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무자비한 응징
인천국제공항에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의 메이링이 나타났다.
그녀는 짙은 선글라스를 얼굴에 착용한 상태였다.
메이링은 출국 심사대에 여권을 제출한 뒤 주변을 매의 시선으로 살폈다.
그 후, 북경행 항공기에 여유로이 몸을 실었다.
같은 시각.
국정원 대테러 방첩 센터에는 팽팽한 긴잠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인천국제공항에 나타난 메이링을 고화질 CCTV로 감시하는 한편, 현장 요원들과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때, 국정원 제 1차장인 조웅래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 허망한 표정이 그려졌다.
동시에 힘빠진 목소리가 조웅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현장 요원은 지금 즉시 인천공항에서 철수한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장내를 휘 둘러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상부의 지시라,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쓸데없이 질문하지마라."
조웅래의 말이 떨어지자 대테러 감시센터 요원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허탈한 표정이 짙게 드리워졌다.
***
상암동 켄싱턴 빌딩.
129층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수경 경리팀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그녀는 내 사적인 돈심부름을 전담하고 있었다.
눈 앞에 나타난 수경에게 지시를 내렸다.
"시티은행에서 5만원권 현찰로 60억원을 찾아오세요. 경호팀 요원들과 같이 가십시오."
"예. 부회장님."
수경은 조신하게 복명한 뒤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한국에서 암약 중인 중국 간첩을 내 손으로 직접 응징할 생각이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왕이었다.
중국 주석 할애비가 온다해도 이 구역의 왕은 나였다.
그런 나에게 야비한 도발을 감행한 중국놈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곧바로 박종태를 면전에 불러들였다.
사무실에 나타난 종태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격수 출신의 경호원들에게 사냥용 라이플을 지급하세요."
그가 긴장한 얼굴로 나를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내가 지목한 놈을 라이플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중범죄자라 죽여도 무방합니다. 당연히 놈을 처리하시면 두둑한 보너스를 약속하겠습니다."
종태가 넌지시 물었다.
"목표물의 신상을 알려주십시오."
그에게 나름 솔직히 답했다.
"한국에서 암약중인 중국의 산업스파이에요. 때려죽여도 상관없는 놈이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제야 종태가 다소 안심한 얼굴로 복명했다.
"예. 부회장님."
***
그날 밤.
한남동 상지원으로 이재천 국정원장을 초대했다.
우리는 정갈한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끝마친 뒤 본격적인 담소를 이어나갔다.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메이링의 근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재천이 냉정한 어조로 즉답했다.
"오늘 낮 비행기로 한국을 떠났습니다."
"중국으로 돌아간 겁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한모금을 입안에 들이켰다.
이재천에게 재차 물었다.
"나에게 접근하라고 사주한 자가 누구죠?"
"메이링의 윗선을 알려달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국정원장님."
"죄송하지만, 국가 1급 기밀인 탓에 민간인 신분인 부회장님에게 알려드릴 수 없는 사안입니다."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테이블 위에 5만원권 돈다발이 가득 들어찬 큼지막한 가죽 가방 2개를 올려놓았다.
"현찰로 40억입니다. 메이링의 윗선을 알려주시면 저 돈을 원장님에게 지금 즉시 드리겠습니다."
이재천의 눈동자가 태풍에 휘말린 듯 거세게 출렁였다.
돈 앞에 장사없다는 격언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정말 이 많은 돈을 저에게 주실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돈 가방을 그의 양손에 건네줬다.
당연히 이재천은 내 돈을 거부하지 않았다.
***
다음날.
오늘도 회사 출근을 뒤로 미룬 채 상지원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이재천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는 오후 3시경 상지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재천의 손에는 내가 원하는 정보가 가득 담긴 노란 봉투가 들려있었다.
봉투 속에는 중년 남자의 사진과 신상명세, 거처, 자주 가는 장소 등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이재천이 우려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리적인 충돌은 가급적 피해주십시오. 한중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사답게 대화로 해결할 생각입니다."
그리 말하며 상지원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일산 자유로를 쾌속하게 질주하는 차 안에서 옆에 동승한 박종태에게 지시를 내렸다.
"중국 국가안전부의 서울 지부장인 황장청을 납치하세요."
그가 경악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산업스파이가 아니라, 중국 첩보기관의 요원을 처리하라는 말씀입니까?"
종태의 말은 계속됐다.
"안될 말씀입니다. 중국 첩보기관 인사를 함부로 납치했다간, 국가간의 문제로 비화될 여지가 높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재차 지시를 내렸다.
"그 문제는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종태씨는 내가 명령한대로 임무를 수행하십시오."
"정말 꼭 이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네. 그래야 화가 풀릴거 같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뜸을 들이지 마십시오."
그가 체념한 얼굴로 답했다.
"정 그러시다면, 부회장님의 뜻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특별 보너스를 드릴테니까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종태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
박종태는 저격수 출신의 경호원 서너명을 대동한 채 강남의 고급주택으로 향했다.
새벽1시경.
종태 일행은 남양주 쪽으로 이동하는 황장청의 고급 세단을 은밀히 미행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미행을 눈치챈 황장청의 세단 차량이 횡단보도 앞에서 갑자기 유턴을 감행했다.
바로 그때, 콩을 볶는 듯한 굉음이 장내에 연거푸 울려퍼졌다.
탕탕탕탕!
황장청의 차 바퀴가 터져나감과 동시에, 3미터 높이로 떠올랐다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쿵쾅!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종태 일행은 전복된 차 안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된 황장청의 신병을 신속하게 확보한 뒤, 인천 항만으로 차를 몰아갔다.
