유학 중인 최종수 도련님이 배경이 제일 없습니다."
"그자의 모친이 누구죠?"
"화류계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쓸만한 적임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최종수에게 기별을 넣으세요. 그리고 내가 누군지 확실하게 주시시키세요."
"명심하겠습니다."
***
중앙지검 취조실.
최동명 회장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의 로비가 전혀 통하지 않은 탓이다.
중앙지검 검사들은 최 회장을 소 닭보듯이 하며 날 선 목소리로 취조를 이어갔다.
"당신이 그동안 횡령한 회사 돈이 조단위로 파악되고 있는데, 끝까지 발뺌할 생각입니까?"
검사의 싸늘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당신 아들 최종연도 구속영장이 떨어졌으니까 잔머리 굴릴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최 회장은 참담한 심경이었다.
그에게 돈을 받아먹은 정치인과 검사들이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분강개한 심경에 휩싸인 채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내 비자금 장부가 세상에 드러나면 정치권과 검찰이 한바탕 홍역을 치룰거요. 당연히 이태강 지검장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최 회장이 결연한 어조로 소리치자, 취조 검사가 고심이 역력한 얼굴로 매직 거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취조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이태강의 살기등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검사를 내보내자마자 취조실의 녹화 녹음 버튼을 동시에 종료시켰다.
이태강의 입에서 차가운 어조가 흘러나왔다.
"비자금 장부를 이용해서, 법망을 빠져나갈 생각입니까?"
최 회장이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네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드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성 싶으냐!"
태강이 싸늘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죽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취조실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태강은 취조실을 나선 뒤 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빈과 통화가 연결되자 저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수화기에서 한빈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알아서 해결하십시오. 그러라고 중앙지검장으로 형님을 꽂은 거니까.
"비자금 장부가 드러나면 정치권은 물론이고, 내 모가지도 남아나지 않을거다."
수화기에서 한빈의 힐난이 쏟아져 나왔다.
-최 회장한테 돈을 왜 받아먹은 겁니까? 제발 좀 처신을 똑바로 하십시오. 형님.
"알았으니까, 이쯤에서 최 회장을 돌려보내는 게 어떨까?"
-최 회장을 풀어주면, 형님의 검찰 인생은 그 즉시 끝장날 겁니다. 내가 장담하죠.
한빈은 그리 말하며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런 탓일까, 태강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진퇴양난의 순간이었다.
앞에는 비자금 장부를 손에 든 최 회장이 있었고, 뒤에는 그의 목줄을 틀어쥔 한빈이 있었다.
최 회장은 그의 과거였으며, 한빈은 찬란한 미래를 약속한 존재였다.
그런 때문일까, 태강은 자신의 과거인 최 회장을 삭제하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중앙지검.
건장한 체격의 수사관이 최 회장을 화장실로 호송했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최 회장을 창문 밖으로 무자비하게 내던졌다.
자살을 가장한 타살이었다.
허나, 이런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피트니스 센터에서 데드리프트와 벤치 프레스, 고중량 스쿼트에 차례로 매진할 무렵, 벽면을 장식한 TV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받던 태산그룹의 최동명 회장이 방금 전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앙지검 관계자는 최 회장이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고 밝혔습니다. 중략...
이태강이 전가의 보도를 휘두른 모양이었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곧바로 진대현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미국에서 최종수를 데리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전화를 끊은 뒤 풀장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풀장에서 수영을 하며 뭉친 근육을 푸는데 집중할 무렵, 정종현 점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죠?"
그가 공손히 입을 열었다.
"드라마 제작사에서 저희 호텔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촬영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색다른 제안이었다.
그런 탓인지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정종현에게 넌지시 물었다.
"드라마의 남녀 주연이 누구죠?"
"남자는 김사현이고 여주는 조수연입니다."
둘 모두 한류 스타였다.
나름 대작 드라마인 모양이었다.
"드라마 여주를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드라마 여주를 데려오라는 말씀입니까?"
