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앞만 보고 달려간다
장동현과 블랙스톤의 맨해튼 본사를 방문했다.
스탠리 회장의 수행비서는 우리 일행을 소규모 컨퍼런스 홀로 안내했다.
컨퍼런스 홀에서 10분 정도 대기했을 무렵, 스탠리 회장 일행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준비해온 서류를 건넸다.
블랙스톤의 고문 변호사들은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의 지급보증 확약서를 매의 시선으로 살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스탠리 회장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귓속말을 전달했다.
잠시 뒤, 스탠리 회장 측에서 대출 계약서를 나에게 내밀었다.
장동현에게 대출 계약서를 건네자, 그 역시 매의 시선으로 계약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동현이 나에게 조곤조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에 자필서명을 기입하셔도 될거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블랙스톤의 대출 계약서 하단에 자필서명을 기입했다.
모든 절차를 끝마친 뒤 스탠리와 친근한 얼굴로 악수를 교환했다.
그 후, 회장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
우리는 커피를 음미하며 ARM의 인수 문제에 대해서 심도깊은 협의를 이어나갔다.
스탠리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110억불(13조2천억)에 ARM을 인수해 주십시오."
"저번에 말씀하신 것보다 10억불이 더 상향된 건가요?"
"600억불(72조원)을 대출해 드렸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 요구를 수용해 주십시오."
"죄송하지만 저는 110억불을 지출할 의향이 없습니다. 더구나 회장님도 이미 100억불(12조원)에 합의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끄응..."
스탠리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에게 단호한 어조로 못을 박았다.
"약속대로 ARM을 100억불에 매각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일시불 현금으로 100억불을 귀사의 공식 계좌로 이체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내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나 외에는 그만한 가격을 맞춰줄 인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신, ARM을 신속하게 인수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대표님."
스탠리가 은근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ARM을 인수하려면 미국 자본으로 위장하는 게 좋을 겁니다. 미국 정부가 트집 잡을 가능성이 농후하거든요."
그의 말처럼 미국 정부는 자국 IT 업체의 해외 매각에 민감한 반응을 드러냈다.
스탠리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쓸만한 얼굴마담을 전면에 내세우겠습니다."
"그래주시면 제가 고맙죠. 우하하하...!"
스탠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호탕한 광소를 길게 토해냈다.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
다음날 오전.
시티뱅크에서 천만불에 달하는 수표를 발급받은 뒤, 곧바로 아담 페런 상원의원의 뉴욕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악수를 교환한 뒤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얼굴 마담이 필요합니다."
"얼굴마담이 무슨 뜻인가?"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애플의 경영권을 인수하려면 미국 자본인 것처럼 위장해야 합니다. 미국 정부의 태클을 피하기 위함이죠."
아담이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재차 말했다.
"하지만 저는 한국인입니다. 미국 자본이 아닌거죠. 그래서 의원님에게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자네 대신 전면에 나서줄 월가 인물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 하하..."
역시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시티뱅크에서 발행한 1천만불 짜리 수표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러자 아담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게 뭔가?"
"정치후원금입니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는 에바한테 정치자금을 후원해주게. 안 그래도, 이번주 수요일에 워싱턴에서 에바의 후원행사가 열릴 예정일세."
그리 말하며 수표를 내 쪽으로 밀었다.
결국 아담의 간곡한 요청을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아담이 친근한 얼굴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사무실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
수요일 밤.
워싱턴 링컨 센터에 들어서자 에바의 보좌관이 나를 맞이했다.
그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에바 의원님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보좌관이 친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치자금 후원 부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전방에 위치한 데스크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정치자금 후원모금 담당자에게 천만불 짜리 수표가 들어있는 흰봉투를 전달한 뒤 홀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에바는 동료 정치인과 후원자들에게 둘러 쌓인 채 친근한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괜스레 오해만 받을 것 같았다, 결국 에바가 눈치채지 못하게 장내를 몰래 빠져나왔다.
