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내 마음대로 한다
한남동 상지원에 이수경 경리 팀장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돈 가방이 들려있었다.
수경은 나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키신대로 은행에서 현찰로 20억을 인출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이만 가보세요."
"예. 부회장님."
수경을 내보낸 뒤 태산그룹의 진대현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40분 후.
진대현이 상지원 접견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면전에 나타난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유럽에 회사 소유의 고급 별장이 있나요?"
그가 즉답했다.
"스페인 이비자섬에 회사가 보유 중인 고급 주택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내렸다.
"이태강 중앙지검장을 그 쪽으로 보낼테니까 접대에 만전을 기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진대현이 접견실에서 사라지자마자 이재천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재천에게 내 요구를 밝혔다.
"이태강 중앙지검장을 만나서 입을 맞추세요."
-이태강 지검장과 잘 아시는 겁니까?
"호형호제하는 사이죠. 그 형님에게 말씀하시면 알아서 사태를 마무리 지을 겁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쓸데없이 내 이름이 중국 정부 쪽에 흘러들어가는 걸 철저히 차단하세요."
-염려마십시오. 부회장님.
"국정원장님만 믿겠습니다.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통 크게 한턱 쏘겠습니다."
그러자 수화기에서 이재천의 탐욕에 절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부회장님이 원하시는대로 사태를 원만하게 매듭짓겠습니다.
"마음에 드는군요.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면 한번 만납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
서울중앙지검.
이태강의 사무실에 검찰 수사관이 나타났다.
그는 경찰에서 회수한 CCTV 원본을 태강에게 전달한 뒤 사무실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중국 국가안전부의 서울 지부장이 도로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되는 장면이 모니터 화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태강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김한빈이 대형사고를 친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사건을 조용히 뒷수습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경찰에서 회수한 CCTV 원본을 전량 삭제했다.
그날 밤.
태강은 서초동 모처에서 이재천 국정원장과 만남을 가졌다.
이재천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중국 대사관 측에서 황장청을 찾고 있습니다. 조만간 검찰 쪽에도 의뢰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아요."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배후에 부회장님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한중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겁니다. 그러니 중앙지검 차원에서 미제 실종 사건으로 결론내 주십시오."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강은 그리 확언한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상암동 켄싱턴 빌딩.
펜트하우스의 피트니스룸에서 헬스 3대 운동에 매진할 즈음, 이태강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성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체 어쩌자고 중국놈을 건드린거야?"
태강의 잔소리는 계속 됐다.
"국가안전부의 서울 지부장을 왜 건드린 거냐고!"
그가 목소리를 높이며 나를 노려봤다.
"그래서 화라도 나신 겁니까?"
"경찰 CCTV 원본 영상을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인지 알아!"
돈 달라는 소리였다.
"책상 위에 돈이 있으니까 이제 그만 화를 푸십시오."
그제야 태강이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책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진 돈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얼마가 들은거야?"
"5만원권 현찰로 20억입니다. 그 돈으로 유럽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고맙군. 하하..."
녀석이 언제 그랬냐는듯 헤벌쭉 웃으며 돈가방을 손에 들었다.
"스페인 이비자 섬에 고급 별장을 마련해 뒀으니까 그 곳에서 푹 쉬다 오십시오."
"정말 그래도 될까?"
"태산그룹의 진대현 본부장에게 말해 놓을테니까, 필요한게 있으면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하세요."
"역시 내 생각해주는 건 우리 김회장 밖에 없구나. 고맙다. 우하하하하...!"
그의 입에서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
양경호 중국 국가안전부장은 장용강 서울 부지부장을 북경 안가로 호출했다.
그는 면전에 나타난 장용강에게 매서운 눈길로 입을 열었다.
"황장청의 신병을 아직도 확보하지 못한 건가?"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납치라도 당했단 말인가?"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CCTV는?"
"한국 경찰이 제공한 CCTV를 분석해 봤지만 이렇다할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양경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왕청애가 피살당했다."
순간 장용강이 흠칫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양경호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황장청과 왕청애가 비슷한 시기에 변을 당했다는 말은..."
그는 말끝을 흐리며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양경호의 입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장청과 왕청애에게 원한을 가진 인물이 배후에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저 역시 부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자네도 김한빈을 의심하나?"
"황장청과 왕청애의 정체를 아는 한국인은 김한빈이 유일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사건의 배후에는 그자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장용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말씀인데, 본격적으로 그자를 조사하는 게 어떨런지요?"
양경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자는 한국의 정관계와 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물이야. 일이 잘못되면 중한 관계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는 말이다."
"제가 책임지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양경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장용강의 얼굴에 칼날처럼 틀어박혔다.
"일이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네놈이 져야 할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장님."
양경호가 결심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한국에 파견된 특작요원을 총동원해서 김한빈의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도록!"
"존명!"
***
깁태구 경호팀장은 요즘 들어 부쩍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암동과 상지원을 중심으로 의심스런 남자들이 자주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그자들은 하나같이 몸이 건장했으며, 눈빛마저 섬칫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들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김한빈의 일거수일투족에 모아졌다.
태구는 직감했다.
그들의 목표가 한빈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런 사실을 한빈에게 낱낱이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
상지원의 너른 정원에 조성된 풀장에서 수영을 즐길 무렵, 김태구 경호팀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긴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여러장의 사진을 나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굴강한 체격과 강렬한 눈빛이 전매특허인 다수의 남자들이 드러나 있었다.
