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이 돈을 숨김-84화 (84/175)

84화 켄싱턴 필드

김재성 기술이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네덜란드의 ASM 사에서 45나노 반도체 생산 설비를 대규모로 도입할 준비를 하십시오."

그가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원하시는대로 생산라인 증설과 45나노 장비 도입에 10조원을 투입할 계획이니까, 투자계획서를 작성해서 저에게 보고서로 제출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그를 내보낸 뒤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창 밖으로 시선을 모으자 대영전자와 자동차, 물산의 사무용 가구와 각종 집기를 운반하는 대형 이삿짐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명품 상가와 입주자를 모집할 차례였다.

곧바로 진대현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시간 후.

진대현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상암동 초고층 빌딩의 1층부터 80층까지 명품 상가와 고급 주거지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묵묵히 경청했다.

"진본이 이번 프로젝트를 맡아주십시오."

"원하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분양을 완료하겠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최고의 초고급 주상복합을 추구할 생각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알아서 분양을 해보세요."

"예. 부회장님."

***

늦은밤.

진대현은 자택의 서재에서 상암동 초고층 빌딩의 분양 계획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태산건설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런 탓으로 상가 분양과 고급 아파트 분양 경험이 많았다.

대현은 이번 프로젝트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명품상가와 고급 주거지 조성은 그의 전공분야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하 8층부터 지상 30층까지 명품 상가로 조성하고, 31층부터 80층까지 고급 주택으로 분양할 계획을 세웠다.

명품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백화점과 입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레스토랑, 유기농 식자재 마트 등을 두루 입점시키기로 작심했다.

그는 밤늦도록 계획서를 작성한 뒤 새벽 5시 무렵에 취침에 들었다.

다음날.

진대현은 오전 9시부터 국내의 백화점 관계자들과 강남의 부동산 업자 등을 대상으로 연쇄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 후, 상암동 초고층 빌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상암동 초고층 빌딩.

130층 펜트하우스의 테라스에서 서울 시내를 차분히 조망할 무렵, 박은영 비서팀장의 고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퍼졌다.

"진대현 본부장이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펜트하우스로 데리고 오세요."

"예. 부회장님."

잠시 뒤, 진대현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가 제출한 보고서를 자세히 살핀 뒤, 넌지시 입을 열었다.

"31층부터 80층까지 고유의 브랜드 네이밍을 사용하자는 말씀입니까?"

"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 주거지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유의 브랜드가 필요합니다."

그럴 듯한 조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재차 물었다.

"염두에 두신 브랜드 네이밍이 있으신가요?"

"켄싱턴 필드라는 브랜드가 어떤신지요?"

"켄싱턴 필드가 무슨 뜻이죠?"

그가 즉답했다.

"켄싱턴 필드는 영국 런던의 초호화 주거지를 상징하는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의 고급 주거지 이미지를 차용하자는 말씀인가요?"

"맞습니다. 부회장님."

매우 그럴듯해 보였다.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31층부터 80층까지 '켄싱턴 필드'라는 브랜드 네이밍을 사용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내노라하는 슈퍼카를 판매하는 매장을 반드시 입점시키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

동경 오오다구 인근의 고급 주택에 이종성 전 대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주변에 잠복하고 있던 조중동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더불어 기자들의 취재요청이 이종성에게 집중됐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집 안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그날 이후, 이종성 전 대법관은 동경 주택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칩거생활에 돌입했다.

자업자득이었다.

***

대검찰청 대회의실에 검사장 이상급 고위 검사들이 총출동했다.

그들 중에는 이태강의 모습도 보였다.

검찰 총장의 모두발언이 끝나자마자 이태강이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사법부의 부패지수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추셉니다. 이번 기회에 법을 악용하는 판사들을 엄정하게 심판해야 합니다!"

그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다른 고위 검사들 역시 동조하는 언사를 이어나갔다.

"이 지검장의 말씀대로 그동안 사법부는 법 위에 군림하며 온갖 부패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힘있는 권력자와 재력가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해주는 대가로, 수십 수백억 대의 금품수수 행위를 버젓이 저질렀습니다."

"맞습니다. 판사들은 자신들이 법을 집행한다는 오만함에 사로잡힌 채, 온갖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범했습니다."

"저 또한 사법부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엄정하게 수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법부를 엄정히 수사하는 것으로 중지가 모아지자, 검찰 총장이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검과 중앙지검 특수부를 주축으로 이종성 전 대법관의 비위혐의와 재벌 총수, 불법 행위에 연루된 판사들 전원에 대해 전방위적인 수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언사가 끝나자 장내에 배석한 고위 검사들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그들은 비리 판사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로 굳게 다짐했다.

잘난체가 하늘을 찌르는 판사들에게 평소 당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검사들 대다수는 판사들에게 격렬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재력가와 권력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

이종성 전 대법관과 이정석 헌법재판관, 이정명 대검차장, 오대양 로펌의 이정태 대표의 자택에 중앙지검 수사관들이 벌떼처럼 들이닥쳤다.

그들은 거의 하루 종일 압수수색 활동을 펼치며 증거가 될만한 것을 눈에 보이는 족족 수거해갔다.

