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법조계 로열패밀리
이영박은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명문대를 입학했다.
영박은 대학을 졸업한 뒤 대기업 건설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그 후, 단 5년 만에 평사원에서 등기임원으로 초고속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룹의 왕회장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받은 탓이었다.
그런 때문일까, 영박은 돈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냉엄한 철칙을 어린시절부터 온몸으로 체득한 까닭이다.
그는 한빈이 제시한 굴욕적인 각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아는 탓이었다.
영박은 각서에 열손가락의 지장을 차례로 날인한 뒤 자필서명을 기입했다.
그 후, 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대영호텔 강남 본점.
피트니스 센터에서 고중량 스쿼트에 열중할 무렵, 박영록 경호팀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이재호 의원이 도착하셨습니다."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네. 부회장님."
이재호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목례를 취한 뒤 각서 한장을 내밀었다.
그가 건넨 각서를 살피자 이영박의 지장과 자필 서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탓일까,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번져갔다.
그때, 이재호의 은근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선거자금은 언제 주실 생각입니까?"
그에게 즉답했다.
"내일 모레 즈음에 돈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돈이 마련되는 즉시 저희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그럽시다."
그리 답하자, 이재호가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곧바로 대영전자의 김동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다음날.
나를 태운 대영전자의 전용기가 스위스 제네바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UPS 은행으로 직행했다.
내 전담 관리자인 후베르트에게 지시를 내렸다.
"미화 5억불(6천억) 상당의 CD를 발행해 주십시오."
"연동계좌를 어디로 지정할까요?"
"타지마할 계좌와 연동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고객님."
30분 후.
후베르트가 미화 5억불 상당의 CD 50장을 나에게 건넸다.
장당 1천만불(120억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CD를 서류가방에 수납한 뒤 은행문을 유유히 나섰다.
***
스위스 제네바에서 일박한 후 곧바로 한국행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할 여유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 후, 약속장소인 서교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교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태강에게 전화를 돌렸다.
통화를 끝마칠 무렵, 서교호텔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이영박이 묵고 있는 24층으로 올라갔다.
스위트룸 문 밖에 경호원들을 남겨둔 뒤 스위트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응접실 소파에서 커피를 즐기던 이영박이,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드러내 보였다.
그에게 목례를 취한 뒤 맞은편 의자에 착석했다.
돈가방을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영박의 두눈에 진한 탐욕이 저절로 치솟았다.
그에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뒤에 이태강 중앙지검장이 올 예정입니다. 그의 입회하에 돈을 전달하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돈은 준비되신 겁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 답하자 영박이 기대만발한 얼굴로 서류가방에 시선을 모았다.
20분 후, 예상대로 이태강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영박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태강에게 각서를 내밀었다.
각서 내용을 살핀 태강이 감격한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에게 목례로 화답한 뒤 서류가방을 영박에게 내밀었다.
그는 스위스 UPS 은행에서 발행한 미화 3억7천만불(4000억) 상당의 CD를 확인한 뒤,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입으로 호탕한 광소를 길게 토해냈다.
"우하하하하하하...!"
좋아죽는 모양새였다.
***
그날 밤.
타팰 펜트하우스로 태강을 불러들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정겹게 마주잡았다.
"고맙다. 너무 감사해서 말이 안나올 지경이야."
녀석은 진심으로 나에게 감복한 눈치였다.
"저는 형님을 청와대로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계획입니다. 그러니 내가 팥이 메주라고 말해도 형님은 무조건 믿으셔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하하..."
그의 입에서 흡족한 웃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앞으로 우리는 원팀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 점을 항상 숙지해 주십시오."
그리 말하며 책상 서랍에서 백억 상당의 CD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태강은 내가 건넨 CD를 덥석 받은 뒤 서류가방에 재빨리 수납했다.
"검찰 선후배들에게 떡값을 돌리세요.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고니까."
그가 헤벌쭉 벌어진 입으로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
늦은 밤, 강남 모처의 클럽.
경호원들을 뒤로한 채 나 홀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클럽에서 격렬한 춤사위를 온몸으로 만끽할 무렵, 여자들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연이어 울려퍼졌다.
그와 더불어 남자들의 치고박는 싸움판이 장내에 펼쳐졌다.
싸움판이 펼쳐진 장소로 시선을 모으자,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이 평범한 남자를 집단린치하는 광경이 두눈에 생생히 포착됐다.
녀석들은 연약한 청년의 육신을 구둣발로 잔인하게 짓이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하나 청년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집단폭행을 가하는 무리들의 숫자가 거의 여섯명에 육박한 탓이다.
나 역시 청년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놈들의 흉흉한 기세를 목도하자 저절로 온몸이 위축됐다.
그 정도로 살벌한 현장이었다.
놈들은 청년의 몸뚱이를 처참하게 짓밟은 뒤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잠시 후, 클럽에 경찰과 119 구급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온몸에 피칠갑을 둘러쓴 남자를 신속하게 구급차로 이송했다.
나 역시 곧바로 클럽을 떠났다.
난장판이 된 클럽에 정나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
부가티 조수석에 몸을 실은 뒤 운전석의 김태구 경호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대영호텔로 갑시다."
"네. 부회장님."
호텔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후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 강남 클럽에서 집단 난투극이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20대 초반의 김모씨가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중략...
뭔가 이상했다.