종태는 인천 항만의 콘테이너 창고 속으로 황장청을 밀어넣은 뒤, 한빈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
인천 항만에 도착하자 종태가 나를 반겼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컨테이너에는 중국 국가안전부의 서울 지부장인 황장청이 있었다.
녀석은 차량이 전복된 후유증 탓인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런 때문인지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종태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신에 타박상이 심각합니다. 병원으로 이송을 안하면 수시간 내에 사망할 확률이 높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죽을 인간이니까 더 이상 신경쓰지 마십시오. 종태씨는 드럼통에 시멘트나 반죽하세요."
그리 말하며 커다란 돈가방을 종태에게 건넸다.
"20억이 현찰로 들어있습니다. 수고비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받으세요."
종태가 결심한 얼굴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별말씀을. 하여튼 이 곳은 나에게 맡기시고 어여 나가서 일이나 보세요."
"네."
종태가 컨테이너에서 사라지자마자 황장청의 얼굴에 사커킥을 작렬시켰다.
퍼억!
-크헉!
놈은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도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재차 사커킥을 놈의 면상에 연거푸 꽂아넣었다.
미칠 정도로 잔인하게!
퍽퍽퍽퍽퍽!
-크아아아악!
녀석은 애절한 비명을 토해냄과 동시에 두눈을 번쩍 떴다.
드디어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준비해온 대검을 놈의 손등에 무참하게 박아넣었다.
푸욱!
-으아아아아악!
녀석의 입에서 애틋한 절규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손등에서 선홍빛 핏물이 확 하고 솟구쳤다.
황장청에게 유창한 영어를 내뱉었다.
"메이링의 진짜 이름과 사는 곳을 말해. 그 두가지만 알려주면 당신을 고통없이 죽여줄게. 그렇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리면, 바로 지금처럼 시퍼런 대검을 당신 몸뚱이에 박아주지."
그 말과 동시에 손등에 박힌 대검을 재빨리 회수했다.
직후 반대편 손등에 대검을 다시 박아넣었다.
푸욱!
-아아아아악!
황장청이 온몸을 벌벌 떨며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특수작전요원 치고는 엄살이 너무 심했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놈에게 재차 영어로 말했다.
"지금 당장 메이링의 진짜 이름과 사는 곳, 연락처를 말해."
장청은 내 명령에 고분고분 순응했다.
날리 시퍼런 대검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모든 정보를 취득하자마자 멋드러진 대검을 놈의 모가지에 벼락처럼 꽂아넣었다.
푸욱!
진한 핏물이 내 얼굴에 튀었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녀석은 비명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이승을 하직했다.
자업자득이었다.
주제 모르고 날 뛴 대가였다.
놈의 옷덜미를 손으로 잡은 채 컨테이너 밖으로 끌고 나갔다.
종태는 이미 경호원들을 돌려보낸 상태였다.
남들이 알아봤자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준비한 드럼통 안에는 아직 덜 굳은 시멘트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안으로 황장청의 빌어먹을 몸뚱이를 가볍게 내던졌다.
드럼통을 닫은 뒤 종태에게 말했다.
"준비한 배에 드럼통을 실으세요."
"네. 부회장님."
***
우리를 태운 배가 서해에 도착했다.
잠시 뒤 황장청이 고이 잠 든 드럼통을 서해 앞바다에 투척했다.
그 후, 인천 항만으로 곧바로 되돌아왔다.
한남동 상지원에 도착한 뒤 종태와 술자리를 가졌다.
우리는 신선한 과일을 안주삼아 고급 양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그 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나에게 접근한 메이링의 신상정보를 파악했습니다."
"황장청에게서 알아낸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본명은 왕청애고 사는 곳은 일정하지 않으며, 한국 임무를 끝마친 뒤 미국 쪽에서 새로운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라고 실토하더군요."
"그래서 어쩌실 계획입니까?"
"왕청애를 죽일 생각입니다."
종태가 흠칫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히시는 거 아닙니까?"
"그녀는 나를 농락했습니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3층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2월 3일에 미국 땅에 도착했다.
내 목표는 예일대학 유학생으로 위장한 왕청애의 모가지를 따는 것이었다.
그녀는 예일대학에서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미국 정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원의장 그레함을 포섭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십분 활용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왕청애의 계획은 성사될 수 없었다.
그녀의 앞에 내가 나타난 까닭이다.
왕청애는 뉴헤이븐시 고급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 침입하는 건, 누워서 식은죽 먹기였다.
아담 상원의원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진한 커피를 음미하며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을 무렵, 왕청애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흡사 귀신을 본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이름 왕청애. 나이 26. 중국 공산당 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국가안전부 특수요원으로 활약."
신상 명세를 대충 욻조리자, 그녀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나에게 대체 왜 이러시는 거죠?"
"그걸 정말 모르는거야?"
"네. 저는 모르겠어요."
그리 말하며 오른손을 패딩 점퍼 주머니 속으로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뽀얀 목덜미에 대검 한자루가 겨누어졌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박종태가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종태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권총 한자루를 꺼내서 내 쪽으로 던졌다.
왕청애를 무장해제 시킨 뒤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만 나가보세요. 그녀와 단 둘이 할 말이 있으니까."
"네. 부회장님."
종태가 나가자마자 그녀에게 물었다.
"총으로 정말 나를 죽이려고 했나?"
왕청애가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어쩔건데?"
"섭섭하군. 우리 사이가 이 정도 밖에 안됐다니."
그 말과 동시에 손에 든 대검으로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주저없이 그어버렸다.
푸욱!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지 여전히 두눈을 시퍼렇게 부릅뜨고 있었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왕청애는 나를 농락했다.
죽어도 싼 여자였다.
곧바로 아담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돌렸다.
나머지 일은 그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