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트럼프 타워
상암동 초고층 빌딩.
진대현이 129층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두툼한 보고서를 제출한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보고서를 펼치자 트럼프 타워의 전경을 가득 담은 고화질 사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고서를 자세히 살핀 결과 트럼프는 나름 장점이 많은 사업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전 세계 최초로 초호화 주상복합 아파트의 개념을 확립하고, 그걸 실현해낸 장본인이었다.
트럼프는 뉴욕 맨해튼에 140층 규모의 초고층 빌딩을 건설한 뒤, 안전 문제에 극히 민감한 미국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주상복합 아파트의 완벽한 보안과 편리한 주거 서비스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원래 미국인들은 아파트를 서민들의 주거지 정도로 치부했다.
좁은 공간에 닭장처럼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바로 그 점에 착안해서, 최고의 보안과 각종 주거 편의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제공할 수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란 개념을 탄생시켰다.
연일 총격 사건이 벌어지는 미국의 현실에서, 부자들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본인과 가족의 안전을 답보하기 위해, 생활이 불편한 교외에 대저택을 건설한 뒤 매년 거액의 경호비용을 경비업체에 지불했다.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트럼프는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트럼프 타워의 철통같은 보안 서비스를 입주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한 것이다.
더불어 저층에 입점한 각종 명품 상가와 초고급 외식업체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부자들에게 대대적으로 어필했다.
그런 탓일까,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트럼프 타워의 인기는 수직상승했다.
그리고 분양을 시작한지 단 일년 만에, 평당 가격이 한화로 6억까지 치솟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중동과 아시아, 유럽의 억만장자들이 트럼프 타워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진대현을 사무실로 다시 호출했다.
면전에 나타난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트럼프 타워를 적극적으로 벤치마킹 하실 생각입니까?"
"그 편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트럼프 타워에 입점한 명품 업체와 접촉을 해보세요."
대현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복명했다.
"넵. 부회장님!"
***
경호원을 대동한 채 한강변을 거닐며 파운드리 산업의 육성책에 정신을 집중했다.
대당 가격이 2천억에 육박하는 45나노 반도체 생산 장비를 30대 가량 도입함과 동시에, 용인시 인근에 대규모 파운드리 공장을 증설하기로 마음먹었다.
총합 1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비용이 필요했다.
물론 돈은 충분한 상태였다.
100조원이 넘는 가용현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사재를 투입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대영전자의 사내유보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
상암동 초고층 빌딩.
129층 부회장실로 대영전자의 김동재 사장을 호출했다.
면전에 나타난 그에게 파운드리 투자 계획서를 내밀었다.
내가 건넨 투자계획서를 매의 시선으로 살핀 김동재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파운드리보다는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집중하시는 게 어떨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파운드리는 툭 까놓고 말해서, 위탁생산업에 불과합니다. 마진이 별로 크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는 2020년에 대만 TMC의 시가총액이 대영전자를 추월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반면 나는 그런 사실을 두눈으로 생생히 목격했다.
TMC는 2020년 경에 전세계 반도체 설계 업체의 물량을 70%이상 확보한다.
그 덕분에 대영전자의 시총을 능가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에게 앞으로 닥쳐올 미래의 일단을 살짝 흘렸다.
"파운드리는 메모리 반도체를 능가할 정도의 엄청난 성장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파운드리 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단호한 어조로 그리 말하자 김동재가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부회장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대영전자의 사내유보금을 말씀해 보십시오."
그가 즉답했다.
"14조원 내외의 사내유보금을 비축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즉시 가용할 수 있는 현금 자산이 어느 정도죠?"
"8조원 안팎입니다."
내 예상보다 가용자금이 태부족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김동재에게 재차 물었다.
"이상하군요. 현금 자산이 왜 그렇게 적은거죠?"
"그룹 계열사에 10조원 가량의 사내유보금을 대출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현금성 자산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각 계열사에 대출해준 사내유보금을 전액 회수하세요."
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만기일이 도래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대출금을 회수하면 이성준 회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 회장의 반발이 그리 무섭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공연히 그룹에 분란이 일어날까 우려스럽습니다. 부회장님."
