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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77화 (77/175)

77화 3가지 요구 조건

미래전략실에 들어서자 이성호가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고개를 끄덕인 뒤 고풍스런 책상에 좌정했다.

면전에 공손히 시립한 이성호에게 물었다.

"이성준이 추진하는 신수종 사업이 뭐죠?"

그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전기차 배터리와 바이오 제약 사업입니다."

나름 그럴듯한 신수종 사업이었다.

"그가 조성한 자금 규모를 말씀해 보십시오."

"대략 20조원 안팎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사회의 승인을 받은 건가요?"

"네. 대표님."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대영물산을 제외한 전 계열사의 경영권을 성준에게 일임한 상태였지만, 나에게 일언반구 언급 없이 무려 2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한 건, 말이 안되는 처사였다.

"계열사의 금고가 텅텅 비었겠군요?"

"말씀대로 계열사의 자금 경색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가 조성한 20조원 중에, 금융권에서 조달한 자금이 얼마죠?"

"12조원 내외로 알고 있습니다."

"8조원은 사내유보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12조원은 대출로 조달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제멋대로 날뛰는 성준을 단칼에 내치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성호에게 넌지시 귀뜸했다.

"차기 회장직을 약속할테니, 이성준을 예의주시 하십시오."

그러자 녀석이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의 갸냘픈 등을 친근하게 다독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부터 이성호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원팀으로 일해봅시다."

성호가 허리를 숙인 자세로 공손히 화답했다.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은 자신의 분수를 나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

청담동 인근의 루프탑 라운지바에 이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 홀로 칵테일을 음미하며 향후 계획을 면밀히 구상했다.

성호 역시 대영그룹의 회장직을 노리고 있었다.

그의 당면 과제는 대영그룹의 진정한 오너인 김한빈의 눈에 드는 것이었다.

그런 탓으로 한빈에게 간이라도 내줄 것처럼 행동했다.

성호는 가늘고 길게 가는 삶을 추구했다.

짧고 굵은 삶을 추구하는 이성준과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또한 상황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나름 탁월했다.

그는 대영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호는 한빈에게 그룹 회장직을 보장받는 대가로,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최소 20년 이상 무늬만 회장직을 수행하는 대가로, 한빈에게 수백억 대의 고액연봉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성호는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그 길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런 때문일까, 제멋대로 폭주하는 성준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한빈의 눈 밖에 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짙게 그려졌다.

***

서교호텔에 이필성 비서실장이 나타났다.

그는 육중한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이영박에게 구두로 보고를 올렸다.

"김한빈의 뒤에 칼야이칸과 블랙스톤, 그리고 아담 페런 미국 상원의원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그자는 수십여 개의 사모펀드를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운용자금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 것으로 사료되고 있습니다."

영박의 얼굴에 끈적한 탐욕이 들끓었다.

"김한빈에게 저녁 식사나 같이하자고 연락을 넣어."

"알겠습니다. 시장님."

그는 이필성을 내보낸 뒤 창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영박은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돈독이 잔뜩 오른 한국당 의원들의 면면을 뇌리에 떠올렸다.

한국당은 2007년 초순 경에 대통령 당내 경선이 예정된 상태였다.

앞으로 1년 7개월 동안, 당내 경선의 키를 쥐고 있는 현역 의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자면 막대한 현금이 필요했다.

두당 50억원 이상의 뒷돈을 건네야 하는 형편이었다.

한국당에는 대략 170명에 달하는 현역의원과 30명 가량의 당지도부가 있었다.

그들 중에서 100명 이상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산술적으로 수천억 안팎의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영박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탓으로 연일 정치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암중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물론 라이벌인 박근해 역시 대동소이한 입장이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확실한 물주를 잡을 계획이었다.

한빈이 그 주인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적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의 재벌그룹 회장들은 생각 외로 돈 씀씀이가 작았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정차자금을 내놓기를 끝내 거부했다.

박근해와 자신을 저울질하며 눈치보기에 돌입한 탓이었다.

영박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수천억대의 대선 경선 자금이 필요한 판국에, 그들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일까, 그는 한빈에게 내심 큰 기대를 걸었다.

***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대영물산의 사옥을 한군데로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 세 회사를 번거롭게 방문하는 게 짜증났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대영물산이 사용할 신사옥을 선정하기 위해 서울 상암동에 들어선 초고층 빌딩을 답사했다.

상암동 초고층 빌딩은 높이 640미터에, 130층에 달하는 층수를 자랑하는 빌딩이었다.

이 빌딩은 서울시 소유였다.

이영박의 작품이었다.

그는 상암동 초고층 빌딩을 완성한 뒤 시장 임기를 무사히 끝마쳤다.

추진력이 대단한 양반이었다.

서울시 관계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초고층 빌딩을 매각할 계획은 없으십니까?"

그가 은근한 어조로 즉답했다.

"어느 회사에서 나오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에게 대영전자의 사내 이사 신분증을 내보였다.

