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이 돈을 숨김-81화 (81/175)

81화 서교동 재개발 사업

이종성 전 대법원장의 입에서 단도직입적인 언사가 흘러나왔다.

"이태강 중앙지검장을 설득해주게.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네."

"뜬금없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 집안 장손이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일세."

"당최 이해를 못하겠군요. 영감님 손자와 지검장님이,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시치미를 뚝 떼자, 그가 앓는 듯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폭행치사 혐의로 수감된 이용민이 내 손자일세. 그리고 손주놈을 수사하는 곳이 중앙지검이고."

"그러니까, 이런 부탁을 왜 나에게 하시냐고요?"

그가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읍소했다.

"자네가 이 지검장의 스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걸세."

"영감님이 뭔가 오해를 하시나본데, 저랑 지검장님은 그냥 동네 선후배에 불과합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이런 부탁은 지검장님에게 직접 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타이페이 대통령궁 집무실에 장요청 경제산업성 장관이 나타났다.

이등휘 대통령은 면전에 나타난 장요청에게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만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인 TMC가 외국 자본에 넘어가는 꼴을, 저는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매각 작업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하세요!"

그러자 장요청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칼야이칸의 제퍼슨 회장은 월가의 거물입니다. 그자가 미국 정부를 통해서 항의를 해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문제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TMC는 누가 뭐래도 대만 국민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러니 오늘 시간부로 TMC의 자산 매각을 중단하는 법적 조치를 취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그날, 대만 정부는 TMC의 자산을 외국 자본에 매각하는 행위를 절대 금지하는 법안을, 국무회의에서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에 있는 한빈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

태산그룹 종로 본사 부회장실.

책상 위에 올려진 결재서류에 시선을 모았다.

서류에는 서교동 일대의 재개발 프로젝트가 담겨있었다.

서교동은 홍대 상권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태산건설은 바로 그곳에 7천세대 규모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이미 서울시에서 재개발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문제는 사업추진비였다.

다세대와 개인주택, 상가 등을 허물고, 그 자리에 초대형 주상복합 건물과 고급 상가 빌딩을 올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이주비와 보상비, 건설비용 등이 필요했다.

최소 5조원 이상의 사업자금이 예상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태산그룹에는 5조원을 투입할 만한 재원이 태부족했다.

그렇다고, 내 사재를 회사에 투입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태산그룹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자산운용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허나, 태산그룹의 임직원들은 나를 그 이상의 존재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전형적인 재벌그룹 총수로 취급한 것이다.

달콤쌉싸름한 심경이었다.

좋아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내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찰나, 노크소리와 동시에 진대현 본부장의 모습이 장내에 드러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서교동 초고층 주상복합 재개발사업은 최소 300% 이상의 투자수익을 저희 회사에 안겨다줄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부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뭐죠?"

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즉답했다.

"서울시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용적률 800%를 보장했습니다. 최소 70층 이상의 주상복합 건설을 허가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용적률을 높여주는 이유가 뭐죠? 서울시가 자선기관도 아닐텐데?"

진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늘어나는 가구 수의 20% 정도를 장기전세 임대로 돌려달라고 하더군요."

"소셜믹스를 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서교동 주상복합 아파트는 강북을 대표하는 고급 주거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 곳에 임대민을 수용한다면, 사업성 자체가 불투명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돈많은 부자들에게 외면을 받는 탓이다.

"서울시의 제안을 거부하면 어느 정도의 용적률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350%가 한계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30층 정도가 한계라는 말씀인가요?"

진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부회장님."

그를 내보낸 뒤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에 시선을 모은 채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서울시의 제안을 심사숙고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서교동 주상복합 재개발 사업에 임대민을 수용하는 건, 득보다 실이 많았다.

내가 추구하는 고급 주거지의 이미지와 걸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30층 높이의 주복 4개 동과 상가동 1개를 건설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음을 정한 뒤 김태구 경호팀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눈 앞에 나타난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서교동이랑 상암동을 차례로 둘러볼 예정이니까 차와 경호원들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진대현 본부장도 동행할 거니까, 그쪽에도 연락을 하세요."

"네. 부회장님."

***

서교동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옆에 동승한 진대현에게 넌지시 물었다.

"30층 높이의 주복으로 재개발할 경우 수익성이 많이 악화되나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의 말은 계속 됐다.

"잘해봤자 본전인 수준입니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5조원을 투입해봤자 본전치기 수준이라는 말씀인가요?"

그가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직후, 대현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교동 재개발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서울시의 제안을 수용하시는 게 최선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목표로한 300%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흐으음..."

내 입에서 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서교동 일대를 고급 주거지로 조성하려는 계획이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그때, 차창 밖으로 서교동 로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더불어 홍대생들과 젊은 선남선녀, 직장인들이 주변을 분주히 왕래하는 광경도 눈에 스쳤다.

서교동 일대는 강남을 능가하는 젊음의 거리였다.

결코 놓칠 수 없는 재개발 사업지역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20%에 달하는 임대가구를 수용하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서교동 재개발 지역과 상암동 초고층 빌딩을 두루 시찰한 뒤 대영호텔 강남 본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칼야이칸의 제퍼슨 회장이 내 호텔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홈바에서 칵테일을 음미하며 속 깊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제퍼슨이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만 정부가 TMC의 해외 매각에 제동을 걸고 나섰네."

