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다
아담 상원의원과 면담을 끝마친 후 센트럴파크 인근의 포시즌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방의 창가로 다가서자 센트럴파크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즈음, 룸서비스가 장내에 나타났다.
룸서비스가 내온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한 뒤 수트 차림으로 밤마실을 나갔다.
호텔 근처에 위치한 쿼터스 클럽으로 들어서자 감각적인 하우스 뮤직이 귓전에 울려퍼졌다.
이 클럽은 고급 라운지형 스타일이었다.
스테이지를 중심으로 기다란 라운지와 간이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당연히 내 시선은 뉴욕의 명사들에게 모아졌다.
그들 대다수는 이름만대면 다아는 유명한 셀럽들이었다.
그런 탓인지 월가의 거물과 영화배우, 패션계 인사들이 라운지에 운집한 채 사교활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무렵, 아담 상원의원의 수행비서인 스테판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목례를 취한 뒤 9시 방향에 위치한 테이블을 눈짓했다.
"저기 테이블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스테판은 중년의 백인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론 그자의 정체를 내가 알리 만무했다.
그러자 녀석이 은근한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바로 블랙스톤의 파간 스탠리 회장입니다."
블랙스톤은 전 세계 최고 최대의 자산운용사였다.
그들은 한화로 7천조원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자금을 운용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스테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블랙스톤은 전 세계 유수의 기관투자가 그룹의 자산을 직접 운용할 뿐만 아니라, 전도유망한 기업체에 대규모 투자를 직접 단행하고 있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스탠리 회장을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스테판이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뒤, 스탠리 회장이 있는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후, 스테판이 내 앞에 나타났다.
"스탠리 회장이, 내일 오전 10시에 블랙스톤 본사로 찾아오라는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면담이 성사된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클럽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
다음날 오전 10시.
맨해튼에 위치한 블랙스톤 본사 빌딩으로 들어서자 무장 보안요원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스탠리 회장님과 면담 일정이 잡혀있습니다."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히말라야 사모펀드의 크리스 킴이라고 전해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무장 보안요원은 내 신원을 확인한 뒤 엘리베이터로 나를 안내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스탠리 회장이 냉정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스탠리가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어디에 투자하실 계획이죠?"
그에게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애플의 경영권을 장악하는데 사용할 예정입니다."
스탠리가 조금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애플의 경영권을 인수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1천억불(120조원) 내외의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텐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미스터 킴이 그만한 자금을 동원할 만한 역량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준비해온 서류를 간이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스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뭐죠?"
"이 서류들을 살펴보시면 제가 어떤 인물인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럽시다."
스탠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제출한 서류에 시선을 모았다.
10분 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대영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대영그룹의 천문학적인 사내유보금을 귀사에 얼마든지 담보물로 제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스탠리에게 결연한 어조로 내 의지를 표명했다.
"대영그룹을 지급보증인으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저에게 500억불(60조원)을 대출해 주십시오."
그가 진지한 자세로 내 제안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스터 킴이 제출한 서류의 진위를 검증한 후, 다시 논의를 해봅시다."
"좋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죠."
그리 말하며 사무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포시즌스 호텔로 돌아온 뒤, 룸서비스에 점심 식사를 주문했다.
스테이크로 배를 채운 후 진한 커피를 음미하며 흡연에 열중했다.
스탠리 회장은 내가 제출한 서류의 진위를 감정할 예정이었다.
최소 1주일 이상 뉴욕에 체류해야 할거 같았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에바가 간절해졌다.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돌렸다.
다행히 워싱턴 정가는 크리스마스 휴가시즌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그런 탓인지 에바는 내 연락을 받자마자 금세 호텔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우리는 애틋한 사랑놀음을 만끽한 뒤 침대에서 한몸처럼 화신한 채 친근한 담소를 이어나갔다.
그녀에게 내 속사정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그런 탓인지 에바가 감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애플을 인수할 생각이니?"
"오래전부터 애플을 인수하고 싶었어. 이번 기회에 그 꿈을 실현할 생각이야."
"그래도 애플을 인수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잖아?"
"돈 문제는 걱정하지마라. 의원님이 도움을 주시기로 했거든."
"정말?"
"내 개인 자산도 충분하니까, 우리 에바는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 말하며 에바의 앵두같은 입술에 진한 키스를 선사했다.
***
맨해튼 블랙스톤 본사 빌딩.
회장실에 동아시아 담당 펀드 매니저인 체이스필드가 나타났다.
그는 스탠리 회장에게 목례를 취한 뒤 긴급 보고를 올렸다.
"미스터 킴이 제출한 서류의 진위를 조사한 결과 사실로 판명됐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네. 회장님."
"대영그룹의 사내유보금이 어느 정돈가?"
