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조질 놈은 조지고, 키울 놈은 키운다
가평 CC 골프장.
이태강과 라운딩을 즐기는 한편,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영진그룹의 명세웅 미래전력본부장에 대해서 내사를 해보세요."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야?"
"모두 형님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놈을 탈탈 털어보세요."
그가 호기심이 그득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자초지종이 뭔지, 그것부터 먼저 말해봐?"
"내가 재벌가 로열패밀리들과 돈독한 친분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태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말을 재촉했다.
"우리 멤버 중에 명세현이 있는데, 그 친구가 후계자 경쟁에서 밀리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나름 도움을 주고 싶어서 형님에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그가 눈을 빛내며 은근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놈을 도와주면, 형님에게도 큰 득이 될겁니다. 정치자금을 조달하기가 쉬워지는거죠."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조만간 우리 모임 멤버들을 형님에게 소개시켜 드릴테니까, 그들과 안면을 익혀두세요."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우하하하...!"
태강은 재벌가 후계자들을 소개받을 생각에 마냥 들뜬 모양새였다.
보기보다 단순한 구석이 많은 작자였다.
***
이태강은 중앙지검에 출근하자마자 금융조세부의 박혁기 부장 검사를 면전에 불러들였다.
태강의 입에서 은근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영진그룹의 명세웅 미래전략본부장의 비자금 계좌와 조세탈루, 횡령 혐의 등을 조사해봐."
박혁기 검사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렸다.
"원하시는대로 엄중한 내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외부에 알려져봤자 좋을 일이 없으니까, 보안에 특히 신경을 쓰라고."
"예. 지검장님."
태강은 박혁기를 내보낸 뒤, 취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취조실에 들어서자마자 녹화 버튼을 오프시켰다.
그 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정석에게 짤막한 언사를 내뱉었다.
"앞으로 당신은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게 될 겁니다."
그러자 정석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삽시간에 번져갔다.
태강은 그 모습을 유심히 살핀 뒤 취조실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
중앙지검 금융조세부.
박혁기 검사는 금감원과 국세청에서 넘겨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명세웅의 비밀계좌를 추척하는데 전심전력했다.
그 결과, 명세웅이 조세회피처에서 설립한 태양 어패럴의 존재를 파악하는 성과를 올렸다.
태양 어패럴은 해외의 유명 브랜드를 국내에 수입하는 업체였다.
그 과정에서 거액의 자금이 해외로 밀반출되는 의심스런 정황이 다수 포착됐다.
박혁기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명세웅이 태양 어패럴을 이용해, 해외 비밀 계좌에 비자금을 축적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박혁기는 그날 곧바로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대상은 태양 어패럴의 물류 창고였다.
***
일산 교외에 위치한 태양 어패럴의 물류 창고에 중앙지검 금융조세부 소속 검사들과 수사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물류 창고 안에 비치된 각종 수입 명품 등을 전부 수거해갔다.
면밀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비슷한 시각.
영진그룹 본사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자금 조성의 중간 매개체 역할을 태영 어패럴의 물류 창고가 검찰에 압수수색을 당한 까닭이다.
회장실에 명세웅 본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부친인 명수철 회장에게 자초지종을 솔직하게 밝혔다.
"태양 어패럴이 수입한 물품을, 차명으로 설립한 업체를 이용해서 높은 가격에 매입했습니다."
"중간 빽마진을 비자금으로 조성한게냐?"
"네. 아버지. 면목 없습니다."
명 회장이 심각한 얼굴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일산 물류창고에 있는 게, 정말 수입 명품이 맞느냐?"
명세웅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이름없는 해외 저가 브랜드를 명품으로 위장..."
명 회장은 뒷골이 격렬하게 땡겨왔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는 검찰의 핵심인 서울중앙지검이었다.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로 마음을 정했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당분간 해외로 나가있어."
그러자 명세웅이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하하..."
"에휴... 못난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명세웅은 본처 소생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런 탓으로 명 회장은 그를 보호해 주기로 결심했다.
