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미친놈은 매가 약이다
이성철 대영그룹 본부장을 상암동 초고층 빌딩 사무실로 호촐했다.
면전에 서 있는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룹 사장단들과 오찬 회동을 할 생각이니까 상지원에 자리를 만드세요."
"예. 부회장님."
"그리고 이성호의 근황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그가 즉답했다.
"대영그룹 본사 회장실에서 시간만 때우다 퇴근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계열사 사장들이 그자에게 개인적으로 보고를 올리는 경우는 없나요?"
"아직 그런 사람은 없는거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허파에 바람을 집어넣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추려서 보고서로 제출하세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성호는 그리 말하며 공손한 자세로 하직 인사를 올렸다.
사무실을 나서려는 그를 돌려세웠다.
"한가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유산으로 얼마나 상속받으신 겁니까?"
그러자 성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부동산과 현금 자산을 포함해서 대략 200억원 내외의 유산을 상속받았습니다."
"대영물산의 지분 12%도 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현금화 하기가 쉽지 않은 탓에..."
녀석이 말끝을 흐리며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원하신다면 대영물산의 지분을 제가 인수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결심이 서시면 주저말고 연락을 주십시오."
"생각해 보겠습니다."
***
점심 무렵.
상지원의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70명에 달하는 사장단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들에게 목례로 화답한 뒤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묵직한 목소리로 내 소신을 밝혔다.
"우리 대영그룹이 무궁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마누라를 포함한 모든 것을 바꿀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리 발언하자, 사장님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재차 말했다.
"우리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대영그룹을 전 세계 최고 그룹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니 사장님들 역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 일장훈시는 계속 이어졌다.
"제 나이는 비록 26살에 지나지 않지만, 저는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단 6년만에 경이적인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밝히기는 뭐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부자가 저라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순간 장내에 배석한 사장들이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그들은 진정으로 나에게 감복한 눈치였다.
그래서 재차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저는 어려운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삼시세끼를 밥과 김치만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장님들도 내가 매일 먹는 밥과 김치로 점심 식사를 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내 옆에 서 있는 박은영 팀장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잠시 후, 장내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쌀밥과 겉저리 김치, 보리물 등이 차례로 반입됐다.
하지만 사장님들 대다수는 입맛이 없는 탓인지, 밥과 김치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들에게 준엄한 어조로 말했다.
"밥을 한톨이라도 남기시는 사장님이 있을 경우, 연봉에서 삭감조치 하겠습니다. 밥 한톨당 1억이니까 명심하십시오."
순간 좌중의 얼굴에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런 탓일까, 그들은 밥맛이 없어도 무조건 밥을 비워야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으로 내몰렸다.
결국 그들은 연봉삭감 조치를 회피하기 위해 젖먹던 힘을 다해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는데 전심전력했다. 참으로 보기좋은 광경이었다.
오찬 회동이 끝나갈 무렵, 옆자리에 앉아 있던 대영중공업의 정민수 사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에게 긴히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십시오."
그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희 대영중공업은 중화학 플렌트 건설을 주력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그래서요?"
"아시다시피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은 민간 기업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정부에서 원자력 시설을 관리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원자력 발전소는 큰 돈이 되는 사업입니다. 원자력 발전소 한개당 연간 수천억대의 운영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희는 정부 측에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수년전부터 요구하는 중입니다."
정민수의 말을 묵묵히 경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의 민간 운영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에 전기생산 시설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그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며칠 후면, 2007년 신년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해죠. 대기업 친화적인 야당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질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차기 정부에서는 원자력 발전소의 운영권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어조로 답했다.
"좀 더 대화를 나눠봅시다."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장님들과 일일이 악수를 교환한 뒤 정민수를 데리고 2층에 위치한 접견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면전에 서 있는 정민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원자력 발전소의 수익 구조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즉답했다.
"원자력 빌전소의 수익은 전기판매에서 나옵니다. 생산된 전기를 한전에 제값을 받고 판매하면 그만이죠."
"원자력 발전소의 설립비용을 말해 보십시오."
"원자력 발전소는 태양광 발전소, 화력발전소, 수력발전소에 비해 건설비용이 매우 저렴합니다. 그런 이유로 수도권 전체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 비용은 2조원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대로, 생각 외로 저렴한 비용이었다.
"반면 원전의 수익은 연간 2천억대를 상회하는 수준입니다."
"10년 안에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괜찮은 사업 아이템 같았다.
석유 한방울 나오지 않는 한국은 원자력 발전이 살길이었다.
태양광이나 화력, 수력 발전은 한계가 명확했다.
효율성 측면에서 원전에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사장님의 고견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가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정민수를 내보낸 뒤 상지원의 울창한 수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상지원은 4천평에 달하는 부지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와 잘 손질된 수목이 참으로 압권이었다.
조경에 돈과 시간을 많이 들인 탓이었다.
상지원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장소였다.
상암 초고층 빌딩 펜트하우스가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장소라면, 이 곳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휴식 공간이었다.
그런 때문일까, 이 곳을 제 2의 거처로 삼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대영그룹의 모든 자산은 내 개인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굳힌 뒤 이성철 본부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눈 앞에 나타난 성철에게 물었다.
"상지원의 관리주체가 어디죠?"