"여주의 실물이 궁금하니까 제작사 대표에게 알아듣게 설명하세요. 내가 엄청난 거물이란 사실을."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드라곤 스튜디오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드라마 제작사였다.
그런 이유로 대작 드라마를 주로 전담했다.
그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고급 호텔을 배경으로 대작 드라마 제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연히 배경이 되는 고급 호텔을 섭외하는 게 제일 큰 난관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가을철 성수기였다.
호텔을 섭외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영호텔 측이 긍정적인 의사를 밝혀왔다.
다만 한가지 선결 조건이 있었다.
호텔 오너가 드라마의 여주인 조수연에게 관심이 많다고 밝힌 것이다.
하지만 수연은 자존심 강하기로 정평이 자자한 여배우였다.
외간 남자의 사적인 요구를 들어줄리 만무했다.
결국 드라곤 스튜디오의 대표는 그런 사정을 호텔 측에 솔직히 밝혔다.
***
오늘도 대영호텔의 피트니스 센터에서 헬스 3대 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벽면을 장식한 TV에 이목을 집중했다.
TV에서는 조수연이 주연으로 출연한 로맨스 영화가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수연은 사랑스러운 얼굴과 굴곡진 몸매 덕분에 남성팬들이 많았다.
마리 속으로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광경을 오롯이 만끽할 찰나, 정종현 점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조수연이 대표님과의 만남을 끝내 고사 했습니다."
"보기보다 지조가 있는 여배우네요."
씁쓸한 어조를 흘려보내자 정종현이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드라마 제작사에 대영호텔을 촬영장으로 제공할 계획이 없다고 확실히 전달하세요."
"예. 대표님."
이 세상의 모든 건 기브앤 테이크의 원리로 돌아간다.
가는 게 있으면, 반드시 오는 게 있어야 한다.
꿀꿀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정종현에게 지시를 내렸다.
"풀파티를 개최할 예정이니까 외국인 모델을 중심으로 게스트를 초대하세요."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다음날.
대영호텔 강남 본점에 조성된 야외 풀장에 아름다운 외국 미녀 모델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나를 황제처럼 떠받들며 내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었다.
***
보스턴 국제공항에 진대현과 최종수가 나타났다.
대현은 20대 중반의 종수에게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김한빈 대표는 태산그룹의 총지주회사인 윤광사의 지분을 과반수 이상 보유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눈에 들어야 태산의 총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종수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그 사람이 저를 태산의 차기 회장으로 낙점한 건가요?"
"네. 그러니까 그분의 심기를 절대 거스르지 마십시오."
대현의 당부는 계속 이어졌다.
"그분의 눈 밖에 나는 순간, 도련님은 그 날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겁니다."
그리 말하며 출국 게이트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이동했다.
***
타펠 펜트하우스.
2층 휴게실에서 포겟볼을 즐길 무렵, 진대현 본부장과 20대 중반의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진대현이 20대 청년을 나에게 소개했다.
"작고한 최동명 회장님의 넷째 아드님이신 최종수 도련님입니다."
녀석은 사태파악을 못했음인지, 내 눈을 도전적인 시선으로 직시했다.
자신의 처지를 여전히 모르는 눈치였다.
긴 말이 필요없었다.
주먹 한방이면 자기 처지를 뼈저리게 깨닫기 때문이다.
곧바로 녀석의 복부에 매서운 주먹을 전광석화처럼 박아넣었다.
퍼억!
"크헉!"
종수는 제자리에서 짚단처럼 무너져내렸다.
그런 모습에 진대현이 경악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대현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이자 못 이기는 척 장내에서 몸을 숨겼다.
종수의 얼굴을 구둣발로 짓이기며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화류계 출신 어미를 둔 사생아 주제에, 네놈은 자기 처지를 너무 모르는구나."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네놈을 태산그룹의 총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다. 물론 너는 그만한 대가를 나에게 반대급부로 내놓아야겠지."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지 마라.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종수는 내 발밑에서 온몸을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름 정신교육이 제대로 된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