"미화로 1천억불(120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스탠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체이스필드를 내보낸 뒤 유럽 지역을 담당하는 아서를 면전에 호출했다.
스탠리의 입에서 은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ARM의 매각절차는 어떻게 되가고 있지?"
"거대 사모펀드와 IT 업체에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지만, 높은 가격 때문인지 확답을 주는 곳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 기존의 매각 작업을 즉각 중단하게."
"예. 회장님."
블랙스톤은 모바일 CPU의 아키텍쳐 특허권을 보유한 ARM의 절대 지배주주였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ARM의 매각을 추진해왔다.
차익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블랙스톤의 레이더망에 탄탄한 자본력을 보유한 김한빈이 포착됐다.
그런 때문일까, 스탠리는 거액의 대출을 조건으로 ARM 역시 한빈에게 매각하기로 작심했다.
***
에바와 뉴욕에서 오붓한 시간을 만끽했다.
그런 때문인지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사랑놀음에 깊숙이 몰입한 탓이었다.
그 즈음, 스탠리 회장이 연락을 해왔다.
내가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곧바로 에바를 워싱턴으로 돌려보냈다.
그 뒤, 블랙스톤의 본사 빌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회장실에 들어서자 스탠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번과 딴판인 분위기였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소파에 앉았다.
스탠리가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 후,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ARM에 대해서 아십니까?"
"모바일 CPU의 아키텍쳐 특허권을 보유한, 세계 굴지의 IT 업체 아닙니까?"
그가 감탄한 얼굴로 나를 추켜세웠다.
"역시 IT 방면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군요."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나름 겸양지덕을 드러내자 그가 흡족한 얼굴로 재차 말을 이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블랙스톤은 ARM의 지분 전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시세차익을 실현해야 하는 시점이라, 매각을 비밀리에 추진하는 중입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미스터 킴이 원하는대로 500억불을 대출해 드리겠습니다. 그 대가로 ARM을 당신이 매입해 주십시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심경이었다.
안 그래도, ARM 역시 인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 세계 IT 산업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문득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고사성어가 뇌리를 스쳤다.
내 경우가 그랬다.
하지만, 내심을 철저히 숨긴 채 일부러 곤혹스런 표정을 얼굴에 잔뜩 끌어올렸다.
나에게 유리한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일부러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ARM을 인수할 만한 여력이 거의 없습니다. 애플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일도 너무 벅찬 형편이라..."
말끝을 흐리자, 스탠리가 애가 타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ARM을 인수해 주신다면, 추가로 100억불을 대출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리 2%와 10년 거치 후 원금을 상환하는 대출 조건도 제공하겠습니다."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ARM의 매각 가격을 알려주십시오."
스탠리가 환한 얼굴로 즉답했다.
"당연히 100억불(12조원) 안팎의 가격으로 매각할 계획입니다."
엄청난 호조건이었다.
그런 탓일까,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회장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마음의 결정이 되시면 저에게 즉시 연락을 주십시오."
"예. 회장님."
***
며칠 후.
블랙스톤의 맨해튼 본사를 다시 찾았다.
스탠리 회장에게 내 의중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가 흡족한 얼굴로 화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서로를 은밀히 관찰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스탠리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대영그룹의 지급보증 확약서를 제출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공식적인 절차대로 대출심사를 진행하겠습니다."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양사의 지급보증 확약서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어차피 대영그룹의 사내유보금은 거의 모두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가 보유 중입니다."
그리 말하자 스탠리가 머리를 끄덕이며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와 힘찬 악수를 교환한 뒤 사무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대영전자의 본사 빌딩으로 직행했다.
대표실로 들어서자 김동재가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를 지나쳐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에 좌정했다.
입가에 담배를 물자, 김동재가 재빨리 담배불을 붙여주었다.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눈 앞에 시립한 동재에게 넌지시 운을 띄웠다.
"블랙스톤에 대해서 아십니까?"
그가 즉답했다.
"전 세계 최고의 자산운용사로 알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재에게 말했다.
"제가 관리하는 히말라야 인베스트먼트 명의로, 블랙스톤에서 한화로 60조원 가량을 조달할 계획입니다. 그러니 대표님은 이사회에 히말라야 사모펀드의 지급보증을 안건으로 상정해 주십시오."
그가 경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60조원에 달하는 지급보증을 안건으로 상정하라는 말씀입니까?"
"네. 제가 원하는 게 그겁니다."
"그렇지만, 히말라야 사모펀드는 우리 대영전자와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습니까?"
동재는 선을 넘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내 입에서 절로 스산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 눈빛과 목소리 톤이 변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동재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대영물산, 히말라야 사모펀드 모두 내 개인 소유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목소리를 높이자 그가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복명했다.
"대표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