일방적인 집단 린치가 집단 난투극으로 둔갑한 탓이다.
이태강에게 전화를 돌렸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강남 야누스 클럽에서 발생한 집단 폭행 사건을 조사해 보세요."
수화기에서 태강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생처럼 귀한 남자가 그런 시시껄렁한 사건에 뭐하러 신경을 쓰는 건가?
"호기심 차원이라고 해둡시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대로 하세요."
태강은 나에게 꼼짝 못했다.
내 덕분에 검찰 총장은 물론이고 차차기 대권마저 확약받은 탓이다.
-정 원하다면, 내가 한번 알아볼게.
"특히 가해자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세요. 냄새나는 놈이 있는거 같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
태산그룹.
부회장실에 들어가자마자 TV를 켰다.
그 후, 아침 뉴스에 이목을 기울였다.
-오늘 새벽 강남 클럽에서 집단 난투극을 벌인 김모씨가 긴급 뇌수술 도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경찰은 집단 난투극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소환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중략...
집단이 개인을 잔인하게 폭행한 사건이, 집단 난투극으로 둔갑한 상태였다.
가해자 중에 배경이 범상치 않은 놈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찰나, 하동균 비서팀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이태강 중앙지검장이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들여보내세요."
"네. 부회장님."
잠시 후, 태강이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커피와 흡연을 즐기며 클럽 사건을 화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가해자 중에 이용민이라는 놈이 있는데, 그놈 집안이 법조계에서 힘깨나 쓰는 명문가라고 하더군."
태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대법관 출신이고, 외할아버지는 검찰 총장, 그리고 부친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야."
"게다가 큰아버지는 대검 차장이고, 작은 아버지는 대형로펌을 운영하고 있어. 법조계의 로열패밀리라고 할 수 있지."
이용민과 놈의 잘나가는 가족을 모조리 박살내고 싶은 반발심이 전신에 팽배해졌다.
본능적인 욕망이었다.
"이번 사건은 이용민 패거리가 사망한 김모씨를 잔인하게 집단폭행한 겁니다. 당연히 주모자인 이용민은 무조건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아야 합니다."
그리 말하자, 태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용민과 악연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건 없습니다. 단지 사회정의 차원에서 놈을 철저하게 짓밟고 싶을 뿐입니다."
"쉽지 않아. 집안에 내노라하는 법조계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고."
"그래도 형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중형을 구형 할 수 있는거 아닙니까?"
"법조계 파워 엘리트 그룹과 척을 지라는 말인가?"
그의 못된 버르장머르가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원팀입니다. 당연히 형님은 내 요구를 수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법조계 황태자고 나발이고, 내 사전에 그런 건 없습니다. 꼬우면 밟아 죽이면 그만입니다."
태강이 흠칫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에게 재차 말했다.
"저는 밟아 죽이고 싶은 놈이 있으면, 무조건 밟아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이용민이 바로 그런 케이스죠."
"흐으음..."
태강은 내 잔인한 면모를 확인한 탓이지, 깊은 한숨을 토했다.
그 후,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생이 원하는대로 일을 추진하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하..."
내 입에서 절로 흡족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강남 경찰서에 소환된 이용민은 자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음에도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법조계를 주름잡는 집안 어른들을 잔뜩 믿은 탓이다.
그는 클럽에서 자신이 점찍은 여자에게 함부로 들이댄 김모씨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에게 잔인한 폭행을 주도적으로 행사했다.
그 결과 김모씨는 후두부에 커다란 손상을 입고, 긴급 뇌수술을 진행했으나 끝내 사망했다.
하지만, 용민은 일말의 죄책감조차 전혀 느끼지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이어져온, 타인에 대한 폭행에 무감각해진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와 중고교 시절부터 동료 학생들에게 폭행과 폭언을 수시로 가했다.
그럴때마다 집안 어른들은 법의 힘을 이용해, 피해 학생과 부모들에게 끔찍한 2차 가해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다.
법위에 군림하는 인간말종들의 전형이었다.
허나, 용민은 재수가 너무 없었다.
중앙지검의 수사관들이 강남 경찰서에 출현한 탓이다.
그들은 담당 형사에게 조사를 받고 있는 용민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후, 녀석의 양손목에 다짜고치 수갑을 채웠다.
그러자 용민의 입에서 성난 고함이 터져나왔다.
"당신들 뭐야?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러는거야? 씨발놈들아!"
그때, 검찰 수사관의 입에서 냉정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이용민씨를 살인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검찰 수사관들은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한 뒤, 용민을 짐짝처럼 경찰서 밖으로 끌고나갔다.
그날 밤.
중앙지검 취조실.
이태강 지검장에게 특명을 받은 오현호 검사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클럽에서 입수한 자료 사진을 이용민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용민은 사진을 도외시한 채 묵비권을 행사하는데 집중했다.
오 검사의 입에서 싸늘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네놈이 사망한 김모씨를 주도적으로 폭행한 사진과 동영상이 다수 확보된 상태다. 너는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어!"
그의 말은 계속 됐다.
"집안 어른들을 믿고 객기를 부리나 본데, 네놈의 개망나니 짓거리도 오늘로써 끝이라고!"
그때, 취조실에 오대양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나타났다.
그는 이용민에게 귓속말을 전달한 뒤, 오 검사에게 냉정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