대검찰청.

이정명 대검차장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부친과 자신의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 까닭이다.

게다가 검찰 안팎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 때문에 운신의 폭이 극도로 좁아졌다.

결국 그는 검찰에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 길이 최선이었다.

다음날.

이정명은 검찰에 사직서를 우편으로 제출한 뒤 부친이 있는 일본으로 출국했다.

그는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뒤 오오다구 인근의 고급주택으로 향했다.

정명은 집 앞에 진을 친 취재진들을 간신히 떼어낸 후 집 안으로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그는 집안 내실에서 부친인 이종성 전 대법관과 만남을 가졌다.

정명의 입에서 쓴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오버하는 바람에 내 앞길이 모두 막혔다고요!"

이종성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정명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용민 같은 호로새끼는 절대 도와주는게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아버지는 내 말이 개똥으로 들리십니까!"

그의 울분에 찬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아버지가 용민이 개새끼를 구명하는 바람에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겁니다. 요즘 젊은 판사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데, 그런 친구들한테 뭐하러 압력을 행사하신 거냐구요!"

이종성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모습에 정명은 제풀에 지쳐버렸다.

부친의 기운 빠진 모습에 애잔함을 느낀 탓이다.

그렇지만 정명은 할 말은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모든 죄를 이용민과 정석이 놈에게 떠넘기세요. 정석이가 헌법재판관이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영장 전담 판사를 압박한 거라고 말을 맞추시라고요!"

"아들놈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라는 말이냐?"

"다른 수가 없어요. 그래야 성난 민심이 가라앉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대로 하세요. 아버지."

결국 이종성은 못 이기는 척 정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잠시 후, 그는 서울에 있는 이정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정석 역시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었다.

국민의 성난 여론 때문이었다.

TV와 신문, 인터넷은 그들 집안을 비난하는 기사로 가득했다.

우월적인 법조 권력을 바탕으로, 살인을 저지른 집안의 범죄자를 무죄로 방면한 사실이 널리 알려진 탓이었다.

그런 탓일까, 서초동 법조타운에서는 이용민을 살인죄로 기소하라는 사회 각계각층의 시위가 연일 펼쳐지고 있었다.

더불어 이종성 전 대법관 역시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라는 여론이 비등해진 상태였다.

그 즈음, 일본으로 도피한 이종성에게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석은 부친과의 전화통화를 끝마친 뒤,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헌법재판소 프레스룸에 기자들과 카메라맨이 구름처럼 운집했다.

잠시 뒤, 장내에 이정석 헌법재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정석은 연단에 오른 뒤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후, 자신의 입장을 간단하게 피력했다.

"오늘 저는 헌번 재판관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더불어 무고한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들놈을 비호한 죄를, 겸허하게 수용할 생각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취재진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는 짤막한 기자회견을 끝마치자마자 중앙지검으로 직행했다.

중앙지검 취조실.

이태강은 매직 거울을 통해 취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정석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담당 검사에게 자신의 모든 죄를 순순히 시인하는 중이었다.

그런 모습에 태강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그려졌다.

***

상암동 초고층 빌딩.

130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에서 헬스 3대 운동에 매진할 찰나, 장내에 이태강이 나타났다.

그의 입에서 시니컬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이정석이, 부친인 이종성의 죄를 모두 뒤집어쓸 생각인거 같다."

태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중앙지검에 자발적으로 출석해서, 판사들을 회유한 게 자기라고 진술하더군."

"나름의 효심인가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연로한 부친대신 자신이 옥살이를 하려고 작정한 모양이야."

"그럼 이종성이 재벌 그룹에서 금품을 수수한 의혹에 대해서는, 수사가 중단되는 겁니까?"

그가 허탈한 얼굴로 답했다.

"부자를 동시에 구속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아. 이정석이 구속될 경우, 이종성을 대상으로하는 구속 수사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아."

태강의 말처럼 한국은 부자를 동시에 구속하지 않는 룰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와 아들 중에서 한명이라도 구속 당할 경우, 사실상 수사는 그것으로 종결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이정석에게 몇년 형을 구형하실 생각입니까?"

"마음 같아서는 10년형 이상을 구형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6년형이 한계야."

"그럼 이정석을 불구속으로 기소하세요. 그래야 이종성에 대해서 구속 수사를 진행할 수 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태강이 자신 없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이번 기회에 국민들에게, 형님의 엄정한 법집행 수호의지를 확실히 보여주세요. 그래야 차차기 대선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겁니다."

나름 용기를 북돋워주자, 그제야 녀석의 얼굴에 환한 표정이 번져갔다.

태강은 머리를 연신 끄덕인 뒤 장내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

대영전자의 김재성 기술이사가 네덜란드 ASM의 본사에 나타났다.

그는 ASM 관계자에게 용건을 밝혔다.

"45나노 생산 설비를 대규모로 도입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자 ASM의 관계자가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는 45나노 반도체 생산 설비를 양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연히 원하시는 물량을 한치의 착오 없이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김재성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날 재성은 네덜란드 현지의 ASM 공장을 두루 시찰했다.

그는 밤늦게 호텔에 도착한 뒤, 한국에 있는 김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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