세웅은 영진그룹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명 회장은 세웅을 내보낸 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들었다.
수첩 안에는 검찰 인맥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는 수첩에서 발견한 검찰총장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검찰조직의 수장인 그와 담판을 지을 계획이었다.
***
판교에는 영진그룹의 귀빈을 주로 접대하는 고급 저택이 있었다.
그 곳에 명 회장과 검찰 총장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술자리를 즐기며 밤 늦도록 밀담을 이어갔다.
다음날.
대검찰청에 이태강이 나타났다.
그는 검찰총장과 곧바로 면담을 가졌다.
검총의 입에서 단호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이종성 전 대법관 문제도 있으니까, 쓸데없이 영진그룹까지 건드리지마라."
"죄송하지만 그건 중앙지검에서 판단할 일입니다."
"끝까지 내 명령을 거부할 생각인가?"
이태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검총이 냉랭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영진그룹의 명 회장을 함부로 건드리면, 검찰 식구들까지 다칠 우려가 있어. 그러니까 내 말대로 사건을 덮으라고."
"총장님 말씀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태강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그날 밤.
이태강이 자택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고급 세단 차량이 그의 옆에 미끄러지듯 정차했다.
차 문이 열리며 명 회장의 노회한 얼굴이 드러났다.
"지검장님과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태강이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런식으로 만남을 제안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많이 불쾌하군요."
"저도 이런 식의 만남을 꺼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지검장님이 제 전화를 거부하시는 통에, 이런 방법으로 지검장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명 회장은 그리 말하며 차 뒷문을 부드럽게 열었다.
태강은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 뒤,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요 앞에 공원이 있으니까 그 곳에서 대화를 나누시죠."
그리 말하며 공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직후 명 회장을 태운 세단 차량이 태강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
***
태강과 명회장은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명 회장이 애달픈 얼굴로 읍소했다.
"아들놈의 사건을 덮어주시면 섭섭치않게 사례를 해드리겠습니다."
허나, 태강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채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명 회장은 그의 냉랭한 태도에 속에서 천불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런 탓일까, 그는 자신이 준비해온 비장의 한수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제 요구를 거부하시면, 영진그룹에서 돈을 받아먹은 고위급 검사들의 명단을 언론에 공개하겠습니다."
드디어 태강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그런 헛짓거리를 하실 경우, 회장님을 수조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행위와 횡령 배임,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조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좋으십니까?"
"끄응..."
명 회장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검찰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를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명세웅 본부장을 보호할 생각은 애당초 버리십시오. 이미 모든 증거가 명확하니까."
태강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11월의 어느날.
한남동 상지원으로 이태강과 재벌가 로열패밀리를 불러들였다.
재벌 후계자들과 태강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술자리를 함께하며 돈독한 친목을 도모했다.
그날 새벽.
재벌가 패밀리들을 돌려보낸 뒤, 상지원의 고즈넉한 정원을 거닐며 나를 뒤따르는 태강에게 넌지시 물었다.
"명세웅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그가 즉답했다.
"비자금 조성과 횡령 배임, 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해야지."
"몇년형을 구형할 계획이죠?"
"아무리 못해도 최하 7년형 이상을 구형할 생각이다."
"명 회장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영감이 날고 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후후..."
그의 입에서 비릿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일이 잘 처리되면, 명세현이 형님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드릴 겁니다."
"최소 백억이상을 준비하라고 전해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지원의 본관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상암동 초고층 빌딩.
130층 펜트하우스에 헬스 3대 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TV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 중앙지검은 영장전담 판사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자진출석한 이정석 전 헌법재판관을 불구속 수사하기로 결론내렸습니다.
-대신 중앙지검 특수부는 이정석의 부친인 이종성 전 대법관을 소환조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태강은 피라미에 불과한 이정석을 방생하는 대신, 대어급인 이종성을 사냥할 계획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뚜렷하게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시민들은 이종성 전 대법관이 사법농단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신문과 TV에서 날마다 그의 이름이 언급된 탓이다.
