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내 마음대로 미래를 설계하다
이성호의 이복동생인 이성철을 대영그룹 미래전략 본부장으로 낙점했다.
이이제이 전법의 일종이었다.
성호가 감히 딴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늦은밤.
한남동 상지원에 들어서자 이성철이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나를 향해 허리를 절반으로 접었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눈치였다.
우리는 상지원의 잘 조성된 정원을 거닐며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에게 물었다.
"대영그룹의 법인세가 작년보다 많이 나왔다면서요?"
성철이 즉답했다.
"네. 작년보다 7,600억이 추가로 부과됐습니다."
"법인세율 인상 때문인가요?"
"그렇다고 보여집니다."
그가 은근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부회장님이 허락하신다면, 국세청에 과도하게 청구된 법인세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마십시오."
나는 법인세를 회피할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성철이 씁쓸한 얼굴로 넌지시 물었다.
"법인세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당신은 그것보다는 이성호 회장을 감시하는데 주력하세요."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자 녀석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복명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
효천그룹 민우성 회장의 막내딸인 민예린은 그룹의 화장품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런 민예린에게 발등의 불의 떨어졌다.
그녀가 운영하는 랑컴 화장품에 거액의 법인세가 부과된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랑컴 화장품은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동남아, 미국, 유럽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록한 덕분에, 수천억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녀는 국세청이 부과한 법인세에 대해서 당최 승복할 수 없었다.
예상치를 훨씬 상회하는 감당 못할 수준의 법인세였기 때문이다.
그 즈음, 민예린은 친오빠인 민성훈을 통해 김한빈의 존재를 알게됐다.
그녀는 성훈에게 한빈을 만나고 싶다는 전언을 넣었다.
그토록 잘난 남자의 실물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명성그룹 본사 회장실.
하정수 회장은 면전에 나란히 서 있는 오기태 비서실장과 장남 하성식 기획조정실장을 차례로 주시한 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법인세가 작년보다 무려 3천억이나 더 부과된 이유가 뭐지?"
그의 물음에 오기태가 즉답했다.
"법인세율 인상 때문인 것으로 사료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많이 나온거 아닌가?"
"다른 그룹도 우리와 별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인세를 절감할 방안을 보고해봐."
오기태가 재차 입을 열었다.
"현정부의 핵심 실세들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하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몇명이나 영입할 생각이지?"
"아무리 못해도 5명 이상은 영입해야 모양이 살 겁니다."
"연봉은?"
"두당 30억 이상은 지급해야 하지 않을 까요?"
그러자 하정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매년 150억에 달하는 피같은 돈을 그놈들한테 갖다바치라는 말인가?"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시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그때, 침묵으로 일관 중이던 하성식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갑자기 울려퍼졌다.
"막강한 실력자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그 친구와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하정수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정말 그런 거물이 있단 말이냐?"
"검찰과 언론, 월가의 거물들을 수족처럼 움직이는 인물입니다."
"너는 그런 친구를 어떻게 아는 게냐?"
"어쩌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죠. 하하하..."
하성식의 입에서 자부심 그득한 웃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
상암동 초고층 빌딩.
129층 부회장실에 효천그룹의 민성훈 민예린 남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시선은 민예린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랑컴 화장품의 CEO에 걸맞는 세련된 패션 센스와 백옥같은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재벌가 최고의 미녀라는 소문이 과언이 아니었다.
성훈이 그녀를 소개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예린이 먼저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앞으로 한빈씨와 친하게 지내도 될까요?"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맞잡으며 능청스럽게 화답했다.
"예린씨같은 미녀를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녀가 싫지않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직후 성훈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여동생의 눈총을 받은 탓인지, 녀석이 어색한 얼굴로 나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그 말을 끝으로 내 사무실에서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예린이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치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빈씨가 어마어마한 실력자라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냥 뜬 소문에 불과하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희 랑컴 화장품에 부과된 법인세를 절감해 주시면, 섭섭치않게 사례를 해드릴께요."
그리 말하며 유혹하듯 나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법인세가 얼마나 나온 거죠?"
"2천억이요. 그래서 한빈씨에게 이렇게 도움을 청하는 거에요. 영업이익을 거의 모두 법인세로 납부하게 생겼거든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본능적인 욕구였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절세방안을 찾아보죠."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그녀가 기대만발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안되는 일은 때려죽어도 안되는 법이니까."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하여튼 일이 잘되면 한빈씨에게 합당한 사례를 할게요."
예린은 그리 말하며 매혹적인 눈웃음을 적나라하게 내비쳤다.
***
늦은밤.
타팰 펜트하우스에서 포커 게임을 즐길 무렵, 명성그룹의 하성식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할 말이 뭐죠?"
"여기에서 말하기는 좀 그래."
그리 말하며 포커 멤버들을 슬쩍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2층 서재로 오십시오."
"오케이. 고맙다. 한빈아."
잠시 후, 우리는 2층 서재에서 담소를 이어나갔다.
"우리 명성그룹에 1조원이 넘는 법인세가 부과됐거든."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녀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동생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지."
