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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이 돈을 숨김-102화 (102/175)

102화 위대한 한국인

이성준은 거의 날마다 와이프인 김미란과 부부싸움을 하느라, 골머리가 미친 듯이 아플 지경이었다.

김미란은 쇼핑 중독자였다.

그런 탓일까, 오래전부터 대영백화점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허나, 성준은 대영그룹에서 축출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란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대영물산 지분을 김한빈에게 넘기는 대가로 백화점을 갖고 오자고!"

"이년아! 대영물산 지분이 얼마나 귀한건데, 그걸 백화점이랑 맞바꾸냐?"

"어차피 써먹지도 못하는 지분이잖아! 그러니까 내말대로 하자니까."

그녀 말대로 성준이 보유한 대영물산 지분은 김한빈과 공동 의결권 계약이 체결된 상태였다. 한빈의 허락이 없는 한, 매각 자체도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미란은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대영백화점 가치가 3조원이 넘는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물산 지분을 김한빈에게 완전히 넘기는 대가로 백화점을 갖고오자구. 자기야. 제발!"

성준은 지긋지긋한 심경이었다.

미란의 집요한 바가지에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결국 그의 입에서 미란이 원하는 내용이 슬며시 흘러나왔다.

"백화점을 재대로 경영할 자신은 있고?"

"당연히 있지. 내가 백화점을 원데이 투데이 가보니. 내 집 안방처럼 편한 곳인데."

"그거랑 경영이랑 무슨 상관이냐?"

"나같은 열혈 고객들이 백화점 경영을 얼마나 잘하는데. 그러니까 자기는 김한빈을 만나서 딜을 넣어보라고."

"으휴... 내가 너 때문에 돌아버리겠다."

성준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란의 요구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

한남동 상지원에 이성준이 나타났다.

거의 1년 7개월 만에 보는 녀석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성준이 나름 반갑게 느껴졌다.

"성준씨를 오랜만에 보니까 솔직히 반가운 심경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녀석은 그리 화답하며 얼굴 가득 씁쓸한 표정을 떠올렸다.

뭔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저를 찾아온 용건이 있나요?"

그가 머리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부회장님에게 진지하게 제안할 사안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대영물산의 지분을 부회장님에게 완전히 넘기는 조건으로 대영백화점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싶습니다."

뜻 밖의 제안이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인가요?"

"오랜 고민 끝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단단히 각오를 하신 모양이네요."

"어쩌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

"흐으음..."

내 입에서 절로 침중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성준이 보유한 대영물산의 지분 가치는 조단위 수준이었다.

반면 대영백화점은 증시에 상장할 경우 최소 3조원 이상의 시총을 기록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어림 잡아 1조원 이상의 갭차이가 있었다.

그런 점을 성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녀석의 입에서 통 큰 언사가 흘러나왔다.

"나머지 차액은 현금으로 부담하겠습니다. 대신 매각가를 파격적으로 인하해 주십시오."

"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자금이 어느 정도죠?"

그가 즉답했다.

"6천억 가량입니다. 원하신다면 현금 일시불로 지불할 의향이 있습니다."

"현금 일시불이라...?"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물산지분과 현금 6천억을 제공하는 대가로 대영백화점의 경영권을 달라는 말씀이군요."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만발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결국 그의 요구에 부응하는 언사를 나직한 어조로 내뱉었다.

"성준씨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녀석이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마음에 드는 자세였다.

***

상암동 켄싱턴 빌딩.

129층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대영그룹의 이성철 본부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사무실에 나타난 그에게 거두절미하고 명령을 내렸다.

"이성준씨를 만나서 대영백화점 매각 논의를 진행하세요."

그가 해연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말 이성준에게 백화점을 넘기실 생각입니까?"

"현금 6천억을 일시불로 지급받는 조건으로, 대영백화점 지분을 맞교환할 방침입니다."

"부회장님. 대영백화점의 가치는 최소 3조원 이상입니다."

"됐어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십시오."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그제야 성철이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가 사무실에서 사라진 뒤 창가로 걸어나갔다.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자만의 사색에 잠겼다.