내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한 서울시 공무원이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다음달에 상암동 초고층 빌딩의 매각 공고를 공지할 계획입니다."

"예상 매각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최소 1조원 이상을 서울시는 원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곳에는 지하철이 연결이 안 된 상황입니다. 그런 판국에 1조원은 너무 과도한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우리 서울시는 수년 내에 이 초고층 빌딩과 직결되는 10호선 지하철을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건 계획에 불과한 거 아닌가요?"

서울시 공무원이 당황한 얼굴로 내 물음을 대충 얼버무렸다.

"암튼 우리 서울시의 게획은..."

"무슨 말씀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상암동 초고층 빌딩을 답사한 뒤 이영박을 만나기 위해 서교호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서교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이영박의 보좌관이 나를 맞이했다.

경호원들에게 레스토랑 출구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한 뒤, 창가에 위치한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영박이 환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잘 익은 스테이크를 안주삼아 달달한 포도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영박은 저녁 식사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은근한 얼굴로 본론을 내뱉었다.

"한국당의 당내 경선을 통과하는 후보가 대한민국의 17대 대통령이 될 겁니다."

영박의 말대로 여당은 인기가 바닥이었다.

그런 탓으로 야당인 한국당의 대선후보가 차기 대권을 차지할 것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장내에 재차 울려퍼졌다.

"당내 경선과 대선을 완주하려면 최소 4천억대의 선거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요즘 분위기가 그래서, 선거자금을 모집하는 게 쉽지 않은 형편이에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영박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김대표님의 자금 동원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에게 통 크게 배팅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가 나를 초대한 이유였다.

포도주 한모금을 입안으로 들이킨 뒤, 영박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제시하는 3가지 조건을 수용해 주신다면, 내일 당장 4천억을 시장님에게 지원하겠습니다."

그가 반색하는 얼굴로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3가지 조건이 뭡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비지니스맨입니다. 시장님도 비지니스 마인드에 대해서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습니다. 4천억을 투자한 대가로 최소 10배 이상의 이득을 취하고 싶습니다."

내 말은 길게 이어졌다.

"저는 해외에 유전과 가스전을 10개 정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시면 제 소유의 유전과 가스전을 한국 정부 명의로 매입해 주십시오. 물론 제가 원하는 가격으로."

"그리고 이태강 중앙지검장을 신정부의 초대 검찰 총장으로 낙점해 주십시오. 또한 그가 2년 임기를 마치면, 국무총리로 기용하십시오. 이게 바로, 제가 원하는 3가지 조건입니다."

"흐으음..."

영박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에게 재차 말했다.

"어차피 시장님도 노후에 크게 한탕 하셔야 할거 아닙니까? 해외자원개발 펀드를 조성하신 후, 개인적인 축재에 나서십시오. 아무도 뭐라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영박이 탐욕에 젖은 얼굴로 넌지시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어차피 나랏돈은 눈먼 돈입니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죠."

노골적인 언사를 내뱉자,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듣고보니 틀린 말씀은 아닌거 같습니다. 후후..."

"시장님 입장에서도, 국익과 사익의 절묘한 조화를 추구하시는 게 여러모로 편하실 겁니다."

재차 적나라한 언사를 내뱉자, 그의 머리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김대표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보겠습니다."

"마음의 결정이 되시면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영박은 자택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김한빈의 제안을 쉴 새 없이 곱씹었다.

'그놈의 말처럼 국익과 사익을 절묘하게 추구하는 게, 최고의 선이 아닐까?'

그는 한빈의 그럴 듯한 언변에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그런 탓일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한빈의 달콤한 제안을 당최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박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최측근인 이재호 의원을 호출했다.

1시간 후.

영박은 면전에 서 있는 이재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김한빈이 당내 경선과 대선 자금을 지원해 주는 대가로, 2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어."

"그자가 얼마나 지원해 준다는 겁니까?"

그가 즉답했다.

"4천억."

순간 이재호가 경악한 얼굴로 입을 떠억 벌렸다.

"정말 그 많은 돈을 지원해주는 건가요?"

"그 대가로 이태강 중앙지검장을 신정부의 초대 검찰 총장으로 낙점해 달라고 하더군. 그리고 2년 후에는 국무총리로 기용해 줄 것을 요청했어."

이재호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상, 이태강을 차차기 대권후보 급으로 키워달라고 요구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래서 당신한테 이렇게 자문을 구하는거 아닌가?"

"으으음..."

재호의 입에서 침중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칫 잘못하시면, 김한빈에게 코를 꿸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판단하셔야 합니다. 시장님."

영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좀 더 생각해 볼테니까, 당신은 이만 가봐."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재호는 정중히 하직인사를 올린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피트니스 센터에서 헬스 3대 운동에 매진할 찰나, 김태구 경호팀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유미향씨가 부회장님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여자가 지금 어디에 있죠?"

"피트니스 센터 출입구에 있습니다."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네. 부회장님."

잠시 후, 유미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6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나름 건강 관리를 잘한 탓인지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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