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운명의 변화
상암 켄싱턴 빌딩 129층.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에 좌정한 채 김동재 대영전자 사장이 올린 결재서류에 시선을 모았다.
<중국 정부 측에서 심천지역에 10조원 규모의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경우,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할 뿐만 아니라 법인세를 5년 동안 감면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호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중국 측의 투자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김동재는 참으로 순수한 남자였다.
나쁘게 말해서 돌대가리였다.
중국 공산당은 악의 화신이었다.
북한 공산당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중국이 원하는 건 대영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었다.
그걸 탈취하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김동재의 결재서류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진 뒤 박은영 팀장에게 콜을 넣었다.
"김동재 대영전자 사장을 호출하십시오. 지금 당장!"
-네. 부회장님.
30분 후.
김동재가 내 사무실에 나타났다.
면전에 서 있는 그에게 냉랭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중국 공산당은 인류에 해악만 끼치는 악마같은 놈들입니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는 말입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놈들은 우리 대영전자의 반도체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온갖 불법을 자행할 만반의 채비를 끝마친 상황입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하시겠습니까?"
김동재가 금세 주눅든 얼굴로 고개를 맹렬히 끄덕였다.
"한번만 더 중국 투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결재서류를 올리면, 당신은 그날부로 해고조치될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그의 입에서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넵. 부회장님!"
"이만 나가보세요."
김동재는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 숙인 뒤 사무실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잠시 뒤, 대영그룹의 이성철 본부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후 대영자동차 신임 대표이사 후보자들의 신상파일을 건넸다.
내 시선은 마성진의 신상파일에 절로 모아졌다.
그는 자동차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사무직 출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자동차에 대해서 누구보다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 이성철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성진이 마음에 드는군요."
"그자가 눈에 들어오십니까?"
"현장 엔지니어 출신인 점이 마음에 들어요. 마성진을 신임 사장으로 선임하는 안건을 임시주총에 상정하세요."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
늦은 밤.
대영자동차의 신임 대표이사로 발탁된 마성진이 상지원 접견실에 나타났다.
마성진은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인 뒤 공손한 태도로 면전에 시립했다.
푹신한 소파에서 흡연을 즐기며 눈 앞에 서 있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마성진은 50대 초반이었지만 몸관리를 잘한 탓인지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리고 체격도 단단했다.
부려먹기에 좋은 스타일이었다.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 목표는 전 세계 양산차 시장 1위를 굳건히 고수 중인 도요타 자동차를 능가하는 겁니다."
"그러자면 연간 자동차 생산 대수가 최소 1천만대 이상이어야 할겁니다."
마성진이 고심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도요타는 연간 1천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반면 저희 대영자동차는 4백만대 정도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당신에게 하는거 아닙니까?"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부회장님."
"변명은 됐고, 4년 안에 연간 판매량을 1천만대 수준으로 향상시키십시오."
그가 울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에게 나름의 비책을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우리 대영자동차가 살 길은 값싸고 튼튼한 중소형차를 생산하는 겁니다."
"지금보다 가격을 더욱 다운 시키라는 말씀입니까?"
"네. 도요타를 이기려면 그들보다 가격이 싸야 합니다. 반면 품질은 그들 수준으로 높여야 하겠죠."
"그럴 경우 영업이익이 반토막이 날 우려가 있습니다."
"영업이익이고 나발이고 내가 원하는 건, 연간 1천만대 판매에요.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십시오."
"흐으음..."
마성진의 입에서 침중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에게 재차 명령했다.
"값싸고 튼튼한 자동차를 전 세계 시민들에게 제공하십시오. 그게 내가 원하는 겁니다."
성진이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부회장님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중에 봅시다."
"네. 부회장님."
***
상암동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영박 후보가 박구내 후보를 7% 차로 누르고 승리했습니다. 중략...
예상대로였다.
한국당의 대선 뉴스가 끝나자마자 흥미로운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대영드래곤즈의 강속구 투수 한태민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습니다. 반면 드래곤즈의 단장과 감독 등은 한태민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중략...
한태민은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빠른 볼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였다,
160km에 육박하는 포심 패스트볼은 물론 정교한 제구력마저 일신에 구비한 국보급 선수였다. 한국이 나은 불세출의 대투수라고 할 수 있었다.
팀은 그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영드래곤즈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아직 FA 자격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입단 6년차에 불과한 탓이다.
그런 여러가지 이유로 그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불발에 그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태민은 2006년 5월 경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운명이었다.
내가 경험한 미래가 그랬다.
그런 탓일까, 불현듯 그의 불운한 운명을 바꿔주고 싶은 욕망이 활화산처럼 치솟았다. 국보급 대투수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태민은 강남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할 예정이었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를 하루 빨리 해외로 내보내는게 상책이었다.
태민이 원하는대로 메이저리그 진출을 허용하는 게 급선무라는 판단이 섰다.