동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이성준을 나보다 높이 생각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를 내보낸 뒤, 대영그룹의 이성호 전략본부장에게 전화를 돌렸다.
***
그날 밤.
타팰 펜트하우스로 들어서자 재벌가 로열패밀리들이 친근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그들은 내가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포커 테이블로 일제히 몰려갔다.
잠시 뒤, 우리는 본격적으로 홀덤 포커에 빠져들었다.
각자 50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판돈으로 내건 탓인지, 녀석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오늘의 승자가 되고픈 열망이 그득했다.
하지만, 오늘의 승자는 바로 나였다.
들어오는 패마다 극강의 족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게임을 진행한지 2시간 만에 300억원에 육박하는 판돈을 내가 모두 싹쓸이했다.
게임이 끝난 뒤 녀석들에게 개평조로 각각 40억씩을 되돌려주었다.
그런 때문일까, 놈들의 입에서 나를 향한 찬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역시 우리 한빈이는 통이 엄청 크다니까!"
"정말 너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다! 헤헤..."
"한빈아. 내가 아주 끝내주는 여자애를 아는데, 이번 기회에 소개시켜줄까? 낄낄..."
"통크고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하고 돈도 산더미처럼 많은 김한빈을 위해 건배!"
녀석들의 진한 아부를 귓등으로 흘리며 나직한 어조를 내뱉었다.
"내가 이태강 중앙지검장을 스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들도 이태강과 기회를 봐서 친교를 나누세요."
그리 말하자 영진그룹의 명세현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이태강을 스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좌중의 시선이 내 입에 모아졌다.
그들에게 솔직히 말했다.
"저는 이태강을 차차기 대통령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짤막하게 대꾸하자 녀석들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일제히 올려다봤다.
명성그룹의 하성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태강이,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직후, 민성그룹의 노민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대통령을 키우려면 아무리 못해도 수천억 이상의 자금이 필요할텐데, 그 많은 돈을 이태강에게 투입할 계획이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미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황입니다. 그러니 형님들도 내 얼굴을 봐서 이태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세요."
효천그룹 민성훈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동생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20대 중반의 나이에 천문학적인 자산을 축적한 것도 대단한 일인데, 차차기 대통령까지 키울 생각을 하다니!"
그의 입에 발린 찬사가 끝나자마자, 부림그룹의 김준영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역시 우리 한빈이는 정말 거물 중의 거물이구나! 인정! 우하하하하...!"
준영의 입에서 호탕한 광소가 쏟아져 나오자, 좌중이 동시다발적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힘차게 곧추세웠다.
그들 모두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내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바로 강남의 고급 룸빵으로 자리를 옮겼다.
***
룸빵에서 질펀한 술판을 만끽한 뒤 아가씨들을 모두 룸 밖으로 내보냈다.
명세현과 김준영, 민성훈, 하성식, 노민우를 차례로 직시한 뒤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는 형님들이 각 그룹의 대권을 장악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저에게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 운을 떼자, 영진그룹의 명세현이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동생한테 부탁할 일이 있는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장내에 자리잡은 녀석들을 힐끗 쳐다봤다.
나와 단 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세현과 성훈, 준영, 민우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보내자, 녀석들이 아쉬워하는 얼굴로 룸 밖으로 차례로 사라졌다.
그들이 장내에서 사라지자마자 세현이 입을 열었다.
"동생도 알다시피, 나는 서자 출신이야. 그런 이유로 아버지는 본처 소생인 명세웅을 그룹의 차기 총수로 낙점한 상태지."
"명세웅의 나이가 몇이죠?"
"32살."
"형님은 몇살입니까?"
"36살."
"그럼 형님이 큰아들이라는 말인가요?"
"맞아. 그렇지만 서자출신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여지껏 변변한 보직을 맡아본 적이 없어. 반면 세웅이 자식은 벌써 그룹의 핵심인 미래전략 본부장직을 맡고 있지."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세현이 반색하는 얼굴로 답했다.
"아버지는 그룹의 신수종 사업으로 전기차 배터리를 선정했거든. 그래서 요즘 전기차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 그걸 동생이 도와주면 그룹에서 내 입지가 엄청나게 강화되겠지."