"저는 그럴 만한 힘이 없는데요."
"선수끼리 왜 그래."
"형님. 정말 저는 국세청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딱 부러지게 말하자, 성식이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정말 국세청에 아무런 연줄이 없는거야?"
"네."
짤막하게 대꾸한 뒤 1층 포커판으로 곧바로 내려갔다.
물론 녀석을 도와줄 수 있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법인세를 회피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민예린은 예외였다.
남자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였다.
내가 그랬다.
***
서초동 인근의 라운지바.
민예린을 도와주기 위해 이태강에게 자문을 구했다.
랑컴 화장품의 법인세 규모를 말해주자, 태강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화장품 회사에 정말 2천억대의 법인세를 부과했다는 말인가?"
"그 덕분에 랑컴은 영업이익 대다수를 법인세로 납부해야 하는 처지라고 하더군요."
"국세청에서 뭔가 착오를 한거 아닐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랑컴 측에서 여러차례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때마다 국세청은 정당한 법인세를 부과했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랑컴 화장품이 효천그룹의 계열사가 맞나?"
머리를 저으며 답했다.
"민예린 소유의 독립법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결론을 내렸다.
"정관계의 실력자가 랑컴 화장품을 길들이기 위해, 작업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겠군."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까요?"
태강이 즉답했다.
"일개 화장품 회사에 2천억대의 법인세를 부과한다는 건, 거의 말이 안되는 일이야."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분명 민예린을 노리는 제 3의 인물이 정관계 요직에 있는거야."
태강의 그럴 듯한 추론이었다.
효천은 20대 그룹에 간신히 걸쳐있는 상태였다.
그룹의 맨파워가 그리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때, 태강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민예린에게 흑심을 품은 정관계 핵심 인사를 파악하는게 급선무야."
"확신하십니까?"
"느낌이 그래. 국세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자는 몇 안되거든."
"그럼 형님이 한번 알아봐 주십시오."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조민구 국무총리는 자신의 큰아들을 효천그룹의 민예린에게 장가보내고 싶어했다.
재벌가 로열패밀리와 연을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천그룹의 민우성 회장은 조민구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했다.
조민구의 인간 됨됨이를 나름 잘 아는 탓이었다.
민구는 자신의 잇속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짓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다.
그는 외교관 출신 특유의 현란한 세치 혓바닥을 능수능란하게 과시하며,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마음껏 속였다. 그런 덕분에 국무총리에 발탁되는 행운을 누렸다.
당연히 민구는 이번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이유로 재벌가 최고의 재원으로 손꼽히는 민예린에게 잔뜩 눈독을 들였다.
허나, 그의 바람은 초장부터 대차게 틀어졌다.
민구의 추악한 본성을 잘아는 민우성 회장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국세청을 동원해서 민예린에게 경제적인 타격을 가하기로 작심했다.
간신모리배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
오후 무렵.
서초동 일식당에 이태강 중앙지검장과 서현일 국세청장이 나타났다.
이태강과 서현일은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었다.
그런 이유로 사석에서 속 깊은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자주 즐겼다.
태강이 작정하고 물었다.
"랑컴 화장품에 징벌적인 법인세를 부과한 이유가 뭐지?"
서현일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국무총리실에서 압력이 있었습니다."
"국무총리가 오더를 내린 건가?"
"네. 그런거 같습니다."
"조민구가 오더를 내린 이유를 알고 있나?"
현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효천그룹에 맞선을 제의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는 바람에, 총리님이 진노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맞선이라...?"
"예. 총리님의 큰아들과 효천그룹의 민예린이..."
현일은 말끝을 흐리며 태강의 눈치를 살폈다.
"조민구가 차명으로 보유한 자산을 파악했나?"
"조금 알고 있습니다."
"말해봐."
현일이 작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민구는 국내에 차명으로 200억대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해외 은행에는 천억대에 달하는 자금을 예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조성한 자금이지?"
"전부 뇌물 성격입니다."
"많이도 긁어모았구만."
"원래부터 조민구는 외교가에서 돈에 환장한 부패 인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죠."
"그런 쌩양아치가 국무총리직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군."
"어쩌겠습니까. 죄없는 국민들만 고통스러울 뿐이죠."
태강은 일식당을 벗어나자마자, 법조 출입기자들을 상암동 초고층 빌딩의 빈 사무실로 초대했다.
태강은 열명 남짓한 법조 출입기자들에게 A4 용지를 돌렸다.
A4 용지에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랑컴 화장품에 징벌적인 법인세를 부과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조민구 국무총리의 저열한 민낯이 생생히 드러나 있었다.
법조 출입기자들의 눈이 먹이를 발견한 맹수의 눈빛으로 삽시간에 돌변했다.
그 정도로 달콤한 먹잇감이었다.
***
상암 초고층 빌딩.
펜트하우스 전망대에서, 저 높이 떠 있는 푸른 하늘과 짙은 구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 마음대로 뜯어고치기 위해, 이태강을 18대 대통령으로 옹립할 생각이었다.
나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이, 실현 가능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