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수평적인 동반자 관계
진대현 본부장과 태산그룹 본사 빌딩에 들어설 찰나, 사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장내에 연속해서 울려퍼졌다.
-김한빈 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과장급 이상 간부사원들은 지금 당장 1층 로비에 집합하십시오!
-김한빈 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과장급 이상 간부사원들은 지금 당장 1층 로비에 집합하십시오!
흐뭇한 순간이었다.
사실 이 맛에 그룹의 총수 노릇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잠시 후, 과장급 이상 간부 사원들이 1층 로비에 연이어 나타났다.
거의 200명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허리를 절반으로 깍듯이 접었다.
간부사원들의 면면을 대충 훑은 뒤 부회장실과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54층 탑층에 도착하자 하동균 비서팀장 일행이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들을 지나쳐 부회장실로 들어갔다.
고풍스런 책상에 앉자마자 면전에 시립한 진대현이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가 올린 보고서는 수도권 신도시 개발 프로젝트였다.
경기도 남부 지역에 6만세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게 주요 골자였다.
보고서를 살핀 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총 사업비가 얼마나 필요하죠?"
진대현이 즉답했다.
"2조 7천억 안팎입니다. 그리고 토지매입도 순조로울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신도시 건설은 토지매입이 제일 중요했다.
토지매입에 들이는 돈과 시간을 절약할수록 이익이 커지기 때문이다.
"태산그룹의 사내유보금이 어느 정도죠?"
"대략 9천억 수준입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복안을 말씀해 주십시오."
"토지를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으세요. 그 대출금으로 아파트를 건설하는 거죠."
"사내유보금 투입을 불허하실 생각입니까?"
"당분간 회사 돈에는 손을 대지 맙시다. 아직 유동성 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니까."
진본이 공손한 태도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예. 부회장님."
그를 내보낸 뒤 비서진이 내온 커피로 목을 축이는 한편 흡연에 열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하동균 비서팀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박종태 감사실장이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들여보내세요."
"네. 부회장님."
잠시 뒤, 종태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긴급 현안을 보고했다.
"대영화장품의 이기영 사장이 여배우 김태란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에 긴급 체포됐습니다."
"그자가 여배우를 성추행한 혐의가 확실한 건가요?"
"거의 사실인거 같습니다."
"조사해 보셨나요."
그가 머리를 끄덕이며 길게 말을 이었다.
"대영화장품 홍보실 직원들을 대상으로 자체 감사를 진행한 결과, 이기영 사장이 화장품 광고를 미끼로 여자 연예인들과 부적절한 만남을 자주 해온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내맡긴 격이었다.
화장품 광고는 여자 연예인들의 로망이었다.
이기영은 바로 그 점을 악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괘씸한 작자였다.
"장동현 법무실장에게 이번 일에서 빠지라고 전하세요."
"이기영 사장에게 손을 떼실 작정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성철 본부장에게 지금 당장 이기영 사장을 보직 해임하라고 전하세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무사안일과 자기 보신주의에 매몰된 대영그룹 계열사 사장단들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다잡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밤 10시에, 한남동 상지원으로 계열사 사장단을 전원 호출하십시오."
종태가 넌지시 물었다.
"그들을 소집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그동안 대영그룹 계열사 사장님들은 너무 편하게 지냈어요. 그룹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거죠."
"설마... 폭행을 행사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냥 가벼운 얼차려 정도로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그리 말하며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
그날밤.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한남동 상지원의 지하 트레이닝룸에 들어서자, 70명에 달하는 대영그룹 계열사 사장님들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7열 종대로 늘어선 그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대영화장품의 이기영 사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경찰에 체포당했습니다. 창피하게도 광고를 미끼로 여배우를 성폭행한 정황이 다수 드러난 상황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대영그룹의 실질적인 오너 자격으로 여러분들의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개조하기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순간 좌중의 얼굴에 하나같이 겁먹은 표정이 짙게 드리워졌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러분들은 옆예 계신 분들과 어께동무를 한 상태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1시간 동안 반복하시면서, 이렇게 외쳐 주십시오. '나는 앞으로 절대 광고를 미끼로 여자 연예인에게 성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겠다!'라고."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장님들의 입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어깨동무 스쿼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70명에 달하는 중장년 남성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한편, 입으로는 '나는 앞으로 절대 광고를 미끼로 여자 연예인에게 성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겠다!'라고 외치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1시간 동안 이어진 정신 교육 덕분인지, 사장님들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몰골로 제자리에서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곧바로 김태구 경호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인간들의 몸통을 중심으로 훈계를 내리세요."
