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치욕적인 각서
카이저빌딩 사무실로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대영물산의 대표들을 소집했다.
면전에 나란히 서 있는 3사의 대표들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다음달에 있을 예정인, 서울시의 상암동 초고층 빌딩 매각에 3사 공동으로 입찰하십시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서울시가 원하는 인수 가액은 1조원 남짓이니까, 대영전자 60%, 대영자동차 25%, 대영물산 15% 비율로 자금을 조달하세요."
3사 대표들은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일사불란하게 복명했다.
"말씀대로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그들을 내보낸 뒤 장동현 법무실장과 박종태 경호실장, 박은영 비서팀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앞에 나타난 그들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상암동 초고층 빌딩으로 대영전자와 대영자동차, 대영물산의 본사를 이전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상암동 빌딩으로 사무실을 이전할 준비를 하십시오."
그들이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회장실에 소속된 비서진을 박은영 팀장이 관리해 주세요."
그러자 은영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태산그룹의 비서실을 관리하라는 말씀인가요?"
"네. 하팀장과 공동으로 비서실을 맡아주세요. 그래야 내가 속이 편해요."
그제야 은영이 납득한 얼굴로 화답했다.
"부회장님 말씀대로 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박종태에게 말했다.
"박실장님은 태산그룹 부회장실에 소속된 경호팀을 관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박은영과 박종태를 내보낸 뒤 장동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업무용 빌딩의 매각 작업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즉답했다.
"지금 현재 75% 정도의 매각 완료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달 안에 업무용 빌딩을 전량 매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빌딩 매각 작업이 완료되는 즉시, 태산그룹과 대영전자, 대영자동차, 대영물산의 법무팀을 일원화하는 작업에 돌입해 주십시오."
"예. 부회장님."
나는 이번 기회에 방만하게 운영 중인 비서실과 법무팀을 한 곳으로 일원화할 계획이었다. 업무의 효율성을 제고함과 동시에 불필요한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장변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에게 한가지 보고할 사안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국내 1위 호텔 사업자인 고려호텔 측에서 대영호텔을 인수할 의향을 내비쳤습니다."
고려호텔은 고려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다.
그들은 1960년대부터 호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런 탓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 체인을 구축한 상태였다.
"그들이 제시한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대략, 7조원 내외의 자금을 배팅할 계획인거 같습니다."
"그들에게 확실하게 전하세요. 8조원 이하로는 호텔을 매각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
고려호텔 명동 본점에 장동현이 나타났다.
얼마 뒤, 동현은 고려호텔의 장택수 사장과 진지한 자세로 논의를 시작했다.
장택수가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원하시는 매각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동현이 즉답했다.
"저희는 8조원 이하로는 호텔을 매각할 생각이 없습니다."
"흐으음..."
택수의 입에서 침중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제가 생각한 가격보다 너무 높은거 같군요."
"대영호텔은 강남과 명동, 그리고 제주도에 대형 리조트 호텔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최소 8조원 이상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자부합니다."
동현의 완강한 언사였다.
그런 탓인지 택수의 얼굴에 고심의 흔적이 역력해졌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진중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내부에서 논의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확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동현은 그리 말하며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늦은 밤.
평창동 고급 주택에 장택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고려그룹의 총수인 장현모 회장에게 긴급 보고를 올렸다.
"대영호텔 측에서 최소 8조원 이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장현모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 기회에 대영호텔을 인수할 계획이었다.
강남과 명동, 제주도 등지의 요지를 점유한 대영호텔은 고려호텔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때, 장택수의 목소리가 장내에 재차 울려퍼졌다.
"대영호텔을 인수하는데 성공하면, 우리 고려호텔은 동아시아 최대의 고급 호텔 체인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특히 제주도에서 성업 중인 대영 리조트를 활용하면,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들을 대거 유치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8조원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아버지."
장 회장은 큰아들인 장택수를 신뢰했다.
더구나 그들 부자의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탓일까, 장 회장은 큰 아들의 요청을 흔쾌히 수용했다.
"돈은 얼마든지 지원해 줄테니까, 대영호텔 인수를 최단 시간내에 마무리 지어야 한다."
택수가 감격한 얼굴로 화답했다.
"염려마십시오. 아버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 말을 끝으로 평창동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
인천국제공항 전용기 계류장.
장동현만 대동한 채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잠시 후, 우리를 태운 전용기가 영국 방향으로 쾌속하게 날아올랐다.
14시간의 비행 끝에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공항을 나선 뒤 런던 켄싱턴가 인근의 시어스로벅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스위트룸 응접실에서 홍차와 흡연을 즐기며 오롯이 휴식을 취할 무렵, 장동현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영어로 작성된 계약서류가 들려있었다.
장변이 건넨 계약서를 차분히 살핀 뒤, 그에게 되돌려주었다.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이만 주무세요."
"부회장님도 그만 주무시죠."
"저는 체력이 원체 강해서 잠을 안자도 끄덕없습니다. 하하..."
그리 답하자 동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다음날 아침.
스위트룸에 뉴욕의 대형로펌에 소속된 아놀드 변호사가 나타났다.
그는 아담 상원의원이 보내준 인물이었다.
아놀드 변호사에게 장변이 작성한 계약서를 건넸다.