"이런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죠?"
"그 남자들이 얼마전부터 부회장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 드러난 남자들의 얼굴을 세심히 살피자, 중국인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특수요원이었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이놈들을 예의주시 하십시오."
"경찰에 신고할까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만 가보세요."
태구가 절도있게 허리를 숙인 뒤 장내에서 사라졌다.
이재천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할거 같았다.
***
남산 국정원 본부.
조웅래 1차장이 국정원장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재천은 눈 앞에 나타난 그에게 여러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인물들을 확인한 조웅래가 넌지시 말했다.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특작요원 같습니다."
"그자들이 김한빈 부회장 주변에 나타나는 이유가 뭔가?"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그래. 이 사진은 김 부회장의 경호원들이 제공한거야."
이재천이 명령을 내렸다.
"한국에서 함부로 행동하면, 중국으로 추방할 거라는 사실을 그자들에게 확실하게 주지시켜."
"알겠습니다. 원장님."
이재천은 사무실에서 나가려는 조웅래를 불러세웠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김한빈 부회장 주변에 나타난 중국놈들을 모조리 긴급체포하는 게 좋을거 같구만."
"너무 강수를 두시는거 아닐까요?"
"그 정도는 해야 중국애들이 우리 말을 알아먹을거 아니냐?"
조웅래가 허리를 숙이며 복명했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날 밤.
강남 모처의 라운지바에 조웅래가 나타났다.
그는 칵테일을 음미하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얼마 뒤 라운지바에 장용강 서울 부지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진토닉을 음미하며 본론에 돌입했다.
조웅래가 말했다.
"김한빈 부회장 주변을 들쑤시는 이유가 뭡니까?"
장용강이 유창한 한국어로 대꾸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그러자 조웅래가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서 여러장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사진을 살핀 장용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자들은 우리 사람이 아닙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까?"
장용강이 태연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함부로 행동할 경우, 그 즉시 중국으로 추방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럼 이만."
조웅래는 라운지바를 나서자마자 무전기를 입에 가져갔다.
그는 상암동과 한남동 상지원에 대기 중인 국정원 요원들에게 무전을 날렸다.
"중국 특작요원들을 발견하는 즉시, 모조리 긴급 체포한다."
조웅래는 무전을 끝마친 뒤 서울 모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상암동 켄싱턴 빌딩.
129층 사무실에서 결재서류에 부회장 직인을 날인하는데 전심전력할 무렵, 박은영 비서팀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시민단체 인사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정확히 어디 시민단체를 말하는 거죠?"
"아름다운 공존 재단입니다."
아름다운 공존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시민사회단체였다.
잘나가는 변호사와 재야단체 인사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 탓일까, 그들은 막강한 인재풀을 동원해서 대기업과 재력가들을 공갈협박하며 수백억대의 자산을 이룩했다.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도구로 시민사회단체를 이용한 것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은영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장 회사에서 내쫒으세요."
"예. 부회장님."
그녀가 조신하게 화답한 뒤 사무실을 나서려는 찰나, 50대의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막무가내로 쳐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거친 목소리로 삿대질을 해왔다.
"당신이 헤지펀드 세력과 손잡고 견실한 한국기업을 무차별적으로 기업 사냥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우리가 원하는 요구를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우리 요구를 거부하시면, 언론에 이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폭로하겠습니다!"
재밌는 양반이었다.
씨알도 안먹히는 개소리를 나불대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바로 그때, 경호원들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들은 곧바로 시민단체 인사를 제압했다.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한 그 남자를 쓰윽 훑은 뒤, 나직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이 분을 풀어주세요. 차나 한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그리 말하자 경호원과 은영이 사무실에서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맞은편에 앉은 시민단체 인사에게 홍차를 권했다.
그는 홍차 한모금을 입안에 머금은 뒤 자신의 요구를 밝혔다.
"아름다운 공존 재단에 100억 정도를 기부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사실을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100억을 기부하면 그 돈을 어디에 쓰실 생각이죠?"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해 쓰여질 예정입니다."
"그걸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남자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용처 문제는 우리가 자체적으로 감사하는 거니까, 부회장님은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기부한 돈의 사용처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런 걸, 돈 많은 부회장님이 뭐하러 신경을 쓰십니까? 어차피 저희가 다 알아서 하는 일인데."
말하는 뽄새가 '너희는 그냥 돈만 내놓아라.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라는 마인드였다.
소문대로 재벌과 부자들의 삥을 뜯은 돈으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부류가 확실한거 같았다.
그런 탓일까, 내 입에서 절로 싸늘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공존이 공신력 있는 외부 감사기관의 정기적인 감사를 받는다면, 얼마든지 100억을 기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운영진 마음 내키는대로 자체감사를 진행한다면, 단 한푼도 돈을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냉랭한 어조로 맞받아쳤다.
"결국 기부금을 한푼도 낼 생각이 없다는 말로 제 귀에는 들리는군요."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럼 저는 회사일이 바빠서..."
그리 말하며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녀석이 콧김을 씩식 불어대며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해외자본과 손잡고 온갖 불법을 자행한 증거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공표해도 좋으십니까?"
"내 알 바 아니니까 댁 마음대로 하시라고요."
그 말과 동시에 경호원들에게 콜을 넣었다.
직후, 경호원들이 사무실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경호원들은 남자를 짐짝처럼 끌고 나갔다.
그는 사무실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협박조의 언사를 쉼 없이 내뱉었다.
사기꾼의 전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