그러자 김팀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원래 저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양반들은 매가 약입니다. 그래야 말귀를 알아 먹습니다."
단호하게 말하자 태구가 결연한 얼굴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건장한 경호원들이 사장님들 곁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그들은 내가 지시한 내용을 한치의 오차 없이 철저히 수행했다.
"부회장님이 내리시는 사랑의 매질을 달게 받으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경호원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사장님들의 여린 몸뚱이에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으아악! 크아악! 끄악! 아악! 제발 그만! 으아아아악...!"
그들의 애절한 비명이 장내에 쉴 새 없이 울려퍼졌다.
***
상암동 초고층 빌딩.
130층 펜트하우스에 조성된 풀장에서 여유로이 수영을 즐길 무렵, 대영그룹의 사장님들이 면전에 나타났다.
모두 70명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극심한 공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그 정도로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바라는 모양새였다.
녀석들이 일사불란한 자세로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그들의 인사를 본체만체하며 풀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풀장 부근의 일광욕 베드에 여유로이 드러누운 채,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를 물로 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제 모르고 나에게 기어오르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그들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미친 듯이 끄덕거렸다.
"이 정도면 말귀를 알아먹었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김동재 사장님만 남고 모두 나가세요."
그리 명령하자 김동재를 제외한 사장님들이 펜트하우스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김동재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커피와 흡연을 즐기며 진솔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영전자의 주가 시황을 말씀해 보세요."
동재가 공손한 태도로 즉답했다.
"애플에서 천억달러 규모의 수주를 달성한 탓인지 오늘도 8%이상 주가가 올랐습니다."
"시총도 말해 보세요."
"오늘 날짜로 130조원을 돌파했습니다."
아직 갈길이 멀었다.
"용인 지역에 들어설 예정인 파운드리 생산 공장 증설에 전사적인 역량을 투입하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
용인 CC 골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조민구 국무총리가 국세청에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국세청 고위 관계자는 언론사 취재진에게, 랑컴 회장품에 징벌적인 법인세를 부과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장본인이 조민구 국무총리라고 밝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조 국무총리가 랑컴 화장품의 민예린 대표에게 사적인 악감정을 갖고 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국무총리실은 언론의 기사 내용을 확인 중에 있다며, 조만간 자세한 입장을 표명하겠다고 취재진에게 알려왔습니다. 중략...
조민구의 망나니 짓이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찰나, 사적으로 애용하는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폰을 귓가에 가져가자 민예린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
청담동 인근의 카페로 들어서자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들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그들은 민예린의 개인 경호원이었다.
녀석들은 내 신분을 확인한 뒤 카페 안으로 안내했다.
카페는 민예린이 사적인 용도로 만든 곳이었다.
그런 탓인지 내부에는 그녀와 나 단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달달한 칵테일을 음미하며 서로를 그윽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예린이 테이블 위에 고급 시계함을 올려놓았다.
시계함을 개봉하자 리처드밀의 고가 시계가 보였다.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가 7억원에 달하는 리처드밀의 RM 멕라렌이에요. 마음에 드시나요?"
시계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그렇지만 예린이 선물해 준 물건이라, 가식적인 답례를 내뱉었다.
"정말 갖고 싶었던 시계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예린씨."
그러자 그녀가 내 속마음을 다 아는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피이... 거짓말. 한빈씨처럼 돈 많은 남자에게 명품 시계는 관심 밖이겠죠. 그 마음 저도 잘 알아요."