나는 대영백화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조만간 백화점을 매각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성준이 백화점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대영그룹 지주사인 물산 지분을 무려 12%나 보유하고 있었다.

녀석의 지분을 완전히 인수한다면, 나는 확고한 과반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불안정한 공동 의결권보다 훨씬 안전한 방패막이었다.

***

저녁 무렵.

상지원의 풀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한편 장동현에게 전화를 돌렸다.

1시간 후.

접견실에 들어서자 장변이 나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해왔다.

그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한 뒤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면전에 앉은 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성준의 대영물산 지분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대영백화점을 현금 6천억에 넘기기로 구두로 합의를 봤습니다."

"이면 계약서가 필요하겠군요."

"네. 그래서 장변을 부른 거죠."

"나중에 딴 말이 나오는 걸 방지하는 차원에서, 이성준의 지분을 인수하는 대가를 따로 지불하시는 편이 좋을거 같습니다."

"천억 정도면 적당할까요?"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그럼 장변이 이면 계약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내걸렸다.

장변은 내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충직한 남자였다.

***

상암동 켄싱턴 빌딩 사무실에서 업무에 매진할 무렵, 박은영 비서팀장이 내 앞에 나탔다.

그녀가 고운 목소리가 보고를 올렸다.

"한태민 선수의 부친인 한장석씨가 찾아왔습니다."

"그 분이 왜, 나를 찾아온거죠?"

"부회장님에게 드릴 선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예. 부회장님."

"그럼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네."

잠시 후, 한장석씨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뉴욕 양키스 입장권 2매를 선물했다.

"이번주 주말에 펼쳐질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라이벌전에 아들놈이 선발로 등판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부회장님이 꼭 참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흐뭇한 순간이었다.

태민의 정성이 가득 담긴 입장권 선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한태민 선수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꼭 전해 주십시오. 물론 경기를 직접 관람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태민이도 부회장님이 직관해 주시면 더욱 힘을 낼 겁니다."

그리 화답하며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한장석을 내보내자마자 은영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뉴욕으로 갈거니까 전용기를 대기시키세요."

"예. 부회장님."

"혹시 야구 좋아하세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죠?"

"한장석씨가 뉴욕 보스턴전 티겟을 두장이나 선물했는데, 같이 보러갈 사람이 없네요."

야구 티켓을 보여주며 그리 말하자, 은영이 아쉬워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내일 남자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그렇지만 부회장님 명령이라면 이번 출장에 같이 따라갈게요."

은영이 그리 말하자, 갑자기 김이 팍 샜다.

그런 탓인지 내 입에서 절로 퉁명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수 없네요. 저 혼자 보러 갈 밖에. 이만 나가서 일 보세요."

은영은 송구한 얼굴로 허리를 숙인 뒤 사무실에서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나에 대한 미련을 포기한 모양새였다.

내 앞에서 대놓고 남자친구가 있다고 선언한 탓이다.

하긴, 그녀는 내 비서였다.

여비서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유지해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우리는 지금처럼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게 서로가 편한 길이었다.

***

뉴욕에 도착한 후 센트럴파크 인근의 포시즈 호텔 스위트룸에 여장을 풀었다.

그 후, 야구 경기가 한창 열리는 양키스 스타디움으로 직행했다.

태민은 3연전 티겟을 나에게 선물했다.

3일 내내 1루 관객석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티겟이었다.

오늘 양키스의 선발 투수는 한화로 3천억에 달하는 몸값을 자랑하는 가렛 콜이었다. 그는 무지막지한 강속구와 회전수를 바탕으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전형적인 파워피처였다.

하지만 가렛 콜은 1회부터 보스턴 타자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있었다.

홈런과 2루타, 단타 등을 두루 허용하며 1회에만 무려 4실점한 것이다.

녀석은 2회에도 마찬가지로 보스턴의 선두 타자에게 커다란 홈런을 맞았다.