초등학생도 알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정석을 구속수사한다면, 꼬리자르기에 불과하다는 여론이 형성될 여지가 높았다.
'부자 동시 구속 불가'라는 사법부의 관행 때문이었다.
뉴스는 계속 이어졌다.
-중앙지검은 영진그룹 명세웅 미래전략본부장의 비자금 조성과 조세 탈루, 횡령 혐의에 대해서 전방위적인 내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중략...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중앙지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탓일까,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
운동을 끝마친 후 129층 부회장실로 내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선 뒤 박은영 비서팀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섹시한 정장룩 차림의 은영이 내 앞에 나타났다.
언제봐도 그녀는 내 스타일이었다.
은영에게 나직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1주일 동안 뉴욕으로 출장을 떠날 예정이니까, 당분간 모든 스케쥴을 오프하세요."
그녀가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저도 가야 하나요?"
솔직히 그녀는 이번 출장에 필요없었다.
하지만 은영은 해외 출장에 따라오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뉴욕 출장에 따라오고 싶으세요?"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신하게 끄덕였다.
결국 은영의 애틋한 간청을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오전 9시까지 여권 챙겨서 인천국제공항 전용기 계류장으로 오십시오."
그녀가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은영은 아찔한 뒷태와 우아한 발걸음을 동시에 과시하며 사무실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녀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뉴욕의 스탠리 회장과 태산그룹의 진대현 본부장에게 차례로 전화를 돌렸다.
***
1시간 후.
진대현 태산그룹 본부장이 부회장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부회장님."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켄싱턴 필드의 분양은 계획대로 되가고 있는 겁니까?"
그리 묻자, 대현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평당 2억원에 육박하는 엉청난 분양기 탓인지, 생각만큼 분양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평당 2억 이하로는 분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부회장님의 뜻은 잘 알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에서는 평당 2억대에 분양받을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건 진본의 생각이 짧은 탓입니다. 그러니 내 말대로 평당 2억대에 켄싱턴 필드를 분양하세요."
"흐으음..."
그의 입에서 침중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시 뒤, 진본이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영백화점의 V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켄싱턴 필드의 홍보행사를 열고 싶습니다."
대영백화점의 VVIP 고객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자들이었다.
진대현은 바로 그 점에 착안한 모양새였다.
"대영백회점 쪽에 내가 직접 협조를 요청할테니까, 기다려 보세요."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를 내보낸 뒤 대영그룹의 이성호 본부장에게 전화를 돌렸다.
***
그날 밤.
상암동 인근의 고즈넉한 난지천 공원을 여유로이 산책할 즈음, 등 뒤에서 박영록 경호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영백화점의 차명수 사장이 도착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몇분 뒤 장년의 남자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인 뒤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영백화점을 맡고 있는 차명수라고 합니다. 부회장님."
차명수는 나에 대해 잘 아는 눈치였다.
그런 탓일까, 두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내 앞에 시립했다.
그에게 나직한 어조를 내뱉었다.
"대영백화점의 V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상암동 초고층 빌딩에 조성될 예정인 명품 주거지를 홍보하고 싶습니다."
차명수가 공손히 복명했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명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지시를 수용했다.
이성호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은 눈치였다.
"태산그룹의 진대현 본부장을 보낼테니까 그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되면, 당신을 중용할테니 알아서 잘 하십시오."
그러자 명수가 감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화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회장님."
마음에 드는 작자였다.
알아서 기는 자세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
인천국제공항 전용기 계류장에 들어서자 장동현 법무실장과 박은영 비서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내 시선은 화사한 정장룩 차림의 은영에게 절로 모아졌다.
그녀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장변과 은영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넨 뒤 전용기 안으로 나란히 들어섰다.
잠시 후, 우리 일행을 태운 전용기가 인천국제공항 활주로를 힘차게 이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