그는 대영드래곤즈 소속이었다.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이 대영그룹 스포츠단 산하에 속한 팀이었다.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그를 얼마든지 메이저리그에 진출시킬 수 있었다.
옆에 동승한 박은영 비서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 사무실로 대영드래곤즈 단장을 호출하세요."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프로야구팀의 단장을 호출하라는 말씀인가요?"
"네. 제가 평소에 야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그 사람에게 연락을 넣으세요."
은영이 납득한 얼굴로 조신하게 화답했다.
"예. 부회장님."
***
상암동 켄싱턴 빌딩.
사무실에서 대영그룹과 태산그룹의 결재서류를 살필 무렵, 50대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대영드래곤즈의 송요섭 단장입니다. 부회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 말하며 나를 향해 허리를 90도 각도로 깍듯이 접었다.
면전에 공손히 서 있는 송요섭에게 넌지시 말했다.
"한태민을 포스팅을 통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태민이 대영드래곤즈의 핵심 전력입니다. 그 친구가 팀에서 이탈하면 금년 시즌 성적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회장님."
"나도 아는데, 한태민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많은 국민들이 원하는 게 현실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저는 팀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팀 사정도 생각해 주십시오."
역시 좋은 말로 해서는 말귀를 못알아먹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강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포스팅 경쟁 입찰을 통해서 한태민을 메이저리그에 진출시키세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목소리를 높인 탓인지, 송요섭이 내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예상대로 그의 입에서 내가 원하는 답변이 흘러나왔다.
"부회장님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저는 한태민이 뉴욕 양키스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는 것을 원합니다."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체결하라는 말씀입니까?"
"입찰 가격이 비슷하면 무조건 양키스와 계약을 체결하세요.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니까."
송요섭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복명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님."
***
한태민은 자택 거실에서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대영드래곤즈의 송요섭 단장이 한태민의 메어지리그 진출을 허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중략...
태민은 하늘에 오를 듯 감격했다.
그의 평생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진 탓이다.
바로 그때, 소파에 누워있는 핸드폰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그는 전화통화를 끊자마자 드레스룸으로 직행했다.
중요한 인물의 연락이었기 때문이다.
힐튼호텔 스위트 룸에 한태민이 나타났다.
그는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던 뉴욕 양키스의 채드맨 단장과 동아시아 스카웃 담당관인 아서 등과 차례로 악수를 교환했다.
태민은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유창한 영어로 본격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는 100마일(160km)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볼과 커브, 커터, 슬라이더, 스플리터, 체인지업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구력도 최상급이라고 자부합니다."
채드맨 단장과 아서가 동의한다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뉴욕 양키스에서 투수로 활동하는 제 자신을 상상했습니다. 그러니 포스팅 입찰에서 양키스 구단이 최고액을 제안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채드맨이 흡족한 얼굴로 화답했다.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양키스는 미스터 한의 투구 능력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서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미스터 한이 사이영 상을 수상할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그 정도로 당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뜻입니다."
태민이 감격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정중히 목례를 취했다.
***
용인 CC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즐길 무렵, 대영드래곤즈의 송요섭 단장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한 뒤 긴급 현안을 구두로 보고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총 24개팀이 포스팅 경쟁 입찰에 참여했습니다.
"포스팅 최고 입찰가를 제시한 팀이 어디죠?"
송요섭이 즉답했다.
"뉴욕 양키스와 LA 다저스가 똑같이 3500만불을 입찰가로 제안했습니다."
나는 LA 다저스를 싫어했다.
마음에 안드는 팀이었다.
당연히 최애팀인 뉴욕 양키스를 낙점했다.
LA 다저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초명문팀이었기 때문이다.
"뉴욕 양키스 관계자들이 한국에 입국했나요?"
"네. 단장과 스카웃 책임자들이 입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내렸다.
"뉴욕 양키스의 단장과 자리를 만드세요."
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부회장님이 직접 교섭에 나설 생각입니까?"
"내가 책임지고 한태민에게 좋은 계약을 안겨다줄 계획입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일 저녁 7시 경에 한남동 상지원으로 뉴욕 양키스 단장을 데리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
다음날 저녁.
한남동 상지원에 뉴욕 양키스의 채드맨 단장 일행이 나타났다.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교환한 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만찬을 즐겼다.
그 후, 접견실에서 채드맨 단장과 단 둘이 협의를 진행했다.
채드맨에게 내 요구 사항을 밝혔다.
"마이너 거부권 조항을 계약서에 반드시 삽입해 주십시오. 그리고 연평균 연봉은 최소 500만불(60억) 이상을 보장하십시오."
"으으음..."
채드맨이 곤혹스런 얼굴로 침중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한태민은 160킬로에 육박하는 강속구와 안정적인 제구력, 변화구 구사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얼마든지 사이영 상 수상이 가능한 수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