***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포시즌스 호텔로 직행했다.
호텔방에 들어서자 장동현이 나를 반겼다.
"워싱턴에 가신 일은 잘 되셨습니까?"
"덕분에 잘 해결됐습니다."
건성으로 대답한 뒤 테라스 쪽으로 발걸음을 욺겼다.
테라스에 들어서자 맨해튼의 화려한 마천루와 아름다운 센트럴파크가 한눈에 들어왔다.
맨해튼은 100층 이상의 초고층 빌딩과 그림같은 센트럴파크가 조화롭게 펼쳐진 장소였다. 그런 탓일까, 맨해튼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내 스타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뉴욕에 살고픈 생각은 별로 없었다.
미국은 범죄자들의 천국이었다.
해만 떨어지면 무법천지로 돌변하는 것이다.
전 세계 초강대국의 씁쓸한 민낯이었다.
미국인들은 생각외로 민도가 너무 낮았다.
나같은 억만장자가 살기에는 너무 위험한 국가였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한국에서 살아갈 작정이었다.
전 세계 최고의 치안과 국민 개개인의 민도가 나름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법위에 군림하며 온갖 패악질을 자행하는 개같은 년놈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여튼 한국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게 제일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칠 찰나, 아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다음날.
월가 인근의 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매니저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는 내 위아래를 재빨리 스캔한 뒤 친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예약을 하셨습니까?"
"그랜데일씨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그리 말하자 매니저가 머리를 끄덕이며 나를 창가쪽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 곳에는 장년의 백인 남자가 나 홀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그가 바로 그랜데일이었다.
아담이 소개해준 월가의 실력자였다.
테이블에 착석한 뒤 그와 악수를 교환했다.
"저 먼저 식사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며 내 앞에 놓여진 생수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남자는 잘 익은 스테이크를 금세 후딱 해치웠다.
그 뒤, 포도주로 입가심을 하며 용건을 꺼냈다.
"얼굴마담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전해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저 대신 전면에 나서줄 분이 필요합니다."
"인수 업체가 어디죠?"
"애플과 ARM 입니다."
그랜데일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예. 이미 자금준비도 끝마친 상황입니다."
그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우! 엄청난 자금력을 보유하고 계시군요. 정말 부럽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리 답하자, 그랜데일이 은근한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커미션을 말씀해 주십시오."
"400만불(48억)을 보장하겠습니다."
"쓰시는 김에 좀 더 쓰시죠."
"얼마를 원하십니까?"
"아무리 못해도 최소 500만불(60억)은 보장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표님."
그날 밤.
호텔방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한 뒤 장동현과 이런저런 대화를 길게 이어갔다.
장변이 호기심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랜데일 회장이란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모펀드 운영자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도 아담 상원의원이 소개해준 분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장변이 내 담배에 재빨리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여마셨다가 입 밖으로 훅 내뿜었다.
그러기를 몇차례 반복한 뒤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와 아담 상원의원의 관계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염려마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나름 입이 무겁습니다. 하하..."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대표님이 이태강 중앙지검장의 스폰이라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우리는 원팀이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후원하고 있죠."
그러자 장변이 우려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태강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가까이 하시면 좋을 일이 없을 겁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후,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태강은 읍참마속의 심경으로, 김창동 부장 검사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의 미래를 책임진 김한빈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감내하며, 중앙지검 금융조세부의 한상철 검사를 지검장실로 호출했다.
태강은 눈 앞에 나타난 한상철에게 거두절미하고 지시를 내렸다.
"김창동과 직계 존비속의 금융거래 내역과 수상한 계좌이체 증거를 모두 확보해!"
한상철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김선배를 감찰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태강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내가 시키는대로만 움직이면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한상철은 태강의 직계 라인이었다.
그런 탓인지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복명했다.
"넵. 지검장님!"
며칠 후.
한상철은 김창동과 그의 직계 존비속의 계좌를 추적한 결과, 거액의 돈이 오고간 정황을 어렵지않게 포착했다.