"그들의 반대를 차단할 수 있는 복안이 없을까요?"

"미국 정부가 전면에 나서기를 바라는 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제퍼슨이 부정적인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미국 정부도 이번 사안은, 대만한테 압력을 행사하기가 쉽지않아. 대만은 대중국 압박의 중요한 파트너거든."

"그럼 저더러 TMC 인수를 포기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그 편이 나을거 같아. 차라리 이참에 대영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을 대규모로 확대하는 게 어떻겠나?"

"대영전자의 파운드리 사업 부문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는 말씀입니까?"

"비지니스는 언제나 최선이 아니면 차선일세."

제퍼슨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배웅한 뒤 3층에 있는 풀장으로 올라갔다.

풀장에서 수영을 하며 제퍼슨의 조언을 곰곰이 되새겼다.

대만정부는 반도체 핵심 생산 시설과 고급 인력을 보유한 TMC의 해외 매각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사실상 TMC 인수가 물거품이 된 상황이었다.

결국 대영전자의 파운드리 사업부를 키우는 게 최선이었다.

다른 수가 없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대영전자의 파운드리 공장을 시찰하고픈 욕망에 절로 휩싸였다.

내 두눈으로 대영의 파운드리 생산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

다음날 오전.

옷을 챙겨입고 1층 응접실로 내려가자, 타이트한 정장룩 차림의 박은영 비서팀장이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주로 내 하루 스케쥴을 담당했다.

평소에는 태산그룹 비서실로 출근하지만, 오늘처럼 아침 일찍 현지 시찰을 나갈 때는 내가 있는 곳으로 출근했다.

"경호원들과 차량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조신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잠시 후, 그녀와 함께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자리에 나란히 몸을 실었다.

오늘따라 은영의 몸에서 향기로운 꽃내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나를 수행하기 위해 정갈하게 꽃단장을 한 모양이었다.

***

대영전자의 수원 공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옆에 동승한 은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요즘 사귀는 남자라도 있나요?"

그녀가 얼굴 가득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상하네요. 우리 은영씨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남친이 없다니?"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부회장님."

은영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칭찬에 기분이 많이 좋아진거 같았다.

언제 기회를 봐서,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 할거 같았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점령할 무렵, 수원 공장의 거대한 전경이 차창 밖에 짙게 드리워졌다.

차에서 내린 뒤 은영과 김태구 경호팀장을 대동한 채 파운드리 생산 시설이 있는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즈음, 대영전자의 파운드리 사업부문을 총괄하는 김재성 기술 이사 일행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김재성 이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파운드리 생산 시설을 둘러보고 싶으니까, 당신이 직접 안내하십시오."

김재성이 허리를 숙인 자세로 공손히 복명했다.

"네. 부회장님."

***

은영과 경호원들을 공장 밖에 남겨둔 채 김재성과 단 둘이 생산시설을 시찰했다.

방진복을 착용한 뒤 위탁 반도체 생산 설비가 설치가 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장은 내 예상외로 규모가 단촐했다.

그래서 김재성에 물었다.

"파운드리 공장이 너무 작은거 아닙니까?"

그가 입가에 고소를 머금은 채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희 대영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는 관계로 경쟁업체들보다 파운드리 생산 규모가 작습니다."

"대만의 TMC보다 어느 정도로 작은 겁니까?"

"TMC의 10분의 1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런 이유로 전 세계 반도체 설계기업들 대다수가 TMC에 물건을 발주하는게 현실입니다."

"대영전자의 위탁 반도체 생산 시장 점유율이 어느 정도죠?"

김재성이 허탈한 얼굴로 즉답했다.

"12% 남짓입니다."

"TMC의 쉐어도 말씀해 주십시오."

"TMC의 경우 거의 70%에 육박하는 쉐어를 갖고 있습니다."

"흐으음..."

내 입에서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TMC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수십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

이종성은 법원을 움직이기로 작심했다.

그는 판사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는 대법원장과 직접 접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현직 대법원장은 그의 라인이었다.

늦은밤.

가회동 고급 주택에 최민석 대법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종성은 서재에 나타난 최민석에게 슬며시 말했다.

"자네가 이번 한번만 나를 도와줘야겠네."

최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제가 책임지고, 선배님의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종성이 감격한 얼굴로 민석의 손을 두손으로 정겹게 마주잡았다.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해주면,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선배님. 하하하하...!"

민석은 사람 좋은 웃음을 길게 흘려보낸 뒤 가회동 집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토요일 무렵.

최민석 대법관의 자택에 중앙지법 영장 적부심 판사들이 나타났다.

민석은 면전에 시립한 영장 적부심 판사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조만간 이용민이 구속 영장 적부심을 신청할 계획이니까, 당신들이 알아서 선처해주면 고맙겠군."

명령 아닌 명령을 하달받은 영장 적부심 판사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불만이 치솟았다. 그때, 민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장내에 재차 울려퍼졌다.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자네들이 원하는 보직을 약속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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