그는 계약서를 자세히 살핀 뒤 흡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계약서를 기본으로 매매계약을 체결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당신이 공증을 맡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을 해결한 뒤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ARM의 본사 빌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ARM의 빌딩에 들어서자 블랙스톤의 관계자들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그들과 악수를 교환한 뒤 곧바로 12층에 위치한 회의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총액 100억불에 ARM을 인수하는 계약절차를 끝마친 뒤, 탑층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ARM의 경영진들과 상견례를 가졌다.
육중한 책상에 좌정한 채 면전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명 남짓한 경영진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 중에서 내 시선은 ARM의 수석 엔지니어인 파머스에 모아졌다.
그가 바로 ARM의 모바일 CPU 아키텍쳐를 설계한 장본인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전문적인 경영자였다.
그들에게 내 의중을 밝혔다.
"ARM의 R&D 센터를 한국으로 이전할 계획입니다. 엔지니어분들 역시 당연히 한국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러자 파머스 수석 엔지니어가 난색을 표명했다.
"저희는 이곳 영국에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이 있습니다. 한국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파머스는 그리 말하며, 내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결국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건 그렇고, ARM의 모바일 CPU 아키텍쳐의 개당 라이센스 비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발머 회장이 즉답했다.
"미화로 10불(1만2천원) 안팎입니다."
"전 세계 공통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내 뜻을 가감없이 밝혔다.
"중국쪽 업체들에겐 모바일 CPU의 개당 로열티 가격을 최소 20불(2만4천원) 이상으로 책정하세요."
그러자 ARM 경영진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내 의중을 재차 밝혔다.
"중국 공산당놈들은 인류의 해악을 끼치는 족속입니다. 당연히 그놈들에겐 모든 걸 비싸게 팔아야 합니다. 그게 인류의 복지증진을 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죠."
순간 그들의 얼굴에 일제히 감탄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내 탁월한 식견에 진정으로 감복한 눈치였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허나, 발머는 여전히 내 명령에 불복했다.
"중국업체만 가격을 높여 받는다면, 그들에게 반감을 살 우려가 있습니다."
"회장님은 ARM의 지분 전량을 보유한 내가 만만해 보이십니까?"
순간 발머가 잔뜩 주눅든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눈 밖에 나는 언행을 삼가해 주십시오, 발머 회장님."
그가 굳은 얼굴로 조용히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상견례를 끝마칩시다. 그리고 내일 오후 4시까지 ARM의 인력과 연봉이 자세히 기입된 보고서를 작성해서, 시어스로벅 호텔로 갖고 오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장내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
그날밤.
시어스로벅 호텔방에서 블룸버그 통신에 이목을 집중했다.
-미국계 사모펀드로 알려진 타지마할 인베스트먼트가 ARM의 지분 전량을 100억불에 인수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중략...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ARM 인수를 시작으로 애플과, TMC를 차례로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전 세계 IT 패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탓일까, 찬란한 미래가 내 머리 속을 성난 야생마처럼 거침 없이 질주했다.
바로 그때, 장동현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이영박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수화기에서 영박의 간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국에 들어가는 즉시, 시장님을 찾아뵙겠습니다."
통화를 끝마친 뒤 장변에게 지시를 내렸다.
"A4 용지 2장에 내가 말하는 내용을 받아 적으세요."
"예. 대표님."
***
한국에 귀국한 뒤 대영그룹의 오종덕 부회장을 대영호텔 소공동 점으로 호출했다.
우리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캐비어와 푸아그라를 즐기는 한편, 맛 좋은 포도주를 차분히 음미했다.
어느 정도 속을 채운 뒤, 오종덕에게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뭡니까?"
"이영박 시장에게 그 편지를 전달해 주십시오."
종덕이 은근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각서의 일종인가요?"
"맞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날 밤.
나를 태운 부가티 베이론이 강남의 고급 클럽 앞에 정차했다.
차에서 내려서자, 클럽 앞에 진을 친 선남선녀들의 시선이 내 일신에 집중됐다.
시가 백억원을 호가하는 부가티 베이런과 수십여 명의 경호원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내 경호원들은 인의 장막을 둘러치며 나를 클럽 안으로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당연히 클럽의 기도는 우리 일행의 기세에 기가 질린 나머지, 오래전에 도망간 상태였다.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장내의 시선이 우리 일행에게 모아졌다.
그때, 클럽 매니저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조곤조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벤트를 시작할까요?"
"서유럽 고급 호텔 여행권을 경품으로 내거세요. 가장 화끈하게 잘 노는 여성에게 1억원 상당의 서유럽 여행권을 제공하십시오."
"예. 부회장님."
잠시 뒤, 클럽은 후끈한 열기에 휩싸였다.
서유럽 고급 호텔 투어 여행권에 환장한 클럽녀들이, 너도나도 질펀한 춤판을 쉴 새 없이 펼친 탓이었다.
***
이영박은 가회동 자택의 서재에서, 김한빈의 서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 이영박은 대통령에 당선될 시, 김한빈이 소유한 해외 유전과 해외 가스전을 대한민국 명의로, 시세보다 다섯배 이상의 가격으로 매입한다.>
<나, 이영박은 대통령에 당선될 시, 이태강 중부지검장을 신정권의 초대 검찰 총장으로 임명한다.>
<나, 이영박은 이태강의 검찰 총장직을 보장함은 물론, 그가 총장 임기를 끝마치는 즉시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로 기용할 것임을 약속하는 바이다.>
영박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4천억에 달하는 대선자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치욕적인 각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박근해를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거액의 선거자금이 필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