그가 공손히 즉답했다.
"그룹 총무실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상지원을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생각이니까, 총무실에 언질을 넣으세요."
"외빈 접대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호텔을 잡으면 그만 아닙니까? 한국 기업은 쓸데없이 외국인들한테 너무 친절해요. 그거 개선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일겠습니다."
"클라이언트고 나발이고, 내 알 바 없으니까 앞으로 쓸데없이 외빈을 접대할 생각 자체를 하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성호는 그리 복명한 뒤 재차 입을 열었다.
"긴히 보고할 사안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대영전자의 지분을 조직적으로 매집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여러개의 외국계 투자사가 5% 미만의 지분을 매집완료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총지분이 어느 정도죠?"
"모두 합할 경우 14%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국민연기금과 비슷한 규모였다.
대영물산은 26%에 달하는 대영전자 지분을 보유 중이었다.
그리고 대영자동차와 대영생명, 대영증권은 대영전자의 지분을 12% 안팎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지분 규모는 38% 정도였다.
더불어 14% 내외의 지분을 갖고 있는 국민연기금을 우군으로 확보한 상태였다.
대영전자의 경영권 방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외국계 자본의 정체를 파악할 필요성이 있었다.
"내일 아침에 대영증권 김현조 사장을 상지원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
다음날.
상암동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옆에 동승한 대영증권 김현조 사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영전자의 지분을 매집하는 외국계 자본을 파악하셨습니까?"
그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파악 못한 이유가 뭐죠?"
"겉으로는 미국 자본인척 위장하고 있지만, 뒤에 다른 자본이 있는거 같습니다."
"심증이 가는대로 말씀해 보십시오."
그제야 김현조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답변이 흘러나왔다.
"주식을 매집한 창구들 대다수가 중국계 자본이 자주 이용하는 창구로 밝혀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월가에 적을 둔 자본으로 행사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중국계 자본이 유력한거 같습니다."
중국자본은 오래전부터 대영전자의 반도체 기술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 탓으로 김현조의 추측에 무게를 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중국 자본일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
상암동 초고층 빌딩의 이름을 상암 켄싱턴 빌딩으로 명명했다.
31층부터 80층까지 조성한 켄싱턴 필드의 브랜드명을 빌딩명으로 차용한 셈이었다.
그런 탓일까, 요즘 들어 부쩍 평당 1억원을 호가하는 켄싱턴 필드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었다.
김현모 역시 그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거대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였다.
당연히 고액 연봉을 자랑했다.
켄싱턴 필드에 입주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주 초기부터 각종 문제를 야기했다.
켄싱턴 필드의 관리센터에서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에 툭하면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오늘도 그는 관리인을 상대로 말썽을 피우고 있었다.
결국 내 귀에도 그런 소식이 전해졌다.
사무실에서 중화요리로 늦은 점심을 해결할 무렵, 켄싱턴 필드의 총책임자인 진대현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켄싱턴 필드의 입주자인 김현모씨가 주차공간이 협소하다며, 주차 관리원에게 폭행과 폭언을 행사했습니다."
"주차 관리원이 많이 다쳤나요?"
"코뼈가 주저않고, 치아도 많이 상한거 같습니다. 그리고 눈두덩이 주변의 안와도 골절된 상태라고 하더군요."
"중상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주차 관리원이 김현모를 고소하는걸 막으세요. 어차피 고소해봤자 쌍방폭행으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으니까."
"김현모를 그냥 두고보실 생각입니까?"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죠?"
"자기 집에 있습니다."
"켄싱턴 필드에 있는 건가요?"
"네. 부회장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 진본은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를 내보낸 뒤 박은영 비서팀장에게 콜을 넣었다.
"켄싱턴 필드의 입주자인 김현모씨를 사무실로 데리고 오세요."
"네. 부회장님."
10분 뒤.
말끔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바로 관리인을 대상으로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문제의 김현모였다.
그에게 악수를 청하자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켄싱턴 필드의 관리자들이 서비스 정신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부회장님이 책임지고 서비스를 개선시켜 주십시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만약 내가 요구하는 서비스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입주자를 대표해서 언론에 이같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겠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주차관리원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상탭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퉁명스레 대꾸했다.
"저도 주차 관리원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병원에서 이미 진단서를 발급받은 상태죠."
그리 말하며 준비해온 진단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당최 말이 안통하는 인물이었다.
역시 이럴 때는 매가 약이었다.
책상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뒤 소파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 후, 김현모에게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변호사님은 아무리봐도 매가 약인거 같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녀석의 희여멀건한 면상에 강력한 맨주먹을 폭풍처럼 박아넣었다.
퍼억!
"크악!"
사무실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녀석의 얼굴을 목표로 무자비한 사커킥을 쉴 새 없이 작렬시켰다.
퍽퍽퍽퍽퍽퍽퍽!
"으아아아아아아악...!"
놈의 입에서 고통에 절은 비명이 길게 새어나왔다.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진 김현모를 뒤로한 채 김태구 경호팀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사무실에 나타난 김태구에게 지시를 내렸다.
"대영병원 VIP 병동으로 저 사람을 이송하세요."
"예. 부회장님."
"그리고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 못하도록 병실을 지키세요."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