"대영자동차의 전기차 개발 사업에 동참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게."
영진그룹은 재계서열 10위권이었다.
그래서 내심 마음이 갔다.
영진 역시 태산처럼 내 수중에 넣을 찬스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녀석이 반색하는 얼굴로 빈잔에 고급 양주를 콸콸 따라부은 뒤, 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양주를 시원하게 원샷하자, 녀석이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후,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내 도움이 절실한 모양이었다.
***
대영그룹의 이성준 회장은 전기차 배터리와 바이오 제약을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첫출발부터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대영자동차 측이 그의 전기차 배터리 사업진출에 딴지를 걸고 나온 탓이다.
당연히 배후에는 김한빈이 있었다.
그 무렵, 이성호 미래전략본부장이 대영그룹 회장실에 나타났다.
성호의 입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영전자에서 빌려간 10조7천억을 한달 이내로 상환하라는 부회장님의 명령이 떨어졌어. 그러니까 반항하지말고 고분고분하게 처신하라고."
순간 성준이 분노한 얼굴로 유리 재떨이를 성호의 얼굴 쪽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허나, 그가 내던진 재떨이는 성호의 얼굴을 간발의 차로 빗겨나간 후 애꿎은 벽에 화풀이를 대신했다.
쨍그렁!
성호는 산산이 박살난 유리 재떨이를 힐끗 쳐다본 뒤 비릿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한달 안에 10조원을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바지 회장 노릇이 위험해 질거야. 그러니까 알아서 처신을 잘했어야지. 후후..."
그는 비릿한 조소를 끝으로 장내에서 재빨리 몸을 감췄다.
반면 성준은 미칠 듯한 분노로 온몸의 이성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손아래 이복동생의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에 속에서 천불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울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한빈의 야박한 얼굴이 심중에 짙게 드리워진 탓이다.
성준은 거의 20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미래신수종 사업에 투입할 예정이었다.
그 중에서 10조원 가량은 대영전자의 사내유보금으로 확보한 자금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영그룹의 사실상의 오너인 한빈에게 사전에 아무런 양해조차 구하지않았다.
성준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한빈이 실력행사를 해올 경우 상대할 방법이 전무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청와대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노우현 정부는 재벌그룹를 멀리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 일찍 이빨을 드러냈다.
한빈이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것이다.
***
상암 초고층 빌딩.
129층 부회실장에 이성호 대영그룹 본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면전에 시립했다.
이성호에게 물었다.
"이성준 회장이 신수종 사업을 펼친다는 명목으로 조성한 자금 총액이 어느 정도죠?"
그가 즉답했다.
"20조원 내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신수종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랍니까?"
"회장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룹과 상관없는 독립 법인 형식으로 신수종 사업을 출범하려는거 같습니다."
"20조원을 꿀꺽할 계획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부회장님."
성준은 선을 넘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성호를 매의 시선으로 주시했다.
그런 탓일까, 녀석이 기대만발한 얼굴로 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본부장님을 대영그룹의 회장으로 낙점하면, 저에게 무엇을 주실 겁니까?"
"부회장님이 원하시는 바를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저는 무늬만 그룹 회장을 원합니다. 이성준처럼 주제 모르고 날뛰는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흐으음..."
성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시 후, 그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원하는 연봉을 약속해 주시면, 말씀대로 쥐죽은 듯이 회장직을 수행하겠습니다."
성호는 개인 자산이 백억대 수준이었다.
그런 탓인지 연봉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부장님이 원하시는 연봉을 먼저 말씀해 보십시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최소 연간 500억대 이상의 연봉을 지급해 주십시오."
"500억이라...?"
"그리고 회장직을 최소 10년 이상 보장하는 계약서를 작성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마디로 5천억을 보장해 달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성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10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할 경우, 보너스 조로 3천억을 일시불로 지불해 주십시오. 일종의 퇴직금으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녀석은 돈독이 잔뜩 올랐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고액 연봉만 약속하면, 쥐죽은 듯이 그룹의 회장직을 수행하겠다고 확언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