내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그려졌다.
재벌가 출신이라 그런지, 우리는 나름 통하는 점이 많았다.
결국 그런 이유로, 그날 밤을 같이 보냈다.
기브앤 테이크였다.
***
이종성 전 대법관은 벼랑끝으로 내몰린 형국이었다.
언론에서 연일 영장전담 판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대법원을 신랄하게 비판한 탓이었다.
그런 때문이었을까, 대법원은 중부지법 영장 전담 판사진을 이종성과 별다른 친분이 전무한 지방 출신 법관들로 교체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종성은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 눈 앞이 캄캄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극도의 절망감에 휩싸인 채 이태강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허나, 그의 면담요청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결국 이종성은 자포자기 상태로 빠져들었다.
수요일 무렵.
이종성과 변호인, 중부지검 검사들이 중부지법 영장 전담 판사실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이종성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
태산그룹의 최종수 회장은 카이저 빌딩의 초라한 사무실에서 오늘도 시간 때우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연간 50억대의 고액 연봉을 지급받고 있었다.
그런 때문인지, 종수는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어차피 그는 작고한 최 회장의 별 볼 일 없는 서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종수는 유산상속도 제대로 못받은 탓에, 거의 알거지 신세로 내몰릴 위기였다.
바로 그때, 한빈이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태산그룹의 무늬만 회장직을 수행하는 대가로 수백억대의 금전적인 보상을 약속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종수는 그에게 항상 감사한 심경이었다.
허나,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유미향은 생각이 많이 다른 눈치였다.
하지만 종수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입가에 담배를 문 채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나를 찾아온거지?"
순간 유미향이 성난 암표범처럼 으르렁거렸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네놈은 위 아래도 없니? 집안의 어른을 이런 식으로 대하라고 니 애미가 가르치던?"
그녀의 격한 언성에도 불구하고, 종수의 입에사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줌마가 나를 찾은 이유가 뭡니까? 그것부터 말씀해 보시죠."
유미향이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내년 설 명절에 종연이가 특사로 풀려날 예정이니까, 그 전에 알아서 회장직에서 물러나!"
종수가 비릿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차피 태산은 김한빈의 수중에 있는 그룹이에요. 아줌씨가 설친다고 변하는 건 없다고요."
"그건 네놈이 신경쓸 일이 아니니까, 좋은 말로 할때 회장직에서 물러나라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암튼 이만 나가주시죠."
미향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본 뒤 찬바람을 풀풀 날리며 사무실에서 몸을 감췄다.
***
이태강은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사법적폐의 화신인 이종성 전 대법관과 부패한 재벌일가를 자기 손으로 직접 교도소에 집어넣은 탓이다.
그 덕분에 국민들은 검찰을 대표하는 정의로운 검사로 이태강을 첫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그런 때문일까, 정치권에서 이태강을 주목하는 눈길이 점점 강해졌다.
그 중에는 유력한 대권주자인 이영박도 포함되었다.
이영박은 이미 오래전에 이태강을 차기 정부의 검찰총장으로 낙점한 상태였다.
그 대가로, 한빈에게서 수천억대의 대선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는 당내 경선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박구내를 능가하는 막대한 경선자금을 현직 의원들에게 살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여전히 당내에서 막강한 세를 구축한 박구내를 집권 후에도 철저히 견제할 생각이었다.
그는 한빈의 스폰을 받는 태강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영박은 생사대적인 박구내를 용납할 수 없었다.
태생적으로 그들은 물과 불의 관계였다.
숙명이었다.
***
한강변을 거닐며 이태강에게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영박에게 비밀 법률 특보 자리를 요구하세요."
그가 우려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영박한테 너무 버릇없다고 찍히는거 아닐까?"
"그런 좀스러운 생각 따위를 제발 좀 버리세요."
"그렇지만, 이영박 입장에서는 내가 너무 들이대는 걸로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고."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영박과 수평적인 동반자 관계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제야 태강이 납득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