돈을 주로 건넨 쪽은 일신건설과 자회사 쪽이었다.
일종의 스폰서 비용이었다.
상철은 그런 사실을 한눈에 알아챘다.
검사들에게 빌붙는 스폰서들의 전형적인 행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곧바로 이태강에게 모든 사실을 가감없이 보고했다.
***
용인 근처의 골프장에 이태강과 중앙지검 출입기자인 동양일보의 하성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골프를 즐기는 한편, 은근한 대화를 길게 이어갔다.
이태강이 말했다.
"김창동이 스폰서한테 수십억원을 상납받은 정황이 밝혀졌습니다."
"그 말씀이 참말입니까?"
"네. 그래서 저는 검사들의 품위를 훼손한 김창동을 법적으로 엄단할 계획입니다."
그러자 하성식이 감탄한 얼굴로 찬사를 쏟아냈다.
"지검장님은 정말 대단하신거 같습니다. 검사들의 부패 문제를 스스로 자정하려는 자세가 정말이지, 너무 훌륭하십니다."
하성식의 노골적인 찬사에 이태강이 싫지않은 표정을 지으며 화답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우하하하하하...!"
그의 입에서 우렁찬 광소가 길게 울려퍼졌다.
***
중앙지검 특수부.
김창동은 사무실에 도착한 뒤 책상 위에 놓여진 조간신문을 습관처럼 차례로 훑었다.
그러기를 문득, 그의 시선이 동양일보의 1면에 모아졌다.
<중앙지검 특수부의 김모 부장검사! 건설회사 대표에게 수십억 대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 포착!>
그는 본능적으로 극도의 위험신호를 감지했다.
중앙지검 특수부에서 근무하는 검사들 중에 김모 부장검사는 자신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사무실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검 감찰부에서 나왔습니다. 조사할게 있으니 저희들을 따라오시죠."
김창동의 얼굴이 삽시간에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
늦은 밤.
대검 감찰실에 이태강이 나타났다.
그는 취조실 책상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김창동의 모습을, 매직거울을 통해 잠시 들여다본 뒤 취조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강의 입에서 서늘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모든 죄를 인정하면 3년 정도로 구형해 줄테니까, 이제 그만하자. 창동아."
그러자 김창동이 격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일신건설에서 저만 돈을 받아먹은게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왜 나만 콕찝어서 조지는 겁니까?"
"아는데, 지금 상황이 너무 안좋아. 언론에서 검찰이 봐주기 수사를 하면, 가만 안둘 기세라고. 그러니까 검찰을 위해서라도 죄를 순순히 인정하자. 그럼 내가 책임지고 2년 안에 가석방으로 빼줄게."
태강은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도망치듯 몸을 감췄다.
***
포시즌스 스위트룸에 그랜데일 회장이 나타났다.
우리는 본격적인 논의에 돌입했다.
"사모예드와 타지마할 사모펀드의 회장님으로 활동해 주십시오. 그리고 애플과 ARM의 경영권을 사모예드와 타지마할 명의로 인수하십시오."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애플의 대주주들과 면담 일정을 잡았으니까."
그는 월가의 거물답게 애플의 대주주들과 나름 안면이 있는 눈치였다.
그랜데일을 돌려보낸 뒤 한국에 있는 이태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된 후 나직한 어조로 용건을 말했다.
"김창동에 대해서 말씀해 보십시오."
-김대표가 원하는대로 교도소에 수감될 예정이다. 이제 만족하나?
"몇년 형을 구형하실 생각입니까?"
-3년형.
"너무 낮은거 아닌가요? 수십억 대의 금품을 수수했는데 고작 3년형 밖에 구형을 안하시는 겁니까?"
-더 이상은 무리다. 그러니까 이 정도에서 만족하라고.
"싫은데요."
-김창동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솔직히 말해봐.
"형님은 모르셔도 됩니다. 하여튼 내가 원하는 건, 최소 7년형 이상입니다."
-감히 나에게 명령을 하는거냐?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