결국 양키스 감독은 돈값을 못하는 가렛 콜을 마운드에서 강판 시킨 뒤 중간 계투 요원들을 차례로 투입시켰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보스턴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런 때문일까, 양키스 홈팬들은 돈값 못하는 가렛콜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돈 쳐먹는 하마 가렛 콜은 지구를 떠나라!"

"개먹틔 가렛콜!"

"쉣더 퍽이다! 염병할 가렛 콜!

"타르 안바르면 제대로 못던지는 개거품 타르콜...!"

소문대로 양키스의 홈팬들은 몹시 거칠었다.

그들은 양키 선수들이 못할 경우 무자비한 비난을 퍼부었다.

얌전한 한국 팬들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

다음날.

해가 떨어지자마자 양키스 구장으로 직행했다.

오늘은 태민이 양키스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날이었다.

그런 탓인지 그가 조금 걱정됐다.

보스턴의 무지막지한 강타선 때문이었다.

보스턴은 1번부터 9번까지 거를 타순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태민을 믿었다.

그의 강속구와 자로 잰듯한 날카로운 커맨드(제구력)을 신봉한 까닭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태민은 100마일에 육박하는 강속구와 칼날같은 제구력을 선보이며 3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그런 탓일까, 양키스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 구호가 스타디움에 가득 울려퍼졌다.

"슈퍼 아시안 태민!"

"우리는 너를 믿는다! 태민!"

"양키의 희망 태민! 보스턴 쓰레기들을 개박살 내라!"

"알러뷰 태민! 보스턴 개자식들을 작살을 내주세요!"

"태민. 당신 아기를 갖고 싶어요!"

양키스 팬들의 열광적인 성원 덕분인지 그날, 태민은 8이닝 14K 1피안타 무실점의 완벽한 호투를 선보였다.

가렛 콜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투구였다.

그날 밤.

한태민을 한식당 레스토랑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감자탕을 안주 삼아 소맥을 물처럼 들이켰다.

둘다 술고래인 탓에 새벽 2시까지 술자리를 즐겼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태민에게 준비해온 선물을 전달했다.

그는 내가 선물한 람보르기니 차키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뒤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부회장님."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선물하는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하하..."

내 입에서 절로 흡족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만 밤이 깊었으니, 나중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한식당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오늘도 양키스와 보스턴의 라이벌전을 밤 늦도록 관람한 뒤 포시즌 호텔의 지하 라운지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운지바에서 진토닉을 음미하며 혼자만의 사색을 만끽할 무렵,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미모의 라틴계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일본에서 왔나요?"

그녀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미안해요. 저는 일본 분인지 알았어요."

"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후후..."

씁쓸한 웃음을 흘려보내자, 그녀가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치며 재차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뉴욕에는 무슨 일로 오신거죠?"

"그냥 비지니스 차원으로 방문했습니다."

"비지니스를 크게 하시나봐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그녀가 악수를 청해왔다.

"정식으로 인사하죠. 저는 홍보기획사에서 일하는 제시카라고 해요."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맞잡으며 나를 대충 소개했다.

"대영전자에서 일하는 김한빈이라고 합니다."

"휴대폰과 TV를 만드는 가전회사를 말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와! 이거 인연이네요. 저희 회사가 요즘 대영 TV의 광고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중인데."

"그런가요?"

"네. 조만간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광고를 시작할 예정이에요."

대영전자는 북미 지역에서 연간 수조원대의 광고를 집행하고 있었다.

그런 탓일까, 나를 쳐다보는 제시카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한빈씨의 직급을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내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직감한 눈치였다.

내가 몸에 걸친 럭셔리 시계와 명품 수트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솔직히 말했다.

"대영전자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과장된 언사를 내뱉었다.

"우와! 오늘 정말 운이 좋은가봐요. 한빈씨처럼 대단한 남자를 다 만나다니!"

미국인 특유의 오버스런 화법이었다.

제시카의 과장된 언사를 귓등으로 흘리며 넌지시 말했다.

"호텔방에서 저랑 술 한잔 더 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그녀는 내 노골적인 제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좋아요. 호호호..."

그날 우리는 하루밤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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